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이와 게임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영어 'game'을 놀이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원어 그대로 게임이라 할 때가 더 많다. 모든 게임은 뚜렷한 미션이 있어서,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나거나 대립하는 두 진영이 승부를 겨루는 구조다. 성공 혹은 승리가 게이머의 목표가 된다. 반면에 놀이는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순전히 과정을 즐기는 활동이다. 하지만 전통놀이 가운데는 비석치기처럼 정해진 미션을 완수해 승패를 겨루는 놀이도 적지 않다.
우리말은 ‘놀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다양한 방식의 놀이를 다 표현하다 보니 성격이 전혀 다른 놀이가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뭉뚱거려진다. 반면 영어는 play와 game을 구분해 쓴다. 인형놀이는 플레이지 게임이 아니다. 우리말에는 game에 해당하는 적절한 번역어가 없다. 독일어 경우도 spiele가 게임과 놀이에 두루 쓰인다. computer-spiele처럼. 학술 용어가 발달한 독일어이지만 놀이의 영역에서는 언어가 분화되지 않은 셈이다. 잘 놀 줄 모르는 게르만 민족의 특성 때문일까?
영어 ‘play’로 번역되는 놀이는 역할극 성격을 띤다.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는 전형적인 역할극이다. 다른 사람의 역할을 맡아봄으로써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 조감적 시각을 갖는 훈련을 하는 셈이다. 모든 놀이는 삶의 기술을 전수하면서 아이들의 성장에 알게 모르게 기여한다. 편을 갈라 승패를 겨루는 놀이에서는 미션에 실패한 경우 ‘죽었다’라고 한다. 삶이라는 놀이판에서 일시적으로 빠지는 것이다. 놀이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셈이다.
우리 전통놀이 중에는 편이 나뉘어 싸우는 싸움과 경계가 애매한 놀이도 적지 않다. 투계 곧 닭싸움은 닭을 훈련시켜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인데, 한쪽이 죽을 때까지 공격하는 닭의 특성상 상당히 잔인한 놀이이면서 결과에 판돈까지 걸려 있어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놀이였다. 승패가 나뉘는 놀이는 게임에 가깝다. 윷놀이나 공기놀이도 게임 성격을 띠고 있다. 편이 나뉘어 노는 놀이가 더 인기 있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에 더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정월 대보름이나 단오날에 했던 석전(石戰)은 놀이나 게임을 넘어서 일종의 부족전 성격을 띠었다. 대개 강을 사이에 두고 마을 단위로 편이 나뉘어 수십 명, 수백 명이 대규모 투석전을 벌이곤 했다. 돌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수두룩했지만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그 전투성에 놀란 일본 총독부가 금지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석전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호전적 성향을 말해준다. 돌팔매질은 전쟁 때 민간인이 전투에 참여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안동의 석전꾼들이 유명했는데, 왜란 때 이들이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 구한말 석전을 묘사한 그림. 구한말에는 평양의 석전꾼들이 유명했는데, 돌을 던져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평양 장정들은 머리에 돌 맞은 흉터가 없으면 치욕으로 여겼고, 소년들도 사내다움이 있어야 한다며 참여가 권장되었으며, 석전장에서 집으로 도망오면 어머니가 질책하며 석전장으로 돌려보낼 정도였다. 석전에서 승리한 석전꾼들은 마을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돌아왔고, 패배한 석전꾼들은 마을 밖에서 노숙해야 했다고 한다.(출처, 김창석, 石戰의 起源과 그 性格 變化)
지난 몇십 년 동안 놀이운동가와 교육운동가들은 전통놀이를 되살리려는 시도를 해왔지만 컴퓨터 게임이라는 블랙홀 앞에서 별 힘을 못 쓰고 있다. 어려서 전통놀이를 즐겨 하던 아이들도 십대만 되면 다들 키보드나 스마트폰 자판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농경사회에서 유행하던 놀이가 산업화를 거쳐 첨단 정보화 시대에도 유효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 환경에 부합하는 놀이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전통놀이는 어린아이들의 정서와 사회성 발달에 도움이 되지만 십대들에게는 더 이상 매력적인 놀이가 아니다. 전통놀이 예찬론자들은 컴퓨터 게임을 폄하하지만, 게임의 긍정적인 면을 도외시하는 것은 놀이의 세계를 이데올로기로 접근하는 것이다. 오늘날 아이들의 세계에서 게임을 모르면 대화에 끼기도 힘들다. 여럿이 함께 즐기면서 사회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게임, 치밀한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게임도 적지 않다.
