
과학적 교육학의 등장
프로이센의 철학자이자 교육사상가 요한 헤르바르트는 윤리학에 기초해 교육목표를 정하고 심리학에 기초해 교육과정을 설계하여 모든 교육활동의 토대가 되는 일반 이론을 담은 『일반교육학』(1806년)을 발표함으로써 교육학을 근대적 의미의 학문으로 정립한 인물로 평가된다. 루소와 페스탈로치, 칸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헤르바르트의 교육론이 널리 퍼졌음에도 19세기의 교육은 교사중심, 암기중심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리아 몬테소리(1870-1952)는 자신이 어렸을 때 받았던 교육, 교사의 강의를 그대로 따라 적고 암기하는 방식, 교사가 질문하면 일어서서 교과서에 적힌 대로 답하게 하는 전통적인 수업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교사중심 교육이 아닌 새로운 교수학습법을 고안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의학을 공부하고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가 된 몬테소리는 정신지체 아이들을 만나면서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의료적 처치가 아닌 교육적 조치임을 깨닫고 교육학과 심리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정신지체 아동을 대상으로 시도한 교육을 일반 아동에게도 적용해보고자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어린이의 집’을 개원했는데, 그 교육성과가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몬테소리학교가 잇달아 문을 열었다. 오늘날 미국에만도 약 5천여 개의 몬테소리학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학교는 대부분 사립학교이지만, 교육 프로그램은 공교육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몬테소리학교는 3~6세, 7~9세, 10~12세, 3년 단위의 연령별 통합교실을 운영한다. 이중 가장 인기 있는 교실이 유아 시기의 3~6세 반이다. 몬테소리학교 교사가 되려면 몬테소리가 ‘관찰의 과학’이라고 명명한 교사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하는데, 이는 자연적 환경과 실험적 환경에서 아동 정신의 발달과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몬테소리는 특히 ‘민감기’의 관찰을 강조했는데, 0~6세 아이들의 연령에 따라 나타나는 특정 분야에 대한 강한 민감성을 관찰하면서 준비된 학습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교사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보았다.
몬테소리 교육에서는 특히 교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학년별로 아이들의 감각운동에 적합한 다양한 교구들이 제공된다. 몬테소리는 아이들 속에 있는 내재적 동기를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되는 활동을 제공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몬테소리 교육의 뛰어난 성과가 입증되자 세계 각국에서 몬테소리 교육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교구회사를 세웠다. 몬테소리는 교육자이자 사상가이며, 운동가이면서 동시에 사업가적 면모를 갖춘 보기 드문 캐릭터이다.
빈민 아이들을 위한 페스탈로치의 학교가 그러했듯이, 처음에는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몬테소리학교도 담배공장 노동자 자녀를 위한 학교로 시작되었던 발도르프학교도 교육적 성과가 알려지면서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들로 바뀌었다. 교육 프로그램이 일부 공교육에 접목되기도 하지만 그 고유한 교육방식은 보편교육으로 이루어지기에는 무리가 있어 대부분 사립학교 형태로 운영된다. 빈민을 위한 교육으로 시작된 진보교육의 수혜가 결국 중산층 또는 상류층 자녀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교육운동의 아이러니다.1)
한편 듀이는 몬테소리 교육 방식이 지나치게 구조화되어 있어 아이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첫 단계는 반드시 시행착오를 경험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말한 듀이가 보기에 몬테소리 교육은 학생들이 시간 낭비 없이 지적 능력을 갖추도록 하려는 목적의식이 너무 앞선다는 것이다. 하지만 듀이도 몬테소리도 아이들의 호기심과 창의력을 북돋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교사중심의 교육을 지양한 점에서는 일치한다. 몬테소리 교육 방식은 교사가 교육과정을 지도하고 학생들이 기본 교과 내용을 익히도록 도와주지만 학습 속도와 시기는 학생에게 맞춘다는 점에서 아동중심 교육의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19세기 말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과학적 교육학’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과학의 시각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것이 20세기 교육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면 몬테소리는 그 선구자인 셈이다. 몬테소리와 동시대에 활동한 존 듀이2)를 비롯한 많은 진보교육 사상가들도 과학적 관점에서 교육에 접근했으며,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로서 스위스 제네바의 몬테소리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한 피아제는 인지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현대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심리학과 뇌과학, 의학 등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점점 커지고 있다. 