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도르프학교 미술 수업 풍경
자유의 역사
‘자유(liberty 또는 freedom)’는 서구사회가 추구해온 오랜 가치 중 하나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자유민은 노예와 대비되는 존재였다. 키케로와 세네카가 강조한 리버럴리티는 베품을 주고받을 줄 아는 너그러움으로, 공화국의 시민(자유민)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1) 자유교양교육은 이 리버럴리티를 훈련하는 교육이었다. 공화국이 저물고 천 년 가까이 봉건영주 아래 농노 신분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도시의 자유민이 되면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게 된다. 그리스·로마의 자유민과 중세 귀족 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자유교양교육이 부르주아 계급으로 확대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
비슷한 계급사회였음에도 동양에서는 자유의 가치가 서구처럼 중요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동양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리스신화의 영웅들처럼 운명에 맞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운명에 초연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이었다. 여기에는 불교와 도교 등 종교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노비2)를 비롯한 천민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집단이었지만 노예처럼 신체의 자유가 아주 없진 않았다. 때문에 지배계급의 수탈에 반란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조선말에는 양반 신분을 사서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는 이들도 있었는데, 서구처럼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 양반 계급에 포섭되었다.
인간사회를 넘어서는 우주(세계)의 보편적 질서와 법칙이 존재한다는 서구의 자연법 사상은 이데아론과 연결된다. 실정법이 자연법에 근거한다는 자연법 사상은 실정법을 좌지우지하는 전제군주일지라도 보편적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인민이 이에 저항할 수 있다는 인민주권론의 토대가 된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왕을 단두대에 세우게 된 배경이면서 서구사회에서 법이 곧 정의로 간주되는 까닭이다.3) 로크나 루소와 달리 홉스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게 보고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리버럴리티 같은 관용의 미덕이 설령 위선이라 하더라도 사회가 작동하는 데는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든 악하든 또는 백지 상태든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계약’이 필요하다고 본 점에서는 계몽사상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관계 속에 존재할 때다. 산속에서 홀로 사는 현대의 자연인들은 사회의 구속 대신 자연의 구속을 택한 셈이지만 그들도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구속이 곧 인간다움의 조건이자 자유의 조건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 실존의 물음으로, 이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 문제이기도 하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근원적 자유―구원 또는 해탈 같은―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의 자유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사회 안에서 가능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이 물음에 답을 구하는 것이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4)
자유와 평등을 중심 가치로 내세웠던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는 근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이는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세기에 불쑥 등장한 국가주도 교육에 의문을 품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톨스토이가 1860년 러시아 야스나야 뽈랴나 마을에 세운 농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 프란시스코 페레가 1901년 스페인에 설립한 모던스쿨은 아이들을 부국강병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국가주도 교육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20세기 자유교육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20년 니일이 영국에 설립한 서머힐과 1919년 슈타이너가 독일에 설립한 발도르프학교는 오늘날까지 진보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니일과 슈타이너는 다 같이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달랐다.
‘자유학교’라는 이름을 내건 한국의 대안학교는 크게 서머힐을 모델로 한 학교와 발도르프학교를 모델로 한 학교로 나눌 수 있다.(자유학교라는 이름을 걸지 않은 학교들도 내용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의 68세대, 한국의 87세대가 주축이 된 프리스쿨운동과 대안교육운동은 기존 학교를 벗어나(free) 자신이 원하는 교육을 할 수 있는(liberal) 자유를 추구해왔다. freedom이 ‘탈(脫)’의 자유라면 liberty은 ‘향(向)’의 자유다.5) 자유학교에서 아이들은 ‘프리’하고 부모들은 ‘리버럴’한 셈이다. 아이들은 제도권 교육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했고, 부모들은 자신이 꿈꾸던 학교를 만드는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이 자유는 대체로 중산층이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는 점에서 보편교육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삶을 사랑하는 교육 _ 서머힐

영국 서퍽주 레이스턴에 1921년 설립된 서머힐 전경
선구적인 모든 학교들이 그렇듯이 서머힐 또한 역사적 산물이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교육이 인간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통찰한 알렉산더 니일(1883-1973)은 아이들의 편에 서서 교육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서머힐이 문을 연 20여 년 뒤에 터진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나치즘이나 파시즘이 대중을 사로잡은 배경에 억압적인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이 있다는 인식은 서머힐의 자유정신을 더욱 공고히 하도록 만들었다.
니일은 자신의 교육철학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사람으로 프로이드와 호머 레인, 빌헬름 라이히를 꼽는다.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은 아이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데 기본 틀을 제공했는데, 니일의 교육철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흔히 니일이 프로이드 사상에 사로잡혀 성을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모든 인간행동의 동기를 성에서 찾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라는 것이다. 『서머힐』에서도 아이들의 행동을 성과 관련해서 해석하는 대목이 좀 억지스럽게 느껴지는데, 이는 성에 대해 지나치게 억압적이었던 영국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된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다.
