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언어 지도
표음문자인 한글과 달리 표의문자인 한자의 경우 수천 개의 문자를 일일이 기억해서 읽고 쓰기가 쉽지 않다. 인민을 위한 국가를 지향하는 중국 정부는 간자체를 만들어 복잡한 한자를 간소화했지만 이를 익히는 일도 만만찮다. 한자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병음(拼音 pinyin)이 널리 쓰이는 것은 세계화 시대의 필연적 흐름이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어 병음만으로 한자를 입력하는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한자를 쓸 줄 모르는 중국인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한다.(한자를 혼용하는 일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젊은이들의 70%가 한자를 정확히 쓸 줄 모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 국영방송(CCTV)에서 ‘한자 받아쓰기 대회’를 방영하고, 인민일보가 ‘위기의 한자 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을 정도다. 중국 인민들이 종국에는 한자를 버리고 병음을 쓰게 될 거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도 있다.
아랍어의 경우 사용 인구가 세계 5위이지만, 부족마다 발음이 다르고 표기법도 조금씩 달라 국가 단위, 세계 단위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아랍 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글자여서 자판 입력이 쉽지 않고, 모음을 표기하는 글자가 따로 없어 자음에 점을 찍어 모음 기능을 하는 것도 디지털 시대의 문자로 불편한 점이다. 오늘날 인류가 쓰는 문자 중에 표음문자인 알파벳과 한글의 장점을 따라올 문자가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한자교육을 둘러싼 논란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70여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이는 우리말 어휘의 상당수가 한자어인 데다 한글 전용을 둘러싸고 이념 갈등까지 뒤섞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말과 글을 빼앗길 뻔했던 역사적 경험 탓에 한글 사랑은 곧 나라 사랑으로 통했다. 1948년 10월 9일 제헌국회의 여섯 번째 법률로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것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이후 공문서에서는 한글 전용과 한자 병기가 대세가 되었지만 신문은 오랫동안 국한문 혼용을 고수했다. 이는 압축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언론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1988년 5월 최초의 한글 전용 가로쓰기 신문인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고 한글 전용에 대한 편견이 빠르게 불식되면서 1995년 한글날부터 모든 종합일간지들이 한글 전용을 하기에 이르렀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서 통일교육이 강조되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갔다. 학교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전교조 교사들을 비롯해 진보적 인사들은 대체로 한글 전용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한자교육은 교총이나 교장단, 유학자 같은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사람들의 주장으로 비쳤다. 1990년대 국어교육에 전교조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단체는 이오덕 선생을 중심으로 한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일 것이다. ‘살아 있는 글쓰기’ 운동을 통해 아이들을 살리고 우리말과 글을 살리는 일에 앞장선 글쓰기연구회의 영향력은 학교 밖에서 활동하는 글쓰기 교사들에게까지 미쳤다.
90년대 전후로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전교조와 글쓰기교육연구회 교사들의 영향은 세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30~40대 교사들에게 학창 시절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이들은 대체로 그때 그 선생님들일 것이다. 특히 국어교사의 상당수는 학생 시절 존경하던 선생님의 영향으로 교사의 길로 들어선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사들이 한글 전용 세대이고, 한문 과목이 선택이다 보니 한자를 가르치는 학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kess.kedi.re.kr에 선택과목 학교 통계가 실려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한자를 못 읽는 대학생들이 점점 늘어나는 걸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해방 이후부터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았지만, 한자교육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쳤고, 90년대에도 대학교재는 국한문 혼용체를 썼다. 그러다 일간지들이 한글 전용을 택하면서 대세는 한글 전용으로 기울어졌고, 민주정부가 수립된 이후 모든 분야에 한글 전용이 보편화되어 공문서에서도 한자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대학 교재도 법학 서적 외에는 한자를 쓰지 않게 되었다. 대학생들이 전공 서적을 읽어내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리포트를 ‘금일까지 제출’하라는 말을 ‘금요일까지 제출’로 알아듣고는 왜 헷갈리는 표현을 쓰냐고 오히려 교수에게 따지는 대학생이 있다고 한다. 연하장에 “새해를 맞아 명복을 빕니다” 같은 문구가 등장한 것은 오래전이다. ‘동해’를 ‘동쪽에서 뜨는 해’로 아는 중학생이 태반일 정도다.