덕분에 아동의 발달과정과 심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학습이 이루어지는 원리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성장을 ‘발달’의 관점에서 보게 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물활론적 상상력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아직 덜 발달한 미숙한 존재로 보는 것이 적절할까. 골격이 자라면서 유연성을 잃게 되는 것은 발달일까 퇴화일까. 모든 시기의 아이들은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가 아닐까. 다른 아이에 비해 성장이 빠르든 더디든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로 보는 것이 교육적인 관점이 아닐까. 합리적, 연역적인 과학적 접근은 보편성을 전제로 하므로 구체성과 개별성을 놓치기 쉽다. 반면, 교육 현장에서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아이들을 상대하므로 경험적, 귀납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과학과 교육학의 만남이 보편성과 개별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교육주체로 등장한 국가
19세기 후반 독일 통일을 이루고 보불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프로이센의 교육에 세계가 주목했는데, 신생국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적극적이었다. 엘리자베스 피바디(1804-1894)는 미국 공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레이스 만3)과 함께 독일 교육을 미국에 들여온 대표적인 인물로, 사상가라기보다 유아교육 분야의 운동가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시는 독일인 이민자가 급증하던 시기여서 이민자 자녀들을 위한 독일어 유치원이 먼저 문을 열었는데, 피바디는 영어를 쓰는 프뢰벨 유치원을 처음 열고 교사교육기관을 세워 유치원 보급에 앞장섰다. 그는 애머슨을 비롯한 초월주의 사상가들과도 깊이 교류했는데, 이는 종교성이 강한 프뢰벨 교육의 전도사로 활약하게 된 정신적 배경이기도 하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탁월한 전략전술 못지않게 그의 군대가 국민군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4) 왕이나 귀족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군대가 자유주의 혁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열망에 고취된 국민군의 사기를 당할 수는 없었다. 100여 년 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에 질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복고왕정의 군대보다 프로이센 국민군의 사기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프로이센 병사들의 체력이 월등했다.
루소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 이후 프로이센은 루소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챙기는 사회주의 정책을 도입하면서 부국강병을 이루게 된다. 1826년 의무교육제도를 세계 최초로 시행했으며, 교육운동가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얀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슬로건을 걸고 근대식 체조운동을 창안해 각급 학교에 보급했다. 평행봉, 뜀틀, 철봉 같은 운동기구들을 고안해 강도 높은 체조교육을 실시하면서 청소년들의 체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까지 갖춘 청년들이 반외세를 넘어 반귀족 운동에 가담하는 일이 늘어나자 프로이센 정부는 체조교육을 금지하고 얀을 구속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이 강군이 되는 데 체조교육은 크게 기여했다. 또한 프로이센은 국가 차원에서 천연두 예방접종을 실시함으로써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반면, 천연두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간 프랑스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유방임주의를 고수한 복고왕정의 프랑스와 의무교육제도를 비롯해 국민보건제도 등 사회주의 요소를 도입한 프로이센의 대결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프로이센의 교육제도는 미국과 일본을 거쳐 이 땅에도 이식된다. ‘유치원(幼稚園)’이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을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듯이 ‘국민학교’라는 명칭 또한 프로이센에서 처음 생겨난 볼케슐레(Volkeshule)를 근대 일본인들이 그대로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다.5) 우리나라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프로이센의 교육제도에 가닿는다. 19세기 말 미국의 수많은 젊은 엘리트들이 독일 유학을 다녀와 신생 미국의 정부 요직을 차지했으며, 메이지 유신으로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일본 또한 독일과 미국의 교육제도를 수입하기 바빴다. 그 수입품은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도 이식되었다.