니일은 프로이드에게서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과 인간 행동의 숨겨진 동인을 통찰하는 것을 배웠다면, 호머 레인에게서는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공동체가 제대로 꾸려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배웠다고 말한다. 소년원에 수감될 아이들을 데리고 작은 공화국(Little Commonwelth)이라는 공동체를 꾸렸던 호머 레인은 아이들의 선한 본성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니일은 고백하기를 호머 레인에게서는 자치(self-government)를, 빌헬름 라이히에게서는 자율(self-regulation)을 배웠다고 말한다.
프로이드와 함께 정신분석학을 연구하기도 했던 라이히는 사회변혁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정치학이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양육과정에서 성적 억압이 권위적인 어른들을 만들어내고, 이는 곧 권위주의 정부의 기반이 된다고 보았다. 니일은 라이히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웠다기보다 그동안 직관적으로 해오던 교육을 학문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라이히를 통해 유아교육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된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라이히와 마찬가지로 니일은 자율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 두려움과 불안이라고 보았다. 어려서 주입된 판에 박힌 도덕관념으로 말미암아 본능을 억압하게 되면서 신경증적인 불안감을 갖게 되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결국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교사를 평가하는 니일의 관점은 단순명료하다. ‘아이들과 함께 웃는 교사’가 좋은 교사라면, 나쁜 교사는 ‘아이들을 비웃는 교사’다. 아이들을 비웃는 교사는 자신과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신경증 환자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단순한 진리가 서머힐을 관통하는 정신인 셈이다.
『서머힐』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서머힐과 니일의 교육사상에 대한 찬반 논쟁이 일어나자 이 책을 엮었던 편집자 해럴드 하트는 에리히 프롬을 비롯한 저명인사 21명에게 니일의 사상과 서머힐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여 그 결과를 또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서머힐 찬반론 Summerhill for and against』에서는 당대의 석학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서머힐 교육을 평가하고 있는데, 지적인 부분을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평가는 많은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신경증에 걸린 교수보다 행복한 트럭운전사가 낫다고 본 니일이 지식보다 정서적 면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정서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지성을 연마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것은 서머힐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서머힐이 지적 학습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것은 영국 특유의 경험주의 전통에 기인하는 바도 있을 것이다. 또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불신하게 된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전쟁은 서구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기르는 권위적 교육의 위험성에 더욱 주의하게 만들었다. 서머힐이 영국에서 자리잡을 무렵 미국에서는 존 듀이의 교육론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어른들이 정한 목표가 아니라 아이들의 흥미에 초점을 맞춘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이 교육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만큼, 니일은 학생들과 개인 심리상담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질 만큼 아이들의 심리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나중에 고백하길, 아이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된 것은 심리상담보다 서머힐의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니일의 교육철학에서 몸과 마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통찰은 돋보이는데 비해,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6) 종교를 터부시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특히 영국 청교도의 억압적인 윤리관이 아이들의 심리를 병들게 만든다고 보았다. 또한 니일은 슈타이너처럼 인간의 발달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이나 교육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삶을 사랑하는 태도는 커리큘럼에 따라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스스로 터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를 향한 교육 _ 자유발도르프학교

루돌프 슈타이너와 그가 설계한 괴테아눔
발도르프학교의 정식 명칭은 자유발도르프학교이다. ‘자유를 향한 교육(Erziehung zur Freiheit)’을 모토로 운영되는 발도르프학교는 슈타이너의 인지학 사상이 교육철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어 슈타이너학교로 불리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독일과 스위스에서 주로 활동한 슈타이너는 기독교 신비주의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데, 교육뿐만 아니라 건축, 농사, 의학 등 다양한 실제적인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독특한 인물이다.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년)가 창시한7) 인지학의 뿌리 중 하나는 신지학이다. 신지학협회8)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던 루돌프 슈타이너는 1912년 협회를 탈퇴해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인지학협회를 창립한다. 20세기 초반에 서구 지식인들 중심으로 회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신지학협회는 여러 분파로 나뉘면서 다양한 신흥종교의 모태 역할을 했는데,9) 인지학협회도 그 흐름의 하나로 비칠 수 있다.10) 하지만 신지학이 유사과학적 성격을 띤 종교에 가까운 반면 인지학은 종교성을 띤 정신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발도르프-아스토리아 담배공장 사장 에밀 몰트의 제안으로 1919년 독일 슈트트가르트에 최초의 발도르프학교가 문을 열면서 인지학협회는 종교보다 교육 쪽으로 기울었다.
