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마을 '만들기'가 아닌 '발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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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본질은 표준화다, 부품의 표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2차산업뿐만 아니라 농업이나 서비스업 같은 1차, 3차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프랜차이즈는 표준화된 요식업이다. 교육 역시 표준화된다. 표준말을 가르치고, 표준화된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모든 아이들에게 들이민다. 초등 과정의 대표적인 참고서였던 <표준전과>는 그 이름에 근대교육의 핵심을 담고 있다.

표준화의 압력이 유난히 높았던 우리 사회에서는 주거 양식조차 표준화되었다. 오늘날 한국인들 열 명 중 일고여덟 명은 아파트에 산다. 한국사회에서 도시재개발 사업은 곧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사업으로 통한다. 표준화된 삶에 지친 이들은 전원주택을 찾거나 귀농 귀촌을 하고, 아파트를 포기할 수 없는 이들 중에는 멀쩡한 실내를 뜯고서 자신만의 인테리어를 하기도 한다. 직장  또는 교육 문제로 도시를 떠날 수 없는 이들 중에는 도심 주변에서 공동체 마을을 시도하는 이들도 있다.

원래 마을은 생산공동체이자 육아공동체였다. 인간사회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생산 활동과 육아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도시의 경우 일터와 집이 분리됨으로써 생산공동체로서의 마을은 거의 사라졌지만 육아공동체는 아직도 유효하다. 지난 20년 사이에 시도된 도시의 마을 만들기는 대부분 육아공동체로 시작되었다. 아이를 좀더 건강하게 기르고자 하는 젊은 부모들이 십시일반 품과 돈을 모아 마을을 만들어간다.

한때 세간의 이목을 끈 드라마의 무대인 ‘스카이 캐슬’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육아공동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을 SKY 대학에 보내기 위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시기질투하며 이웃 관계를 맺는다. 외부와 단절된 ‘캐슬’은 아이들을 일류대학에 보내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인간적인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장에는 다양성이 살아 있는 생태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도 하나의 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이름에 ‘달빛마을’이니 하는 이름이 붙는 걸로 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자 하는 바람이 사람들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집이 수백 수천 채가 모여 있어도 마을다운 마을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집과 집을 이어주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에는 보도만 있지 길이 없다. 그 보도마저도 흔히 아파트 주민만을 위한 닫힌 공간이다.

단지화는 공용공간을 사유화한다. 누구나 지나다니던 길이 단지 주민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고 담장까지 둘러쳐 지역 주민들을 가로막는다. 외부와 분리된 아파트 단지는 하나의 성, ‘캐슬’이다. 옛날의 성과 다른 점은 아파트 단지의 경우 성 안의 집들도 또 하나의 성처럼 외부와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은 성들이 모인 거대한 성이 한국식 아파트 단지다.

마을을 이루는 데는 집과 집을 잇는 물리적인 길도 중요하지만 사람과 사람을 잇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 더 중요하다. 그 길은 대개 아이들이 맡는다. 아이라는 매개 고리를 통해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에 생기가 돈다. 아이가 어른들이 왕래하는 길이 되는 셈이다. 도시에서 시도되는 마을 만들기는 대부분 육아와 교육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을은 죽어가는 마을이듯이, 육아와 교육은 한 사회의 재생 또는 소생의 기반을 닦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도시재생 역시 그 핵심은 아이들을 살리는 데 있다. 낙후된 건물을 새 건물로 바꾸는 게 아니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좋은 이웃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도시재생의 핵심이다. 이웃 관계를 맺는 데 아이들만큼 좋은 매개 고리가 없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살아날 때 비로소 사람이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사이를 만들어 내고 그 사이에서 소통이 활발히 일어나게 하는 것이 좋은 사회의 조건이다. 건축은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공간 역시 ‘사이’가 만들어 낸다. 벽과 벽이 사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가 눈에 보이는 벽을 만들어 낸다.

아이들이라는 길을 통해 이웃 관계를 맺고 서로 왕래하면서 재미나게 사는 것이 좋은 마을, 좋은 사회다. 도시재생은 그 길을 열어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아이들이 자기가 사는 지역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어른들한테는 집값이 싸서 잠깐 들어와 살게 된 곳일지 몰라도, 아이들한테는 그곳이 자기가 살아온 일생이 담긴 곳이기 마련이다.

돈 벌면 이웃의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가는 꿈을 꾸는 사람들뿐이라면 마을의 소생은 힘들다. 부모가 “여기는 뭐가 안 좋아” 하며 사는 지역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아이들 역시 자기가 사는 지역에 애착을 갖기가 힘들다. 자기 삶터를 긍정하는 일은 자기의 뿌리, 자기의 존재를 긍정하는 일이다. 주민자치도 민주주의도 자신이 사는 지역에 애착을 가진 이들이 있을 때 가능하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한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는 그 지역을 소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아이들이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돕는 일이야말로 아이들을 살리고 지역을 살리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승훈 센터장은 아이들이 자기가 사는 동네에 관심을 갖고, 지역에서 ‘잘’ 살고 있는 동네 어른들을 만날 수 있게 다리를 놓는 데 열심이다.

사실 ‘마을 만들기’는 조심스럽게 써야 할 표현이다. 뜻 맞는 이들끼리 모여 마을 안에 또 하나의 마을을 만드는 일이 되면 그 마을은 ‘그들만의 마을’이 되기 십상이다. 아파트 단지와 다를 바 없다. 마을운동은 ‘마을 발견하기’, ‘마을 공기 바꾸기’라는 이승훈 센터장의 말처럼, 재생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던 것을 소생시키는 일이다. 숨어 있던 것을 발견하고 눌려 있던 것을 일깨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를 복원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_현병호( <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