구한말 국권 회복을 꿈꾸며 선각자들이 방방곡곡에 세운 수천 개의 학교들이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의 사립학교령에 의해 대부분 문을 닫기에 이른다.6) 그나마 유치원은 사립학교법에 저촉되지 않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7) 일제강점기에는 민간이 설립한 민립학교와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스쿨 그리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설립된 관립학교 세 유형의 학교가 병립했는데, 목표는 서로 달랐지만 교육 방식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이 학교 체제가 해방 이후 공교육 체제로 그대로 이어지면서 유신정권 군국주의 교육의 모태가 된다. 월요일 아침마다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국민보건체조를 시키며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국민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유신시대 교육의 뿌리는 독일통일을 이루고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의 교육이었던 셈이다.
근대교육의 두 얼굴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과 독일 제국 초대 총리 비스마르크를 잇는 인물이 독일 제3제국 총통 히틀러라는 점에서 “히틀러가 루소의 후예”라는 버트란트 러셀의 말은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다. 아동중심 교육과 낭만주의를 연 루소의 사상이 파시즘으로 이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한국 등지에서 근대교육이 파시즘으로 치달은 것은 왜일까. 반면 어느 나라보다 독일 교육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미국은 어떻게 예외가 될 수 있었을까. “히틀러가 루소의 후예라면 루스벨트와 처칠은 로크의 후예”라고 말한 러셀의 표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독일보다 자유주의의 뿌리가 깊이 뻗어 있던 영국의 문화적 영향이 더 컸던 것이 파시즘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이유일까?
근대교육의 특징 중 하나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국가가 끼어든 것이다. 학교 제도를 통해 국가는 교육주체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산업혁명기에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와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를 막는 긍정적인 효과와 함께 국가가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서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20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은 국가주의 파시즘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에 벌어진 이념 투쟁이기도 했다. 달리 보면 아이들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 부모보다 국가의 힘이 더 컸던 사회와 그렇지 않았던 사회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유아학교를 비롯해) 모든 학교는 아이를 부모로부터 떼어놓는 한편, 부모 그 중에서도 어머니들이 아이에게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근대화와 함께 일터와 생활공간이 분리되면서 육아 문제는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문제가 되었다. 아이들과의 유대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여성일지라도 육아에 매인 삶을 원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관점에서 유치원과 학교는 부모와의 유대를 약하게 만드는 측면과 함께 부모의 절대적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부모보다 국가의 영향력이 더 커져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전체주의 사회로 기울고, 부모가 알아서 아이를 돌봐야 하는 각자도생 사회나 부모도 국가도 아이를 잘 돌보지 않는 사회는 자유방임으로 흐른다. 전체주의와 자유방임주의 사이 어느 지점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것이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일 것이다. 이는 곧 사회와 개인, 공과 사의 긴장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유아교육은 오랫동안 민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지만 누리과정이 시행되고 공립 유치원 수가 늘어나면서 점차 국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추세다. 보육보다 교육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는 추세이기도 하다.8) 정부는 올해 1월부터 유보통합 모델로 ‘유아학교(가칭)’를 시범 운영하고 있다. 2025년부터 교육부를 관리 주체로 해서 전국적으로 본격 시행할 계획인데, 그렇게 되면 유아교육도 공교육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근대교육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국가주도의 교사중심 교육이 그 한쪽이라면 아동중심의 교육이 또 다른 한쪽이다. 교사중심 교육이 전통교육의 맥을 잇는 보수적 교육이라면 아동중심 교육은 루소 이후에 등장한 진보교육의 핵심을 이룬다. 데이비드 페레로가 “전통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100년 전쟁”이라고 표현한 것처럼9) 20세기의 교육은 국가와 부모(또는 국가와 교사) 사이, 교사와 아동(또는 교사와 부모) 사이에서 오락가락해왔다. 흔히 교육의 3주체라고 일컬어지는 부모와 교사,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이는 곧 공공성과 자율성, 보편성과 개별성을 구현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근대교육의 해묵은 과제이자 교육의 본질과도 연결된 문제일 것이다.