1차대전에서 패한 뒤 새로운 독일을 꿈꾸며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직후 첫 발도르프학교가 문을 연 바로 그 해에 현대적인 디자인학교이자 모더니즘 건축의 효시로 꼽히는 바우하우스(Bauhause)가 독일에 설립되었다. 서구 근대의 합리성을 디자인을 통해 관철하고자 한 바우하우스11)의 디자인 철학은 합리성에 기초해 이상적인 사회를 디자인하고자 한 사회주의 사상과 맥이 닿는다.12) 발도르프교육이 지향하는 미학은 직선을 선호하는 기하학적인 모더니즘 미학과 사뭇 다르다. 비슷한 시기에 태동해 모더니즘과 다른 길을 걸은 발도르프교육은 물질 중심의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우주의 정신세계로 이끄는 인식의 길”이라고 슈타이너 스스로 정의한 인지학을 신비주의의 한 갈래로 보는 견해에 대해 인지학자들은 비판적이다. 자연과학이 물질을 통해 정신을 찾고자 하고, 신비주의는 정신이 아닌 감성적 체험을 통해 정신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데 반해, 인지학은 반물질주의, 반신비주의를 지향하는 정신과학이라고 말한다.13) 하지만 슈타이너에게 신비적 성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괴테를 통해 더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14)
슈타이너는 괴테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또 다른 거인이었다. 괴테 연구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슈타이너는 30대 후반에 괴테의 신비스러운 동화 <초록뱀과 아름다운 백합>에 대한 글을 잡지에 기고하면서 신지학협회의 귀족 부인들 초청으로 협회에서 강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에 이전부터 슈타이너를 알던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지만, 정신세계와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그의 믿음은 갈수록 더 깊어졌다. 이는 나중에 그가 신지학회를 탈퇴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슈타이너가 인지학에 기반해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 시기는 1차대전 직전부터 패전 후 천문학적 배상금을 떠안고 독일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다. 슈타이너는 인지학을 실제적인 분야에 적용하여 사회를 개혁하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경제적 영역(형제애), 정치적 영역(평등), 문화적 영역(자유)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삼중구조 운동은 교육과 의학, 농법 등 다양한 분야로 이어져 발도르프학교와 인지학적 의학, 생명역동농법을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신비극 대본을 쓰고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언어와 음악의 내적 질서를 동작으로 표현하는 예술인 오이리트미(사진1)는 교육과 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슈타이너가 설계한 괴테아눔(사진2)에서는 지금도 괴테의 <파우스트> 극과 오이리트미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슈타이너는 예술을 영적 성장의 중요한 도구로 보고, 정신과학이 물질세계를 바꾸는 데 예술이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오이리트미(Eurythmy), 에포크(Epoch) 수업과 포르멘(Formen)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에포크(주기집중) 수업은 특정 과목을 오전에 2시간씩 3~5주 동안 꾸준히 학습하는 방식으로, ‘능률과 망각의 학습법’으로 통한다.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공부함으로써 학습에 가속도를 얻을 수 있고, 한동안 쉬는 기간을 가짐으로써 무의식 속에서 배운 것들이 정리되는 효과를 얻는다. 풀리지 않던 문제가 잠을 자고 나면 풀리기도 하는 원리다. 포르멘(그림1)은 특정한 형태의 선그림을 그리는 미술수업의 하나로15) 선을 통해 의식의 흐름을 이끌어내면서 대칭적 형태를 통해 정신의 균형감을 회복하는 치유 효과를 가져온다.
슈타이너는 정신지체 장애아를 위한 치유교육에도 힘을 쏟아 그의 사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생활하는 ‘캠프힐 공동체’가 세계 곳곳에 100여 개가 생겨났다. 발도르프학교는 1970년대 이후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어 2020년 현재 80여 개 나라에 1,200여 개 학교가 있으며 유치원도 2천여 개 가까이 된다. 부국강병을 위한 수단이 된 근대교육의 한계를 넘어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킴으로써 인류의 진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슈타이너의 비전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결실을 맺고 있다.
자유와 교육
교육에서 국가는 어떤 존재일까. 근대에 강력한 교육주체로 등장한 국가는 의무교육제도를 통해 학교교육을 강제하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국민을 대의하는 국회에서 제정한 법에 근거하는 권력이지만, 개인은 거기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구속을 당한다. 국가와의 관계에서 개인은 절대적으로 약자다. 아이들이 무엇을 어떤 순서로 배울지도 국가가 정한다. 국정교과서가 검인정교과서로 바뀌고, 교육과정을 일부 선택할 수 있는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는 것처럼 개인의 선택권을 늘이는 쪽으로 바뀌고 있지만 공교육에서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주도권을 갖는다. 흔히 교육의 3주체로 드는 국가와 교사, 부모 중 교사와 부모는 국가가 정해놓은 큰 틀 안에서 약간의 자율성을 가질 뿐이다. 이처럼 모든 국민의 삶에 주도권을 행사하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마르크스는 개인의 자유를 보증하기 위해 자유경쟁과 사유재산제도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시민사회적 자유를 이기적 자유라고 비판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로운 시민들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 시민국가가 이기적 공동체인 국민국가로 변질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 제국이라는 형태를 띤 국가는 국민들의 암 묵적 합의 속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해 이익을 취했으며 그 이익을 자국민들과 나누어 가졌다. 물론 공평하게 나눈 것은 아니지만 모두에게 떡고물이라도 떨어졌기에 ‘이기적 공동체’로서 국민국가와 국민은 한 몸이 되었다. 민족주의가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구현하자는 나치당의 선전에 독일국민들이 열광한 것처럼.
