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욕의 교육학


대통령이 국제 행사장에서 내뱉은 비속어가 외교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검사들이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다 보니 습관처럼 튀어나왔을 거라는 말이 있다. 요즘 아이들도 검사님들 못지않게 입이 걸다. 길거리에서 버스 안에서 아이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쓰이는 거의 모든 부사와 감탄사가 비속어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사실 욕이라기보다 거친 언어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서열 행동이다. 양아치들이 어깨나 눈에 힘을 주는 것처럼 말에 힘을 준다. 검사들이 입에 달고 있다는 이XX, 저XX도 상대방을 하대하는 권력 행동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흔히 하는 욕 또는 거친 말을 열거해보자. 좆나(존나), 졸라, 좆도, 좆까, 좆만한 새끼, 좆빠지게, 씨팔(씹할), 쓰벌, 쓰펄, 씨발년, 씨발놈, 씹새끼, 씨(쓰)버럴, 씹탱이, 개새끼, 개자식, 개 같은 놈, 개좆이다… 참으로 풍성하다. 모두 ‘좆’과 ‘씹’, ‘개’에서 파생된 욕들이다. 실제로 우리 욕에는 이 낱말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개’도 성적으로 문란함을 빗댄 것이니, 사실상 거의 모든 욕이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많이 쓰이던 ‘호로자식’이나 ‘염병할 놈’ 같은 욕은 거의 들어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혼이 늘고 아비 없이 자라는 자식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 ‘호로자식’이 욕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된 것일까. 장티푸스로 죽어간 사람이 흔하던 시절 생겨난 ‘염병’이란 말이 장티푸스가 사라지면서 그 생명력을 다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욕도 사회적 산물인 만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죽고 또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리라.

욕이 욕다우려면 욕을 먹는 상대가 있어야 하고, 욕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욕을 듣는 상대가 비록 눈앞에 없어도 상관은 없지만, 욕을 먹을 만한 짓을 한 누군가를 겨냥해서 하는 것이 욕이다. ‘위선 떠는 여편네’라는 말보다 ‘열녀전 끼고 서방질할 년’이라는 욕 한마디가 더 촌철살인의 힘을 갖고 있다. 언어의 미학을 보여주는 이런 욕에 비하면 ‘개새끼’ 같은 단순한 욕은 욕이라기보다 거친 언어일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요즘 아이들이 하는 욕은 대부분 이런 욕들이다.

욕(辱)이라는 말은 욕설 말고도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욕본다’는 말에서는 ‘고생’을 뜻하고, ‘욕된 일’에서는 ‘수치’의 뜻으로 쓰인다. 여하튼 욕은 뭔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다. 욕설에 해당하는 욕(辱)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상소리’이다. 상놈들이나 쓰는 상스러운 말이라는 뜻으로 한자어 ‘상(常)’이 쓰였으니 순 우리말은 아닌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욕(辱)이라는 말은 한자어인데, 정작 욕설은 거개가 순우리말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중들이 쓰는 언어이다 보니 그럴 것이다. 외래어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도 욕설만큼은 순우리말이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최근 ‘빡큐’ 같은 외래 욕이 아이들 사이에 쓰이고는 있지만, 그다지 확산될 것 같지는 않다. 영어가 아무리 대중화되고 있다 해도 민중의 언어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일까. 그도 그렇지만, ‘씨팔’에 비해 피부에 와 닿는 포스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게다.

욕설은 뇌의 변연계 부위를 자극한다고 한다. 변연계는 포유류에 공통되는 부위로, 주로 감정에 관여하고 기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욕설은 인간의 동물적인 부분을 자극하여, 이성이 아닌 감정에 휘둘리게 만든다. 화를 내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화가 화를 불러일으켜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욕에 유독 성적인 표현이 많은 것과 욕이 동물적인 욕망을 관장하는 변연계를 자극한다는 점은 서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욕은 인간 사회에서 억압되고 있는 욕망이 잠시 숨통을 틔우는 압력밸브 같은 역할도 한다.

말하고 듣는 일반적인 언어 기능을 좌뇌의 신피질이 맡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변연계를 자극하는 욕의 소통 경로에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욕은 그 말의 의미보다 소리 자체에 담겨 있는 파장이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욕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욕을 곱씹어 의미분석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욕은 언어라기보다 소리에 가깝다. KBS 스페셜 팀에서 한 원예연구소의 도움으로 두 그룹의 양파에 그린음악과 초등학생들의 욕설을 들려준 다음 성장과정을 관찰했다고 한다. 다른 성장 조건은 똑같은 상황에서 그린음악을 들려준 양파는 잘 자란 반면 욕을 들려준 양파는 싹조차 나지 않은 것도 있었고 성장 상태도 불규칙했다.

모든 소리는 그 자체가 고유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의 일종이고, 그 파장이 다른 존재의 파장에 공명 현상을 일으켜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그 속에 담긴 뜻도 중요하지만 소리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 욕에 대체로 쌍시옷이 많이 들어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언어를 불문하고 욕에는 대체로 경음이나 격음 같은 된소리가 많이 쓰인다. 씨팔, 빡큐, 빠가야로…. 소리의 파장이 어떨지 대충 감이 온다. 거기에 격한 감정까지 실린다면 파장은 더 격해질 수밖에 없다. 저주나 욕은 알게 모르게 쌍방에 다 같이 영향을 미친다. 메아리는 산에만 살지 않는다. 해학적이거나 미학적인 욕이 아닌 거칠기만 한 욕설은 우리 몸과 마음을 흐트러뜨릴 가능성이 높다. 거친 욕설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을 것이다.