1) 야학과 공부방, 대안학교로 이어지는 한국의 민간 교육운동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쳐왔다고 볼 수 있다.
2) 존 듀이(1859-1952)와 몬테소리는 공교롭게도 1952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몬테소리는 82세, 듀이는 93세였다.
3) 피바디의 제부(弟夫)이기도 한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은 1837년 메사추세츠 주 교육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다양한 이민자들을 통합할 수 있는 길이 학교교육에 있다고 보고 ‘공립 보통학교 운동’을 펼쳤다. 이전까지 마을이나 교회 단위로 이루어졌던 학교교육이 그 후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재정으로 뒷받침되는 공교육으로 바뀌게 된다.
4) 국민군의 시초는 17세기 초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이 호구조사와 함께 시도한 징병제다.
5)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일제 잔재라고 해서 초등학교로 바뀌었듯이 유치원 명칭을 ‘유아학교’로 바꿔야 한다는 국민청원이 2020년부터 올라오고 있지만, 군국주의 냄새가 나는 국민학교에 비해 유치원 명칭에 대한 거부감이 덜해서인지 국민적 공감대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6)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1908년 경성에만 백여 개의 사립학교가 있었으며, 전국적으로는 5천여 개, 20만 명 가까운 학생들이 있었다. 서당의 수도 만(萬)을 헤아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교 수는 조선총독부의 사립학교령 반포 이후인 1910년 5월에는 1973개 교로, 1915년 5월에는 1154개 교로 줄어들었다.
7) 1921년 전국에 47개의 유치원이 있었는데 그중 15개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곳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치원인 이화유치원(현 이화여대 사범대 부속 유치원)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프뢰벨식 유치원으로, 주요 교과목이 수공, 은물, 유희 등이었다.
8) 어린이집은 영유아보육법에 의해 운영되는데 반해 유치원은 유아교육법에 의해 운영되며 법적으로 학교로 분류된다.
9) David J. Ferrero, “Pathways to Reform: Start with Values”, Educational Leadership 62. no. 5(February 2005): 10.
_ 현병호(《민들레》 발행인)
과학적 교육학의 등장
프로이센의 철학자이자 교육사상가 요한 헤르바르트는 윤리학에 기초해 교육목표를 정하고 심리학에 기초해 교육과정을 설계하여 모든 교육활동의 토대가 되는 일반 이론을 담은 『일반교육학』(1806년)을 발표함으로써 교육학을 근대적 의미의 학문으로 정립한 인물로 평가된다. 루소와 페스탈로치, 칸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헤르바르트의 교육론이 널리 퍼졌음에도 19세기의 교육은 교사중심, 암기중심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리아 몬테소리(1870-1952)는 자신이 어렸을 때 받았던 교육, 교사의 강의를 그대로 따라 적고 암기하는 방식, 교사가 질문하면 일어서서 교과서에 적힌 대로 답하게 하는 전통적인 수업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교사중심 교육이 아닌 새로운 교수학습법을 고안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의학을 공부하고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가 된 몬테소리는 정신지체 아이들을 만나면서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의료적 처치가 아닌 교육적 조치임을 깨닫고 교육학과 심리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정신지체 아동을 대상으로 시도한 교육을 일반 아동에게도 적용해보고자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어린이의 집’을 개원했는데, 그 교육성과가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몬테소리학교가 잇달아 문을 열었다. 오늘날 미국에만도 약 5천여 개의 몬테소리학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학교는 대부분 사립학교이지만, 교육 프로그램은 공교육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몬테소리학교는 3~6세, 7~9세, 10~12세, 3년 단위의 연령별 통합교실을 운영한다. 이중 가장 인기 있는 교실이 유아 시기의 3~6세 반이다. 몬테소리학교 교사가 되려면 몬테소리가 ‘관찰의 과학’이라고 명명한 교사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하는데, 이는 자연적 환경과 실험적 환경에서 아동 정신의 발달과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몬테소리는 특히 ‘민감기’의 관찰을 강조했는데, 0~6세 아이들의 연령에 따라 나타나는 특정 분야에 대한 강한 민감성을 관찰하면서 준비된 학습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교사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보았다.
