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편교육과 결혼제도는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자기편을 늘일 수 있도록 돕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다. 21세기 들어 우리 사회에서 학교를 거부하거나 결혼을 거부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기편을 애써 늘이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만큼 경제력이 커지고 다양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졸업장이 없어도, 결혼을 하지 않고도 사회생활이 가능해지고, 늘어나는 1인가구를 감당할 만큼 생산력이 커진 것이다. 주택을 비롯해 가전제품 등 각종 생활필수품을 개개인들이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부대끼던 시대는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되었고, 저마다 자기 방을 갖게 되었다가 이제는 저마다 자기 집을 갖게 된 셈이다.
2021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1인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의 33.4%를 넘었다. 세 집 중 한 집이 1인가구인 셈이다. 인터넷과 SNS 덕분에 취미나 생각이 통하는 개인들끼리 연결 통로가 열리면서 도시에서 홀로 사는 사람도 그다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다양한 동호회에 소속되어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주말이 더 바쁘다. 낯선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찾는다. 개는 확실한 내 편이 되어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반려’ 동물이 되고 있다. 사람과 같이 살기보다 개나 고양이랑 같이 사는 것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1인가구가 느는 속도에 비례해 반려동물 관련 신종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나 혼자 산다> TV 프로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폼나게’ 혼자 사는 사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없어도 꿀리지 않을 만큼 인물 좋고 유명하고 재력도 있는 사람들이 주로 나온다.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삶이 배우자 눈치 보며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준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이 있어 외롭지 않고, 일을 하는 데도 별 문제가 없다. 혼맥을 통하지 않고도 세력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타인(가족)과 더불어 사는 기술을 습득하지 못했거나 굳이 습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1인가구의 실상은 텔레비전에 비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50대 이상인 1인가구주가 절반을 넘으며 40대 이후 1인가구의 삶의 만족도는 빠르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 대부분은 ‘폼 나게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편이 별로 없는 사람들, 각자도생하도록 내몰린 사람들이다. 혼자 사는 젊은이들은 일찍이 부모로부터 독립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부득불 혼자 살게 된 이들이다. 여러 사정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저마다 한 가구를 이루고 있다. 이는 언뜻 보면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에 따른 삶의 방식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소비의 확대를 원하는 시장과 경제성장률을 올리고 싶어 하는 국가가 손을 맞잡고 만들어 낸 것이다.
기업은 경제력이 없는 젊은이들에게도 카드를 쥐어 주고는 “네 생각대로 해”라고 하면서 독자적인 판단으로 소비활동을 하도록 부추긴다. 1인가구에 맞추어 소비 시장도 빠르게 변하고 있고,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집밥’ 바람이 불고 있지만, 그 집밥은 더 이상 ‘엄마가 차려준 밥상’과 동의어가 아니다. 유명 셰프가 광고하는 ‘집밥 (같은) 도시락’을 사서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집밥과 혼밥이 다른 말이 아닌 시대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을 몸으로 경험한 이들이 애써 지옥을 탈출했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천국은 김밥천국 정도인 것이 현실이다.
타인이 지옥인 까닭은 ‘타자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타자와 공존하는 기술은 인류사적인 과제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개개인들에게도 무엇보다 필요한 기술이다. 아무리 혼밥 전성시대라 해도 예나 지금이나 혼자 먹는 밥보다 함께 먹는 밥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함께 사는 기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이 기술을 습득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싫어도 함께 부대끼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는 그 속에서 협력과 타협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지만 싫은 사람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는 구태여 그런 기술을 익힐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각자도생 사회에서 약자들은 더 취약한 상태에 내몰린다. 기득권층은 학벌과 혼맥 등으로 촘촘한 인맥을 형성하여 자기편을 늘임으로써 안전망을 점점 튼튼하게 만들어가는 데 반해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는 약자들의 안전망은 점점 약해진다.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N포세대, 헬조선이라는 말들이 유행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자기계발을 부추기며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간다. 자기계발 신드롬은 문제의 본질이 사회구조적인 데 있음을 은폐한다.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의 등장’은 고도성장기를 거친 모든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양극화 사회에서는 같은 세대 안에서도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를 개혁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회가 구성원들과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한 전면적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고장 난 부위를 수리해야 하는” 고난이도 문제다. 스스로 ‘리버럴한 보수’를 자처하는 우치다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뭐든지 반대하는” 입장임에도 부작용을 낳는 급격한 개혁보다 낡은 제도일지라도 고쳐서 쓸 수 있는 것은 고쳐 쓰자고 말한다. 일종의 브리콜라주를 추구하는 그의 주장은 매우 현실적이면서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한다.