자유주의에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가미되면서 전체주의의 싹이 텄다. 페레나 니일처럼 국가주도 교육에 반기를 들고 자유교육을 주창한 이들은 이런 위험성을 일찍이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페레가 처형당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자유는 이기적 자유가 아니었다. 개인이나 국가의 이기적 자유가 아닌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자유가 되려면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 전통적인 자유교양교육 또한 공동선을 추구하는 교육이었지만 계급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평등한 사회에서 자유의 가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근대의 핵심 아젠다이다.16) 전통교육과 진보교육이 충돌하는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국가주도 교육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인류의 공동선을 해친 역사가 있는 만큼 자유교육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지만 국가주도 교육에는 또 다른 일면도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함으로써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공교육의 또 다른 측면이다. 아이들의 경우 종교나 사상의 자유가 부모에 의해 침해당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공교육을 통해 균형을 회복하기도 한다.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를 믿는 홈스쿨링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지구 역사를 6천 년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공동선에 반하는 일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학교교육을 통해 편향된 사상을 주입하는 반면, 자유주의 국가에서 공교육은 개인의 편향성을 제어함으로써 공동체가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돕는다. 국가주도 교육이 갖는 양면성이다.
국가주도 교육의 한계를 넘어 자유의 정신을 교육에서 구현하고자 한 점에서 니일과 슈타이너는 다르지 않다. 니일이 아이들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삶을 사랑하는 인간으로 기르고자 했다면, 슈타이너는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며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창조성을 발휘하는 자유인을 기르고자 했다. 서머힐을 모델로 한 학교들이 저마다 조금씩 다른 색깔을 띠는 데 반해, 발도르프학교는 일종의 우산학교처럼 발도르프학교 연합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두 모델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교육을 추구하는 발도르프교육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교육, 삶을 사랑하는 교육을 지향하는 서머힐식 자유교육이 지향하는 바는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슈타이너의 자유가 궁극적인 자유를 뜻한다면, 그 자유의 현실태는 니일이 말하는 삶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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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리버럴리티는 개인의 권리이기 전에 공동체의 윤리였다. 이 점에서 유교가 강조하는 인(仁)과 유사한 면이 있다.
2) 남자 종을 노(奴), 여자 종을 비(婢)라 불렀는데, 노비는 관노비와 사노비로, 사노비는 또 솔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었다. 주인집에서 함께 기거하는 솔노비보다 외거노비 수가 더 많았다. 조선 시대 노비 중에는 재산을 소유하고 조세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노예와 달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3) justice는 ‘법(法)’을 뜻하는 라틴어 jus와 ‘의(義)’를 뜻하는 just의 합성어다. 영미권에서는 판사를 justice, 법무부를 justice department라 칭한다.
4) 롤스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정의에 바탕한 권리라고 주장하면서 권리 우선론을 펼쳤지만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자유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를 탐구하고 그 이론을 체계화하는 것이 자유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롤스의 주장 역시 자유주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저마다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되고 결국 자유가 실현된다고 볼 때 권리와 자유, 정의는 같은 가치를 지향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5) 우리말 ‘자유’는 개념이 분화되지 않은 말이다. 근대 일본인들이 서구의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freedom과 liberty의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로 통칭하면서 개념의 혼란이 생겨났다. freedom이 보다 근원적인 광의의 자유라면 liberty는 주로 사회적 의미의 자유를 뜻한다.
6) 인지학의 인간삼원론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body)와 영혼(soul), 정신(spirit)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혼은 감정 같은 정서적인 부분을, 정신은 사고와 의지 등을 담당한다. 인지학의 인간이해에서 삼원론과 4구성체(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체) 이론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7) 인지학(Anthrophosophy)이라는 용어는 슈타이너 이전에 피히테, 침머만 같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쓰이던 용어다.
8) 제정 러시아의 신비주의자 헬레나 블라바츠키와 미국인 헨리 올코트가 1875년에 창립한 단체로 헬레니즘 시대의 영지주의와 힌두 사상, 선불교 사상이 혼합된 철학적 배경을 갖고 있다. 신지학은 기독교에 회의를 느낀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양차대전 이후 과학적 합리주의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20세기 중반에 인도인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굴하여 ‘구루’로 만든 단체로, 히피 운동과 뉴에이지 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9) 미국에서 유행하는 신과학 종교 사이언톨로지, 일본에서 사린가스 테러를 벌인 옴진리교 등이 신지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10) 슈타이너가 후년에 시도한 ‘그리스도 공동체 운동’은 인지학에 기반해 개인의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한 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지학협회 안에 독자적인 교회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지학은 종교인가’ 하는 논란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사이트에도 관련 글이 연재되고 있다.
11)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가 가장 먼저 초빙한 선생은 스위스 출신의 화가이자 미술교육자인 요하네스 이텐이었다. 이텐은 프뢰벨 유치원 교사 출신이기도 했다.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프뢰벨의 사상이 이텐을 통해 바우하우스의 기하학적 디자인과 연결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12)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바우하우스를 가리켜 산업혁명의 뒤를 이어 그것을 완성하는 제2의 혁명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바우하우스는 기술적 하부구조에 디자인이라는 조형적 상부구조를 부여함으로써 근대문명을 가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평가된다.
13) 최혜경, ‘슈타이너와 신비주의’,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14)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에 대한 괴테의 신비주의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15) 미술수업이 형태수업(포르멘)과 색채수업(수채화)으로 나뉘는 것이 일반 미술수업과 다르다.