게임은 놀이와 달리 산업과 직업의 세계로도 연결된다. 오늘날 게임 산업의 규모는 자동차 산업과 맞먹을 정도다. 프로 게이머는 프로 골퍼만큼 인기 직종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모바일 게임 산업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스마트폰과 아이패드 같은 하드웨어의 발달과 게임 소프트웨어의 발달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새로운 게임 세계를 열어간다. 호모 사피엔스 속에 녹아 있는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유전자는 무엇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유전자일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는 없다. 최근 포트나이트 게임에 빠져 잠도 자지 않고 씻지도 먹지도 않는 자녀들을 보다 못한 캐나다 부모들이 게임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걸었다. 일부러 중독성이 강한 게임을 만들었다는 이유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흡연의 악영향이 인식되기까지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했듯이 게임도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8년 세계보건기구에서 게임중독을 국제질병분류에 포함시킨 점을 근거로 정신질환 여부를 다투게 될 전망이다. 폐암 환자들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과 유사하다.
많은 놀이가 중독성을 띤다. 비석치기나 구슬치기도 끼니를 거르면서 할 수 있지만 야외에서 몸을 움직이는 놀이는 해가 지거나 몸이 지치는 물리적 한계 때문에 중단하게 된다. 디지털 게임의 경우는 전기가 나가거나 기기가 고장나지 않는 한 아무런 제어 장치가 없다. 아이들의 자율에 맡기기에는 중독성이 너무 강한 게임들로 인해 부모 자녀 관계가 파탄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도박으로 가정이 붕괴되는 것과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최근에는 게임에 빠져 있는 젊은 아빠들의 문제가 부각되기도 한다.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자란 세대가 부모가 되어 아이와 함께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게임 세계를 모르는 부모와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갈등하던 시대가 저물고 게임이 가족 놀이인 시대가 열리고 있는 걸까? 오늘날 디지털 게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즐기는 놀이인 만큼 젊은 부모들은 아이들과 게임으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덜할 것이다.(아이지에이웍스가 운영하는 모바일 인덱스 분석에 따르면 2019년 10월 기준, 게임 사용자 성별 구성은 남성 50.3%, 여성 49.7%로 거의 비슷하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게임을 둘러싼 세대 갈등이 현저히 줄어들지도 모른다.
모바일 시대에 접어들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게임을 즐기게 되면서 디지털 게임이 하나의 문화운동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다. 여성 캐릭터의 성 상품화에 반대하는 게임이 등장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으로 여혐을 드러내는 게임도 등장하고 있다. 디지털 게임이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을 인정하고 이를 건강한 놀이 문화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한 시대다. 그러자면 게임의 세계를 알아야 할 것이다. 먼저 게임부터 해보고 비판을 하든 옹호를 하든 할 일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놀이와 게임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영어 'game'을 놀이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원어 그대로 게임이라 할 때가 더 많다. 모든 게임은 뚜렷한 미션이 있어서,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나거나 대립하는 두 진영이 승부를 겨루는 구조다. 성공 혹은 승리가 게이머의 목표가 된다. 반면에 놀이는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순전히 과정을 즐기는 활동이다. 하지만 전통놀이 가운데는 비석치기처럼 정해진 미션을 완수해 승패를 겨루는 놀이도 적지 않다.
우리말은 ‘놀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다양한 방식의 놀이를 다 표현하다 보니 성격이 전혀 다른 놀이가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뭉뚱거려진다. 반면 영어는 play와 game을 구분해 쓴다. 인형놀이는 플레이지 게임이 아니다. 우리말에는 game에 해당하는 적절한 번역어가 없다. 독일어 경우도 spiele가 게임과 놀이에 두루 쓰인다. computer-spiele처럼. 학술 용어가 발달한 독일어이지만 놀이의 영역에서는 언어가 분화되지 않은 셈이다. 잘 놀 줄 모르는 게르만 민족의 특성 때문일까?
영어 ‘play’로 번역되는 놀이는 역할극 성격을 띤다.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는 전형적인 역할극이다. 다른 사람의 역할을 맡아봄으로써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 조감적 시각을 갖는 훈련을 하는 셈이다. 모든 놀이는 삶의 기술을 전수하면서 아이들의 성장에 알게 모르게 기여한다. 편을 갈라 승패를 겨루는 놀이에서는 미션에 실패한 경우 ‘죽었다’라고 한다. 삶이라는 놀이판에서 일시적으로 빠지는 것이다. 놀이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셈이다.