몬테소리 교육에서는 특히 교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학년별로 아이들의 감각운동에 적합한 다양한 교구들이 제공된다. 몬테소리는 아이들 속에 있는 내재적 동기를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되는 활동을 제공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몬테소리 교육의 뛰어난 성과가 입증되자 세계 각국에서 몬테소리 교육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교구회사를 세웠다. 몬테소리는 교육자이자 사상가이며, 운동가이면서 동시에 사업가적 면모를 갖춘 보기 드문 캐릭터이다.
빈민 아이들을 위한 페스탈로치의 학교가 그러했듯이, 처음에는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몬테소리학교도 담배공장 노동자 자녀를 위한 학교로 시작되었던 발도르프학교도 교육적 성과가 알려지면서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들로 바뀌었다. 교육 프로그램이 일부 공교육에 접목되기도 하지만 그 고유한 교육방식은 보편교육으로 이루어지기에는 무리가 있어 대부분 사립학교 형태로 운영된다. 빈민을 위한 교육으로 시작된 진보교육의 수혜가 결국 중산층 또는 상류층 자녀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교육운동의 아이러니다.1)
한편 듀이는 몬테소리 교육 방식이 지나치게 구조화되어 있어 아이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첫 단계는 반드시 시행착오를 경험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말한 듀이가 보기에 몬테소리 교육은 학생들이 시간 낭비 없이 지적 능력을 갖추도록 하려는 목적의식이 너무 앞선다는 것이다. 하지만 듀이도 몬테소리도 아이들의 호기심과 창의력을 북돋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교사중심의 교육을 지양한 점에서는 일치한다. 몬테소리 교육 방식은 교사가 교육과정을 지도하고 학생들이 기본 교과 내용을 익히도록 도와주지만 학습 속도와 시기는 학생에게 맞춘다는 점에서 아동중심 교육의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19세기 말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과학적 교육학’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과학의 시각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것이 20세기 교육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면 몬테소리는 그 선구자인 셈이다. 몬테소리와 동시대에 활동한 존 듀이2)를 비롯한 많은 진보교육 사상가들도 과학적 관점에서 교육에 접근했으며,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로서 스위스 제네바의 몬테소리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한 피아제는 인지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현대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심리학과 뇌과학, 의학 등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점점 커지고 있다. 덕분에 아동의 발달과정과 심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학습이 이루어지는 원리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성장을 ‘발달’의 관점에서 보게 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물활론적 상상력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아직 덜 발달한 미숙한 존재로 보는 것이 적절할까. 골격이 자라면서 유연성을 잃게 되는 것은 발달일까 퇴화일까. 모든 시기의 아이들은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가 아닐까. 다른 아이에 비해 성장이 빠르든 더디든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로 보는 것이 교육적인 관점이 아닐까. 합리적, 연역적인 과학적 접근은 보편성을 전제로 하므로 구체성과 개별성을 놓치기 쉽다. 반면, 교육 현장에서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아이들을 상대하므로 경험적, 귀납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과학과 교육학의 만남이 보편성과 개별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교육주체로 등장한 국가
19세기 후반 독일 통일을 이루고 보불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프로이센의 교육에 세계가 주목했는데, 신생국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적극적이었다. 엘리자베스 피바디(1804-1894)는 미국 공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레이스 만3)과 함께 독일 교육을 미국에 들여온 대표적인 인물로, 사상가라기보다 유아교육 분야의 운동가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시는 독일인 이민자가 급증하던 시기여서 이민자 자녀들을 위한 독일어 유치원이 먼저 문을 열었는데, 피바디는 영어를 쓰는 프뢰벨 유치원을 처음 열고 교사교육기관을 세워 유치원 보급에 앞장섰다. 그는 애머슨을 비롯한 초월주의 사상가들과도 깊이 교류했는데, 이는 종교성이 강한 프뢰벨 교육의 전도사로 활약하게 된 정신적 배경이기도 하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탁월한 전략전술 못지않게 그의 군대가 국민군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4) 왕이나 귀족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군대가 자유주의 혁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열망에 고취된 국민군의 사기를 당할 수는 없었다. 100여 년 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에 질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복고왕정의 군대보다 프로이센 국민군의 사기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프로이센 병사들의 체력이 월등했다.