16) 20세기 정치철학서 중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히는 존 롤스의 『정의론』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발도르프학교 미술 수업 풍경
자유의 역사
‘자유(liberty 또는 freedom)’는 서구사회가 추구해온 오랜 가치 중 하나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자유민은 노예와 대비되는 존재였다. 키케로와 세네카가 강조한 리버럴리티는 베품을 주고받을 줄 아는 너그러움으로, 공화국의 시민(자유민)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1) 자유교양교육은 이 리버럴리티를 훈련하는 교육이었다. 공화국이 저물고 천 년 가까이 봉건영주 아래 농노 신분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도시의 자유민이 되면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게 된다. 그리스·로마의 자유민과 중세 귀족 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자유교양교육이 부르주아 계급으로 확대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
비슷한 계급사회였음에도 동양에서는 자유의 가치가 서구처럼 중요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동양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리스신화의 영웅들처럼 운명에 맞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운명에 초연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이었다. 여기에는 불교와 도교 등 종교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노비2)를 비롯한 천민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집단이었지만 노예처럼 신체의 자유가 아주 없진 않았다. 때문에 지배계급의 수탈에 반란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조선말에는 양반 신분을 사서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는 이들도 있었는데, 서구처럼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 양반 계급에 포섭되었다.
인간사회를 넘어서는 우주(세계)의 보편적 질서와 법칙이 존재한다는 서구의 자연법 사상은 이데아론과 연결된다. 실정법이 자연법에 근거한다는 자연법 사상은 실정법을 좌지우지하는 전제군주일지라도 보편적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인민이 이에 저항할 수 있다는 인민주권론의 토대가 된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왕을 단두대에 세우게 된 배경이면서 서구사회에서 법이 곧 정의로 간주되는 까닭이다.3) 로크나 루소와 달리 홉스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게 보고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리버럴리티 같은 관용의 미덕이 설령 위선이라 하더라도 사회가 작동하는 데는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든 악하든 또는 백지 상태든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계약’이 필요하다고 본 점에서는 계몽사상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관계 속에 존재할 때다. 산속에서 홀로 사는 현대의 자연인들은 사회의 구속 대신 자연의 구속을 택한 셈이지만 그들도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구속이 곧 인간다움의 조건이자 자유의 조건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 실존의 물음으로, 이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 문제이기도 하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근원적 자유―구원 또는 해탈 같은―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의 자유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사회 안에서 가능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이 물음에 답을 구하는 것이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4)
자유와 평등을 중심 가치로 내세웠던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는 근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이는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세기에 불쑥 등장한 국가주도 교육에 의문을 품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톨스토이가 1860년 러시아 야스나야 뽈랴나 마을에 세운 농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 프란시스코 페레가 1901년 스페인에 설립한 모던스쿨은 아이들을 부국강병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국가주도 교육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20세기 자유교육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20년 니일이 영국에 설립한 서머힐과 1919년 슈타이너가 독일에 설립한 발도르프학교는 오늘날까지 진보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니일과 슈타이너는 다 같이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달랐다.
‘자유학교’라는 이름을 내건 한국의 대안학교는 크게 서머힐을 모델로 한 학교와 발도르프학교를 모델로 한 학교로 나눌 수 있다.(자유학교라는 이름을 걸지 않은 학교들도 내용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의 68세대, 한국의 87세대가 주축이 된 프리스쿨운동과 대안교육운동은 기존 학교를 벗어나(free) 자신이 원하는 교육을 할 수 있는(liberal) 자유를 추구해왔다. freedom이 ‘탈(脫)’의 자유라면 liberty은 ‘향(向)’의 자유다.5) 자유학교에서 아이들은 ‘프리’하고 부모들은 ‘리버럴’한 셈이다. 아이들은 제도권 교육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했고, 부모들은 자신이 꿈꾸던 학교를 만드는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이 자유는 대체로 중산층이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는 점에서 보편교육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삶을 사랑하는 교육 _ 서머힐
영국 서퍽주 레이스턴에 1921년 설립된 서머힐 전경
선구적인 모든 학교들이 그렇듯이 서머힐 또한 역사적 산물이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교육이 인간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통찰한 알렉산더 니일(1883-1973)은 아이들의 편에 서서 교육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서머힐이 문을 연 20여 년 뒤에 터진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나치즘이나 파시즘이 대중을 사로잡은 배경에 억압적인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이 있다는 인식은 서머힐의 자유정신을 더욱 공고히 하도록 만들었다.
니일은 자신의 교육철학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사람으로 프로이드와 호머 레인, 빌헬름 라이히를 꼽는다.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은 아이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데 기본 틀을 제공했는데, 니일의 교육철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흔히 니일이 프로이드 사상에 사로잡혀 성을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모든 인간행동의 동기를 성에서 찾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라는 것이다. 『서머힐』에서도 아이들의 행동을 성과 관련해서 해석하는 대목이 좀 억지스럽게 느껴지는데, 이는 성에 대해 지나치게 억압적이었던 영국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된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다.