우리 전통놀이 중에는 편이 나뉘어 싸우는 싸움과 경계가 애매한 놀이도 적지 않다. 투계 곧 닭싸움은 닭을 훈련시켜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인데, 한쪽이 죽을 때까지 공격하는 닭의 특성상 상당히 잔인한 놀이이면서 결과에 판돈까지 걸려 있어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놀이였다. 승패가 나뉘는 놀이는 게임에 가깝다. 윷놀이나 공기놀이도 게임 성격을 띠고 있다. 편이 나뉘어 노는 놀이가 더 인기 있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에 더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정월 대보름이나 단오날에 했던 석전(石戰)은 놀이나 게임을 넘어서 일종의 부족전 성격을 띠었다. 대개 강을 사이에 두고 마을 단위로 편이 나뉘어 수십 명, 수백 명이 대규모 투석전을 벌이곤 했다. 돌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수두룩했지만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그 전투성에 놀란 일본 총독부가 금지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석전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호전적 성향을 말해준다. 돌팔매질은 전쟁 때 민간인이 전투에 참여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안동의 석전꾼들이 유명했는데, 왜란 때 이들이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놀이운동가와 교육운동가들은 전통놀이를 되살리려는 시도를 해왔지만 컴퓨터 게임이라는 블랙홀 앞에서 별 힘을 못 쓰고 있다. 어려서 전통놀이를 즐겨 하던 아이들도 십대만 되면 다들 키보드나 스마트폰 자판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농경사회에서 유행하던 놀이가 산업화를 거쳐 첨단 정보화 시대에도 유효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 환경에 부합하는 놀이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전통놀이는 어린아이들의 정서와 사회성 발달에 도움이 되지만 십대들에게는 더 이상 매력적인 놀이가 아니다. 전통놀이 예찬론자들은 컴퓨터 게임을 폄하하지만, 게임의 긍정적인 면을 도외시하는 것은 놀이의 세계를 이데올로기로 접근하는 것이다. 오늘날 아이들의 세계에서 게임을 모르면 대화에 끼기도 힘들다. 여럿이 함께 즐기면서 사회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게임, 치밀한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게임도 적지 않다.
게임은 놀이와 달리 산업과 직업의 세계로도 연결된다. 오늘날 게임 산업의 규모는 자동차 산업과 맞먹을 정도다. 프로 게이머는 프로 골퍼만큼 인기 직종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모바일 게임 산업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스마트폰과 아이패드 같은 하드웨어의 발달과 게임 소프트웨어의 발달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새로운 게임 세계를 열어간다. 호모 사피엔스 속에 녹아 있는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유전자는 무엇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유전자일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는 없다. 최근 포트나이트 게임에 빠져 잠도 자지 않고 씻지도 먹지도 않는 자녀들을 보다 못한 캐나다 부모들이 게임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걸었다. 일부러 중독성이 강한 게임을 만들었다는 이유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흡연의 악영향이 인식되기까지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했듯이 게임도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8년 세계보건기구에서 게임중독을 국제질병분류에 포함시킨 점을 근거로 정신질환 여부를 다투게 될 전망이다. 폐암 환자들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과 유사하다.
많은 놀이가 중독성을 띤다. 비석치기나 구슬치기도 끼니를 거르면서 할 수 있지만 야외에서 몸을 움직이는 놀이는 해가 지거나 몸이 지치는 물리적 한계 때문에 중단하게 된다. 디지털 게임의 경우는 전기가 나가거나 기기가 고장나지 않는 한 아무런 제어 장치가 없다. 아이들의 자율에 맡기기에는 중독성이 너무 강한 게임들로 인해 부모 자녀 관계가 파탄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도박으로 가정이 붕괴되는 것과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최근에는 게임에 빠져 있는 젊은 아빠들의 문제가 부각되기도 한다.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자란 세대가 부모가 되어 아이와 함께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게임 세계를 모르는 부모와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갈등하던 시대가 저물고 게임이 가족 놀이인 시대가 열리고 있는 걸까? 오늘날 디지털 게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즐기는 놀이인 만큼 젊은 부모들은 아이들과 게임으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덜할 것이다.(아이지에이웍스가 운영하는 모바일 인덱스 분석에 따르면 2019년 10월 기준, 게임 사용자 성별 구성은 남성 50.3%, 여성 49.7%로 거의 비슷하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게임을 둘러싼 세대 갈등이 현저히 줄어들지도 모른다.
모바일 시대에 접어들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게임을 즐기게 되면서 디지털 게임이 하나의 문화운동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다. 여성 캐릭터의 성 상품화에 반대하는 게임이 등장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으로 여혐을 드러내는 게임도 등장하고 있다. 디지털 게임이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을 인정하고 이를 건강한 놀이 문화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한 시대다. 그러자면 게임의 세계를 알아야 할 것이다. 먼저 게임부터 해보고 비판을 하든 옹호를 하든 할 일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