 

1996년에 ‘전국 욕쟁이 대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씨팔’, ‘개새끼’ 같은 저급한 욕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김열규의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은 이 대회에서 싹튼 학술적 열매다. ‘욕은 나쁜 것’이라는 통념을 깨고, 인문학의 눈으로 욕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시도한 첫 책이다. 뒤이어 스스로 B급 문화를 지향한다는『딴지일보』가  1998년에 창간되면서 공론의 장에 욕설이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언어에서 욕의 역할은 음식에서 겨자나 고추 같은 매운 양념이 하는 역할과 비슷할 것이다. 어떤 음식은 톡 쏘는 맛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난다. 욕 한 바가지 퍼부어 마땅한 사람이나 상황에 적절한 표현과 적절한 강도로 제대로 하는 욕은 그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이 있다. 때문에 아이들더러 무조건 욕을 못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언어교육은 아닐 것이다. 어두운 부분은 그 나름으로 존재 가치를 띠고 있는 법이다. 욕이 거세된 언어는 그만큼 생명력이 거세된 언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강자의 횡포가 심한 사회일수록 욕이 더 발달할 가능성이 높다. 조선 후기 판소리에는 욕이 질펀하게 나온다. 주로 상놈이 양반들을 욕하는 내용인데, 양반들도 이를 모른 척했다. 민중들이 울분을 그렇게 욕으로라도 풀어낸 탓에 조선 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욕은 사회의 안전장치이자 약자의 소심한 자기 위안일 수 있다. 욕이라는 언어로 풀지 않고 행동으로 풀었더라면 동학농민운동 같은 민란이 진즉에 일어나 왕조가 일찍 막을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욕쟁이 할매'는 있어도 '욕쟁이 할배'는 없는 까닭도 여성들이 더 억압받은 존재임을 반증한다. 욕을 약자의 언어, 민중의 언어라고 볼 때, 욕이 발달한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민중들에게 ‘욕 나오는’ 사회였음을 반증한다. 일본에서는 ‘바보야’ 정도가 심한 욕에 속하고, 독일은 ‘똥’이나 ‘똥구멍’ 같은 말이 보편적인 욕설이라고 한다. 일본이나 독일처럼 영주와 농노계급으로 이루어진 봉건제가 발달했던 사회에서 욕이 발달하지 않은 것은 지배계급이 억압만 한 것이 아니라 보호자 역할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욕이 발달한 것은 또 다른 한편으로 민중들 사이의 연대의식과 공감대가 그만큼 넓고 깊었음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아주 친한 친구끼리도 욕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관계가 단절될까봐 예의를 잃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친한 사이일수록 욕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서로에게 함부로 하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드러낼 수 있는 깊은 관계임을 말해준다. 욕을 주고받으면서도 의가 상하지 않고 오히려 더 끈끈한 유대감이 생긴다면, 그 욕은 할 만한 것일 수도 있겠다.

욕이 전염병처럼 창궐하는 시대에 안전지대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예방백신을 맞히려 애쓰는 대안학교도 있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 같다. 어떤 학교에서는 욕을 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기가 한 욕을 백 번씩 외치도록 벌칙을 정해 시행하기도 했다는데, 그렇게 ‘욕된’ 경험을 하는 것이 교육적인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초등 대안학교는 웬만큼 예방이 된다 해도 중등의 경우 일반학교에서  감염되어 들어오는 아이들로 인해 욕 바이러스가 금세 퍼지고 만다. 어떤 학교에서는 국어 시간에 자주 쓰는 욕을 모아보고 어원을 찾아보면서 주의를 환기하기도 한다. 또 욕을 억누르기보다 자각하도록 돕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자기가 한 욕의 뜻을 아는지 물어보고 직설적으로 자세히 설명해주었더니 그 뒤로는 욕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욕의 무균지대를 만들려 애쓰기보다 감염되더라도 거뜬히 이겨내는, 튼튼한 항체를 만들어내는 그런 교육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위생이 지나치면 오히려 면역력이 떨어져 자가면역 질환을 앓거나 쉽게 감기에 걸리기도 한다. 고운 말을 쓰는 것은 좋지만, 고운 말만 쓰도록 교육하는 것은 아이들의 면역력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욕 나오는’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고 그럴 때 적절한 욕을 할 줄 아는 것은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나쁜 정치가 벌어질 때는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억눌린 분노를 욕설 몇 마디로 허공에 날리지 않고, 분노의 에너지를 세상을 바꾸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 ‘좆같은’ 세상이지만 한번 잘 살아보고 싶은 욕구를 일깨우는 그런 교육을 할 수는 없을까? 베네수엘라의 빈민가 청소년 오케스트라단 ‘엘 시스테마’, 문제 청소년들을 일류 요리사로 키우는 영국 제이미 올리버의 ‘피프틴(Fifteen)’ 레스토랑 같은 사례에서 영감을 얻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모든 생명은 꽃을 피우고 싶어 하지 않는가.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