니일은 프로이드에게서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과 인간 행동의 숨겨진 동인을 통찰하는 것을 배웠다면, 호머 레인에게서는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공동체가 제대로 꾸려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배웠다고 말한다. 소년원에 수감될 아이들을 데리고 작은 공화국(Little Commonwelth)이라는 공동체를 꾸렸던 호머 레인은 아이들의 선한 본성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니일은 고백하기를 호머 레인에게서는 자치(self-government)를, 빌헬름 라이히에게서는 자율(self-regulation)을 배웠다고 말한다.
프로이드와 함께 정신분석학을 연구하기도 했던 라이히는 사회변혁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정치학이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양육과정에서 성적 억압이 권위적인 어른들을 만들어내고, 이는 곧 권위주의 정부의 기반이 된다고 보았다. 니일은 라이히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웠다기보다 그동안 직관적으로 해오던 교육을 학문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라이히를 통해 유아교육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된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라이히와 마찬가지로 니일은 자율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 두려움과 불안이라고 보았다. 어려서 주입된 판에 박힌 도덕관념으로 말미암아 본능을 억압하게 되면서 신경증적인 불안감을 갖게 되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결국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교사를 평가하는 니일의 관점은 단순명료하다. ‘아이들과 함께 웃는 교사’가 좋은 교사라면, 나쁜 교사는 ‘아이들을 비웃는 교사’다. 아이들을 비웃는 교사는 자신과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신경증 환자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단순한 진리가 서머힐을 관통하는 정신인 셈이다.
『서머힐』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서머힐과 니일의 교육사상에 대한 찬반 논쟁이 일어나자 이 책을 엮었던 편집자 해럴드 하트는 에리히 프롬을 비롯한 저명인사 21명에게 니일의 사상과 서머힐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여 그 결과를 또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서머힐 찬반론 Summerhill for and against』에서는 당대의 석학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서머힐 교육을 평가하고 있는데, 지적인 부분을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평가는 많은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신경증에 걸린 교수보다 행복한 트럭운전사가 낫다고 본 니일이 지식보다 정서적 면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정서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지성을 연마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것은 서머힐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서머힐이 지적 학습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것은 영국 특유의 경험주의 전통에 기인하는 바도 있을 것이다. 또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불신하게 된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전쟁은 서구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기르는 권위적 교육의 위험성에 더욱 주의하게 만들었다. 서머힐이 영국에서 자리잡을 무렵 미국에서는 존 듀이의 교육론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어른들이 정한 목표가 아니라 아이들의 흥미에 초점을 맞춘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이 교육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만큼, 니일은 학생들과 개인 심리상담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질 만큼 아이들의 심리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나중에 고백하길, 아이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된 것은 심리상담보다 서머힐의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니일의 교육철학에서 몸과 마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통찰은 돋보이는데 비해,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6) 종교를 터부시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특히 영국 청교도의 억압적인 윤리관이 아이들의 심리를 병들게 만든다고 보았다. 또한 니일은 슈타이너처럼 인간의 발달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이나 교육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삶을 사랑하는 태도는 커리큘럼에 따라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스스로 터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를 향한 교육 _ 자유발도르프학교
루돌프 슈타이너와 그가 설계한 괴테아눔
발도르프학교의 정식 명칭은 자유발도르프학교이다. ‘자유를 향한 교육(Erziehung zur Freiheit)’을 모토로 운영되는 발도르프학교는 슈타이너의 인지학 사상이 교육철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어 슈타이너학교로 불리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독일과 스위스에서 주로 활동한 슈타이너는 기독교 신비주의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데, 교육뿐만 아니라 건축, 농사, 의학 등 다양한 실제적인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독특한 인물이다.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년)가 창시한7) 인지학의 뿌리 중 하나는 신지학이다. 신지학협회8)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던 루돌프 슈타이너는 1912년 협회를 탈퇴해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인지학협회를 창립한다. 20세기 초반에 서구 지식인들 중심으로 회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신지학협회는 여러 분파로 나뉘면서 다양한 신흥종교의 모태 역할을 했는데,9) 인지학협회도 그 흐름의 하나로 비칠 수 있다.10) 하지만 신지학이 유사과학적 성격을 띤 종교에 가까운 반면 인지학은 종교성을 띤 정신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발도르프-아스토리아 담배공장 사장 에밀 몰트의 제안으로 1919년 독일 슈트트가르트에 최초의 발도르프학교가 문을 열면서 인지학협회는 종교보다 교육 쪽으로 기울었다.
