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자유교육이 빠지기 쉬운 함정

민들레
2022-05-30
조회수 649

20세기 전반기 서구 사회를 지배한 것은 전쟁의 광기와 두려움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서구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기르는 권위적 교육의 위험성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서머힐이 영국에 자리 잡을 무렵 미국에서는 존 듀이의 교육론이 제도교육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정한 목표가 아니라 아이들의 흥미에 초점을 맞춘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나 교사의 권위만 없으면 아이들이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인간의 성장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한 면이 있다. 십대 아이들이 부모나 교사의 권위보다 또래집단에 더 순응하는 경향을 보일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미디어가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매스 미디어보다 SNS나 유튜브 같은 개인 미디어의 힘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십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아마도 미디어-친구-부모-교사일 것이다.(가정환경에 따라 순위가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권위적인 교육이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길러낸다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르다. 아웃풋이 인풋에 따라 결정될 거라는 단선적 사고는 교육에서 언제나 배반당해왔다. 영국의 권위적인 청교도 문화 속에서 민주주의 정신이 꽃을 피운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는 유신시대의 억압적인 학교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가 민주화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반면에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오히려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물리세계에서처럼 정신세계에서도 반작용의 힘이 작용한다.

권위주의 교육에 반기를 들고 자유교육을 옹호해온 이들은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흥미를 중심에 놓아야지 교사가 일방적으로 목표를 제시하거나 무엇을 하면 좋은지를 알려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듀이는 어른들이 교육의 목표를 세우는 것을 반대했다. 교육을 성장 그 자체로 생각한 듀이에게 교육의 궁극 목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듀이의 사상에 따르면 교육을 통해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사회개혁은 어차피 어른들이 설정한 목표나 이상일 수밖에 없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듀이는 “학습목적을 정하는 데 학생들 스스로 참여하고 학습과정에서 활동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이런 작업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듀이의 말처럼 “목적을 설정하는 일은 꽤나 복잡하고 지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게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노력하는 학생이라 할지라도, 배우는 이가 배움의 목적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배움으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배움의 참된 의미라고 볼 때 배움의 목적지는 배우는 이로서는 알 수도 없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40년 넘게 합기도를 수련해오고 있는 우치다 타츠루는 혈기왕성하던 20대 시절 왜 합기도를 배우려 하느냐는 질문에 “싸움을 잘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하자 타다 관장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것도 좋지. 하지만 자네는 아마 전혀 다른 걸 배우게 될 거야.” 수십 년의 합기도 수련을 통해 배운 것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었다고 우치다는 고백한다.

스승이 없는 배움이 어떤 한계에 봉착할 수 있는지를 짐작케 하는 이야기다. 아동중심교육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여기 있다. 배움은 자기 한계를 넘어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듀이의 주장처럼 어른의 권위를 버리고 아동 스스로 배움의 과정을 정하게 하는 것은 배움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오늘날 유행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에 숨어 있는 맹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사중심의 교육이 좋은 것도 아니다. 좋은 교사가 아이를 위하는 교육을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생각은 인간의 성장 과정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한 것이다. 교육은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연금술 같은 것으로,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이를 성장시키는 에너지가 아이 속에서 나오게 돕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나무는 태양과 땅의 에너지에 ‘의하여’ 성장하지, 하늘 높이 자라기 ‘위하여’ 성장하지 않는다.

학습자가 기대하지 않은 배움이 가능한 교육, 교육의 의도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 배움으로 연결되는 교육을 할 수 있으려면 교사의 내공이 필요하다. 하지만 교사 개인의 내공만으로는 쉽지 않다. 도장으로 비유하자면 무도 철학이 분명한 도장의 문화 속에서 저절로 몸에 배는 것이 있다. 도장을 쓸고 닦으면서 자신의 신체와 공간이 만들어내는 공기에 민감해지기도 한다.  자유교육이 성공하려면 이런 교육이 일어날 수 있는 배움의 구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은 팀플레이다. 아무리 뛰어난 교사라 할지라도 혼자서 다양한 아이들에게 적절히 필요한 도움을 주기는 힘들다. 또한 배움의 역동성이 살아나려면 모두가 단일한 메시지를 발신하기보다 서로 다른 메시지를 발신하는 교사들이 있는 것이 더 낫다. 그러므로 다양한 교사들로 구성된 교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적정 규모의 배움터에서 민주적인 문화의 토대 위에 교사들과 학생들이 활발히 상호작용을 할 때 교육과 배움의 긴장 관계가 유지되면서 아이들은 성장할 수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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