루소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 이후 프로이센은 루소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챙기는 사회주의 정책을 도입하면서 부국강병을 이루게 된다. 1826년 의무교육제도를 세계 최초로 시행했으며, 교육운동가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얀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슬로건을 걸고 근대식 체조운동을 창안해 각급 학교에 보급했다. 평행봉, 뜀틀, 철봉 같은 운동기구들을 고안해 강도 높은 체조교육을 실시하면서 청소년들의 체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까지 갖춘 청년들이 반외세를 넘어 반귀족 운동에 가담하는 일이 늘어나자 프로이센 정부는 체조교육을 금지하고 얀을 구속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이 강군이 되는 데 체조교육은 크게 기여했다. 또한 프로이센은 국가 차원에서 천연두 예방접종을 실시함으로써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반면, 천연두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간 프랑스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유방임주의를 고수한 복고왕정의 프랑스와 의무교육제도를 비롯해 국민보건제도 등 사회주의 요소를 도입한 프로이센의 대결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프로이센의 교육제도는 미국과 일본을 거쳐 이 땅에도 이식된다. ‘유치원(幼稚園)’이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을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듯이 ‘국민학교’라는 명칭 또한 프로이센에서 처음 생겨난 볼케슐레(Volkeshule)를 근대 일본인들이 그대로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다.5) 우리나라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프로이센의 교육제도에 가닿는다. 19세기 말 미국의 수많은 젊은 엘리트들이 독일 유학을 다녀와 신생 미국의 정부 요직을 차지했으며, 메이지 유신으로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일본 또한 독일과 미국의 교육제도를 수입하기 바빴다. 그 수입품은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도 이식되었다.
구한말 국권 회복을 꿈꾸며 선각자들이 방방곡곡에 세운 수천 개의 학교들이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의 사립학교령에 의해 대부분 문을 닫기에 이른다.6) 그나마 유치원은 사립학교법에 저촉되지 않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7) 일제강점기에는 민간이 설립한 민립학교와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스쿨 그리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설립된 관립학교 세 유형의 학교가 병립했는데, 목표는 서로 달랐지만 교육 방식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이 학교 체제가 해방 이후 공교육 체제로 그대로 이어지면서 유신정권 군국주의 교육의 모태가 된다. 월요일 아침마다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국민보건체조를 시키며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국민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유신시대 교육의 뿌리는 독일통일을 이루고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의 교육이었던 셈이다.
근대교육의 두 얼굴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과 독일 제국 초대 총리 비스마르크를 잇는 인물이 독일 제3제국 총통 히틀러라는 점에서 “히틀러가 루소의 후예”라는 버트란트 러셀의 말은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다. 아동중심 교육과 낭만주의를 연 루소의 사상이 파시즘으로 이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한국 등지에서 근대교육이 파시즘으로 치달은 것은 왜일까. 반면 어느 나라보다 독일 교육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미국은 어떻게 예외가 될 수 있었을까. “히틀러가 루소의 후예라면 루스벨트와 처칠은 로크의 후예”라고 말한 러셀의 표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독일보다 자유주의의 뿌리가 깊이 뻗어 있던 영국의 문화적 영향이 더 컸던 것이 파시즘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이유일까?