타다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십 년 동안 합기도를 수련하며 몸으로 터득한 관계성과 레비나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십 년 동안 공부한 ‘관계의 철학’이 일맥상통함을 십여 년 넘게 혼자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체험적으로 깨달았다는 우치다 선생의 고백은 공부와 삶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타인이 지옥인 까닭은 ‘타자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타자와 공존하는 기술은 인류사적인 과제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무엇보다 필요한 기술이다. 아무리 혼밥 전성시대라 해도 예나 지금이나 혼자 먹는 밥보다 함께 먹는 밥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다르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삶의 근원적인 질문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보편교육과 결혼제도는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자기편을 늘일 수 있도록 돕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다. 21세기 들어 우리 사회에서 학교를 거부하거나 결혼을 거부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기편을 애써 늘이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만큼 경제력이 커지고 다양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졸업장이 없어도, 결혼을 하지 않고도 사회생활이 가능해지고, 늘어나는 1인가구를 감당할 만큼 생산력이 커진 것이다. 주택을 비롯해 가전제품 등 각종 생활필수품을 개개인들이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부대끼던 시대는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되었고, 저마다 자기 방을 갖게 되었다가 이제는 저마다 자기 집을 갖게 된 셈이다.
2021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1인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의 33.4%를 넘었다. 세 집 중 한 집이 1인가구인 셈이다. 인터넷과 SNS 덕분에 취미나 생각이 통하는 개인들끼리 연결 통로가 열리면서 도시에서 홀로 사는 사람도 그다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다양한 동호회에 소속되어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주말이 더 바쁘다. 낯선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찾는다. 개는 확실한 내 편이 되어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반려’ 동물이 되고 있다. 사람과 같이 살기보다 개나 고양이랑 같이 사는 것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1인가구가 느는 속도에 비례해 반려동물 관련 신종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나 혼자 산다> TV 프로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폼나게’ 혼자 사는 사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없어도 꿀리지 않을 만큼 인물 좋고 유명하고 재력도 있는 사람들이 주로 나온다.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삶이 배우자 눈치 보며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준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이 있어 외롭지 않고, 일을 하는 데도 별 문제가 없다. 혼맥을 통하지 않고도 세력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타인(가족)과 더불어 사는 기술을 습득하지 못했거나 굳이 습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1인가구의 실상은 텔레비전에 비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50대 이상인 1인가구주가 절반을 넘으며 40대 이후 1인가구의 삶의 만족도는 빠르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 대부분은 ‘폼 나게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편이 별로 없는 사람들, 각자도생하도록 내몰린 사람들이다. 혼자 사는 젊은이들은 일찍이 부모로부터 독립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부득불 혼자 살게 된 이들이다. 여러 사정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저마다 한 가구를 이루고 있다. 이는 언뜻 보면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에 따른 삶의 방식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소비의 확대를 원하는 시장과 경제성장률을 올리고 싶어 하는 국가가 손을 맞잡고 만들어 낸 것이다.
기업은 경제력이 없는 젊은이들에게도 카드를 쥐어 주고는 “네 생각대로 해”라고 하면서 독자적인 판단으로 소비활동을 하도록 부추긴다. 1인가구에 맞추어 소비 시장도 빠르게 변하고 있고,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집밥’ 바람이 불고 있지만, 그 집밥은 더 이상 ‘엄마가 차려준 밥상’과 동의어가 아니다. 유명 셰프가 광고하는 ‘집밥 (같은) 도시락’을 사서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집밥과 혼밥이 다른 말이 아닌 시대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을 몸으로 경험한 이들이 애써 지옥을 탈출했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천국은 김밥천국 정도인 것이 현실이다.
타인이 지옥인 까닭은 ‘타자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타자와 공존하는 기술은 인류사적인 과제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개개인들에게도 무엇보다 필요한 기술이다. 아무리 혼밥 전성시대라 해도 예나 지금이나 혼자 먹는 밥보다 함께 먹는 밥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함께 사는 기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이 기술을 습득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싫어도 함께 부대끼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는 그 속에서 협력과 타협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지만 싫은 사람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는 구태여 그런 기술을 익힐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각자도생 사회에서 약자들은 더 취약한 상태에 내몰린다. 기득권층은 학벌과 혼맥 등으로 촘촘한 인맥을 형성하여 자기편을 늘임으로써 안전망을 점점 튼튼하게 만들어가는 데 반해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는 약자들의 안전망은 점점 약해진다.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N포세대, 헬조선이라는 말들이 유행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자기계발을 부추기며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간다. 자기계발 신드롬은 문제의 본질이 사회구조적인 데 있음을 은폐한다.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의 등장’은 고도성장기를 거친 모든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양극화 사회에서는 같은 세대 안에서도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를 개혁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회가 구성원들과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한 전면적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고장 난 부위를 수리해야 하는” 고난이도 문제다. 스스로 ‘리버럴한 보수’를 자처하는 우치다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뭐든지 반대하는” 입장임에도 부작용을 낳는 급격한 개혁보다 낡은 제도일지라도 고쳐서 쓸 수 있는 것은 고쳐 쓰자고 말한다. 일종의 브리콜라주를 추구하는 그의 주장은 매우 현실적이면서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한다.
타다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십 년 동안 합기도를 수련하며 몸으로 터득한 관계성과 레비나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십 년 동안 공부한 ‘관계의 철학’이 일맥상통함을 십여 년 넘게 혼자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체험적으로 깨달았다는 우치다 선생의 고백은 공부와 삶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타인이 지옥인 까닭은 ‘타자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타자와 공존하는 기술은 인류사적인 과제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무엇보다 필요한 기술이다. 아무리 혼밥 전성시대라 해도 예나 지금이나 혼자 먹는 밥보다 함께 먹는 밥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다르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삶의 근원적인 질문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