1차대전에서 패한 뒤 새로운 독일을 꿈꾸며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직후 첫 발도르프학교가 문을 연 바로 그 해에 현대적인 디자인학교이자 모더니즘 건축의 효시로 꼽히는 바우하우스(Bauhause)가 독일에 설립되었다. 서구 근대의 합리성을 디자인을 통해 관철하고자 한 바우하우스11)의 디자인 철학은 합리성에 기초해 이상적인 사회를 디자인하고자 한 사회주의 사상과 맥이 닿는다.12) 발도르프교육이 지향하는 미학은 직선을 선호하는 기하학적인 모더니즘 미학과 사뭇 다르다. 비슷한 시기에 태동해 모더니즘과 다른 길을 걸은 발도르프교육은 물질 중심의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우주의 정신세계로 이끄는 인식의 길”이라고 슈타이너 스스로 정의한 인지학을 신비주의의 한 갈래로 보는 견해에 대해 인지학자들은 비판적이다. 자연과학이 물질을 통해 정신을 찾고자 하고, 신비주의는 정신이 아닌 감성적 체험을 통해 정신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데 반해, 인지학은 반물질주의, 반신비주의를 지향하는 정신과학이라고 말한다.13) 하지만 슈타이너에게 신비적 성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괴테를 통해 더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14)
슈타이너는 괴테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또 다른 거인이었다. 괴테 연구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슈타이너는 30대 후반에 괴테의 신비스러운 동화 <초록뱀과 아름다운 백합>에 대한 글을 잡지에 기고하면서 신지학협회의 귀족 부인들 초청으로 협회에서 강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에 이전부터 슈타이너를 알던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지만, 정신세계와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그의 믿음은 갈수록 더 깊어졌다. 이는 나중에 그가 신지학회를 탈퇴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슈타이너가 인지학에 기반해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 시기는 1차대전 직전부터 패전 후 천문학적 배상금을 떠안고 독일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다. 슈타이너는 인지학을 실제적인 분야에 적용하여 사회를 개혁하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경제적 영역(형제애), 정치적 영역(평등), 문화적 영역(자유)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삼중구조 운동은 교육과 의학, 농법 등 다양한 분야로 이어져 발도르프학교와 인지학적 의학, 생명역동농법을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신비극 대본을 쓰고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언어와 음악의 내적 질서를 동작으로 표현하는 예술인 오이리트미(사진1)는 교육과 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슈타이너가 설계한 괴테아눔(사진2)에서는 지금도 괴테의 <파우스트> 극과 오이리트미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슈타이너는 예술을 영적 성장의 중요한 도구로 보고, 정신과학이 물질세계를 바꾸는 데 예술이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오이리트미(Eurythmy), 에포크(Epoch) 수업과 포르멘(Formen)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에포크(주기집중) 수업은 특정 과목을 오전에 2시간씩 3~5주 동안 꾸준히 학습하는 방식으로, ‘능률과 망각의 학습법’으로 통한다.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공부함으로써 학습에 가속도를 얻을 수 있고, 한동안 쉬는 기간을 가짐으로써 무의식 속에서 배운 것들이 정리되는 효과를 얻는다. 풀리지 않던 문제가 잠을 자고 나면 풀리기도 하는 원리다. 포르멘(그림1)은 특정한 형태의 선그림을 그리는 미술수업의 하나로15) 선을 통해 의식의 흐름을 이끌어내면서 대칭적 형태를 통해 정신의 균형감을 회복하는 치유 효과를 가져온다.
슈타이너는 정신지체 장애아를 위한 치유교육에도 힘을 쏟아 그의 사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생활하는 ‘캠프힐 공동체’가 세계 곳곳에 100여 개가 생겨났다. 발도르프학교는 1970년대 이후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어 2020년 현재 80여 개 나라에 1,200여 개 학교가 있으며 유치원도 2천여 개 가까이 된다. 부국강병을 위한 수단이 된 근대교육의 한계를 넘어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킴으로써 인류의 진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슈타이너의 비전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결실을 맺고 있다.
자유와 교육
교육에서 국가는 어떤 존재일까. 근대에 강력한 교육주체로 등장한 국가는 의무교육제도를 통해 학교교육을 강제하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국민을 대의하는 국회에서 제정한 법에 근거하는 권력이지만, 개인은 거기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구속을 당한다. 국가와의 관계에서 개인은 절대적으로 약자다. 아이들이 무엇을 어떤 순서로 배울지도 국가가 정한다. 국정교과서가 검인정교과서로 바뀌고, 교육과정을 일부 선택할 수 있는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는 것처럼 개인의 선택권을 늘이는 쪽으로 바뀌고 있지만 공교육에서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주도권을 갖는다. 흔히 교육의 3주체로 드는 국가와 교사, 부모 중 교사와 부모는 국가가 정해놓은 큰 틀 안에서 약간의 자율성을 가질 뿐이다. 이처럼 모든 국민의 삶에 주도권을 행사하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마르크스는 개인의 자유를 보증하기 위해 자유경쟁과 사유재산제도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시민사회적 자유를 이기적 자유라고 비판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로운 시민들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 시민국가가 이기적 공동체인 국민국가로 변질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 제국이라는 형태를 띤 국가는 국민들의 암 묵적 합의 속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해 이익을 취했으며 그 이익을 자국민들과 나누어 가졌다. 물론 공평하게 나눈 것은 아니지만 모두에게 떡고물이라도 떨어졌기에 ‘이기적 공동체’로서 국민국가와 국민은 한 몸이 되었다. 민족주의가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구현하자는 나치당의 선전에 독일국민들이 열광한 것처럼.