근대교육의 특징 중 하나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국가가 끼어든 것이다. 학교 제도를 통해 국가는 교육주체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산업혁명기에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와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를 막는 긍정적인 효과와 함께 국가가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서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20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은 국가주의 파시즘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에 벌어진 이념 투쟁이기도 했다. 달리 보면 아이들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 부모보다 국가의 힘이 더 컸던 사회와 그렇지 않았던 사회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유아학교를 비롯해) 모든 학교는 아이를 부모로부터 떼어놓는 한편, 부모 그 중에서도 어머니들이 아이에게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근대화와 함께 일터와 생활공간이 분리되면서 육아 문제는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문제가 되었다. 아이들과의 유대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여성일지라도 육아에 매인 삶을 원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관점에서 유치원과 학교는 부모와의 유대를 약하게 만드는 측면과 함께 부모의 절대적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부모보다 국가의 영향력이 더 커져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전체주의 사회로 기울고, 부모가 알아서 아이를 돌봐야 하는 각자도생 사회나 부모도 국가도 아이를 잘 돌보지 않는 사회는 자유방임으로 흐른다. 전체주의와 자유방임주의 사이 어느 지점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것이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일 것이다. 이는 곧 사회와 개인, 공과 사의 긴장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유아교육은 오랫동안 민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지만 누리과정이 시행되고 공립 유치원 수가 늘어나면서 점차 국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추세다. 보육보다 교육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는 추세이기도 하다.8) 정부는 올해 1월부터 유보통합 모델로 ‘유아학교(가칭)’를 시범 운영하고 있다. 2025년부터 교육부를 관리 주체로 해서 전국적으로 본격 시행할 계획인데, 그렇게 되면 유아교육도 공교육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근대교육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국가주도의 교사중심 교육이 그 한쪽이라면 아동중심의 교육이 또 다른 한쪽이다. 교사중심 교육이 전통교육의 맥을 잇는 보수적 교육이라면 아동중심 교육은 루소 이후에 등장한 진보교육의 핵심을 이룬다. 데이비드 페레로가 “전통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100년 전쟁”이라고 표현한 것처럼9) 20세기의 교육은 국가와 부모(또는 국가와 교사) 사이, 교사와 아동(또는 교사와 부모) 사이에서 오락가락해왔다. 흔히 교육의 3주체라고 일컬어지는 부모와 교사,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이는 곧 공공성과 자율성, 보편성과 개별성을 구현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근대교육의 해묵은 과제이자 교육의 본질과도 연결된 문제일 것이다.
1) 야학과 공부방, 대안학교로 이어지는 한국의 민간 교육운동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쳐왔다고 볼 수 있다.
2) 존 듀이(1859-1952)와 몬테소리는 공교롭게도 1952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몬테소리는 82세, 듀이는 93세였다.
3) 피바디의 제부(弟夫)이기도 한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은 1837년 메사추세츠 주 교육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다양한 이민자들을 통합할 수 있는 길이 학교교육에 있다고 보고 ‘공립 보통학교 운동’을 펼쳤다. 이전까지 마을이나 교회 단위로 이루어졌던 학교교육이 그 후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재정으로 뒷받침되는 공교육으로 바뀌게 된다.
4) 국민군의 시초는 17세기 초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이 호구조사와 함께 시도한 징병제다.
5)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일제 잔재라고 해서 초등학교로 바뀌었듯이 유치원 명칭을 ‘유아학교’로 바꿔야 한다는 국민청원이 2020년부터 올라오고 있지만, 군국주의 냄새가 나는 국민학교에 비해 유치원 명칭에 대한 거부감이 덜해서인지 국민적 공감대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6)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1908년 경성에만 백여 개의 사립학교가 있었으며, 전국적으로는 5천여 개, 20만 명 가까운 학생들이 있었다. 서당의 수도 만(萬)을 헤아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교 수는 조선총독부의 사립학교령 반포 이후인 1910년 5월에는 1973개 교로, 1915년 5월에는 1154개 교로 줄어들었다.
7) 1921년 전국에 47개의 유치원이 있었는데 그중 15개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곳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치원인 이화유치원(현 이화여대 사범대 부속 유치원)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프뢰벨식 유치원으로, 주요 교과목이 수공, 은물, 유희 등이었다.
8) 어린이집은 영유아보육법에 의해 운영되는데 반해 유치원은 유아교육법에 의해 운영되며 법적으로 학교로 분류된다.
9) David J. Ferrero, “Pathways to Reform: Start with Values”, Educational Leadership 62. no. 5(February 2005): 10.
_ 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