자유주의에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가미되면서 전체주의의 싹이 텄다. 페레나 니일처럼 국가주도 교육에 반기를 들고 자유교육을 주창한 이들은 이런 위험성을 일찍이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페레가 처형당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자유는 이기적 자유가 아니었다. 개인이나 국가의 이기적 자유가 아닌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자유가 되려면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 전통적인 자유교양교육 또한 공동선을 추구하는 교육이었지만 계급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평등한 사회에서 자유의 가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근대의 핵심 아젠다이다.16) 전통교육과 진보교육이 충돌하는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국가주도 교육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인류의 공동선을 해친 역사가 있는 만큼 자유교육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지만 국가주도 교육에는 또 다른 일면도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함으로써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공교육의 또 다른 측면이다. 아이들의 경우 종교나 사상의 자유가 부모에 의해 침해당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공교육을 통해 균형을 회복하기도 한다.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를 믿는 홈스쿨링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지구 역사를 6천 년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공동선에 반하는 일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학교교육을 통해 편향된 사상을 주입하는 반면, 자유주의 국가에서 공교육은 개인의 편향성을 제어함으로써 공동체가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돕는다. 국가주도 교육이 갖는 양면성이다.
국가주도 교육의 한계를 넘어 자유의 정신을 교육에서 구현하고자 한 점에서 니일과 슈타이너는 다르지 않다. 니일이 아이들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삶을 사랑하는 인간으로 기르고자 했다면, 슈타이너는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며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창조성을 발휘하는 자유인을 기르고자 했다. 서머힐을 모델로 한 학교들이 저마다 조금씩 다른 색깔을 띠는 데 반해, 발도르프학교는 일종의 우산학교처럼 발도르프학교 연합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두 모델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교육을 추구하는 발도르프교육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교육, 삶을 사랑하는 교육을 지향하는 서머힐식 자유교육이 지향하는 바는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슈타이너의 자유가 궁극적인 자유를 뜻한다면, 그 자유의 현실태는 니일이 말하는 삶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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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리버럴리티는 개인의 권리이기 전에 공동체의 윤리였다. 이 점에서 유교가 강조하는 인(仁)과 유사한 면이 있다.
2) 남자 종을 노(奴), 여자 종을 비(婢)라 불렀는데, 노비는 관노비와 사노비로, 사노비는 또 솔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었다. 주인집에서 함께 기거하는 솔노비보다 외거노비 수가 더 많았다. 조선 시대 노비 중에는 재산을 소유하고 조세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노예와 달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3) justice는 ‘법(法)’을 뜻하는 라틴어 jus와 ‘의(義)’를 뜻하는 just의 합성어다. 영미권에서는 판사를 justice, 법무부를 justice department라 칭한다.
4) 롤스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정의에 바탕한 권리라고 주장하면서 권리 우선론을 펼쳤지만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자유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를 탐구하고 그 이론을 체계화하는 것이 자유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롤스의 주장 역시 자유주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저마다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되고 결국 자유가 실현된다고 볼 때 권리와 자유, 정의는 같은 가치를 지향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5) 우리말 ‘자유’는 개념이 분화되지 않은 말이다. 근대 일본인들이 서구의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freedom과 liberty의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로 통칭하면서 개념의 혼란이 생겨났다. freedom이 보다 근원적인 광의의 자유라면 liberty는 주로 사회적 의미의 자유를 뜻한다.
6) 인지학의 인간삼원론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body)와 영혼(soul), 정신(spirit)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혼은 감정 같은 정서적인 부분을, 정신은 사고와 의지 등을 담당한다. 인지학의 인간이해에서 삼원론과 4구성체(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체) 이론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7) 인지학(Anthrophosophy)이라는 용어는 슈타이너 이전에 피히테, 침머만 같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쓰이던 용어다.
8) 제정 러시아의 신비주의자 헬레나 블라바츠키와 미국인 헨리 올코트가 1875년에 창립한 단체로 헬레니즘 시대의 영지주의와 힌두 사상, 선불교 사상이 혼합된 철학적 배경을 갖고 있다. 신지학은 기독교에 회의를 느낀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양차대전 이후 과학적 합리주의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20세기 중반에 인도인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굴하여 ‘구루’로 만든 단체로, 히피 운동과 뉴에이지 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9) 미국에서 유행하는 신과학 종교 사이언톨로지, 일본에서 사린가스 테러를 벌인 옴진리교 등이 신지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10) 슈타이너가 후년에 시도한 ‘그리스도 공동체 운동’은 인지학에 기반해 개인의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한 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지학협회 안에 독자적인 교회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지학은 종교인가’ 하는 논란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사이트에도 관련 글이 연재되고 있다.
11)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가 가장 먼저 초빙한 선생은 스위스 출신의 화가이자 미술교육자인 요하네스 이텐이었다. 이텐은 프뢰벨 유치원 교사 출신이기도 했다.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프뢰벨의 사상이 이텐을 통해 바우하우스의 기하학적 디자인과 연결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12)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바우하우스를 가리켜 산업혁명의 뒤를 이어 그것을 완성하는 제2의 혁명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바우하우스는 기술적 하부구조에 디자인이라는 조형적 상부구조를 부여함으로써 근대문명을 가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평가된다.
13) 최혜경, ‘슈타이너와 신비주의’,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14)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에 대한 괴테의 신비주의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15) 미술수업이 형태수업(포르멘)과 색채수업(수채화)으로 나뉘는 것이 일반 미술수업과 다르다.
16) 20세기 정치철학서 중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히는 존 롤스의 『정의론』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