아이들의 어휘력이 줄어드는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뭔가를 읽고 있지만 긴 글을 읽어내는 힘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문해력의 기초는 어휘력이다. 어휘력이 떨어지는 것이 한자를 모르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한자어로 된 추상적인 낱말은 한자를 모를 경우 수많은 용례를 접해야 감을 잡을 수 있다. 모르는 단어가 연달아 나오면 맥락만으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어 점점 책을 멀리하게 된다. 긴 글을 읽지 않으니 어휘력이 자라기 힘들고 어휘력이 떨어지니 긴 글을 읽지 않게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교육부는 2019년 초등 5·6학년 교과서에 사용할 한자 300자를 발표했는데, 한글학회와 전교조는 학습 부담 증가 등의 이유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어려운 한자어 낱말을 각주처럼 풀이해주는 것조차 반대하는 것은 아직도 한글 전용이 이념의 문제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준다. 한자 사교육시장을 부추기고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가중시킬 거라는 우려가 있긴 하나, 이는 한자교육 방법을 개선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한문이 아닌 한자어 낱말을 읽기 중심으로 가르치면 된다.
한자교육을 정규 교육과정에 넣어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어에 관심 있거나 어휘력을 키우고 싶은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학습할 수 있게 교재를 잘 만들면 된다. 쓰기보다 읽기 중심으로, 기초 한자로 된 개념어들을 알 수 있는 한자 개념어 사전 같은 것이 있으면 한자어 낱말을 좀더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한자어 끝말 잇기 놀이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학습법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위치(位置)-치환(置換)-환전(換錢)-전주(錢主)-주인(主人)... 같은 방식으로 한자어가 같은 낱말을 이어가면서 낱말의 간단한 용례를 하나씩 말하는 식이다.
언어교육은 소통을 위한 것이다. 문해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한자’를 아는 것보다 한자어로 된 개념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포도(葡萄)’나 ‘귤(橘)’도 한자어지만 굳이 한자를 몰라도 소통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디지털 시대에 한자의 한계는 점점 더 부각될 테고, 한자를 살리고자 우리가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자를 서둘러 폐기하는 것도 현명한 처사는 아니다. 아직도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맞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다. 문해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에서 한자어 학습을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 1951년 정부는 교육한자 1,000자를 정하고 1957년에 300자를 추가하여 1964년부터 학교에서 가르치다 1970년 한글 전용 정책으로 중단한 뒤 1972년에 다시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를 제정하여 중고등 과정에서 선택적으로 가르칠 수 있게 하고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세계 언어 지도
표음문자인 한글과 달리 표의문자인 한자의 경우 수천 개의 문자를 일일이 기억해서 읽고 쓰기가 쉽지 않다. 인민을 위한 국가를 지향하는 중국 정부는 간자체를 만들어 복잡한 한자를 간소화했지만 이를 익히는 일도 만만찮다. 한자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병음(拼音 pinyin)이 널리 쓰이는 것은 세계화 시대의 필연적 흐름이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어 병음만으로 한자를 입력하는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한자를 쓸 줄 모르는 중국인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한다.(한자를 혼용하는 일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젊은이들의 70%가 한자를 정확히 쓸 줄 모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 국영방송(CCTV)에서 ‘한자 받아쓰기 대회’를 방영하고, 인민일보가 ‘위기의 한자 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을 정도다. 중국 인민들이 종국에는 한자를 버리고 병음을 쓰게 될 거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도 있다.
아랍어의 경우 사용 인구가 세계 5위이지만, 부족마다 발음이 다르고 표기법도 조금씩 달라 국가 단위, 세계 단위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아랍 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글자여서 자판 입력이 쉽지 않고, 모음을 표기하는 글자가 따로 없어 자음에 점을 찍어 모음 기능을 하는 것도 디지털 시대의 문자로 불편한 점이다. 오늘날 인류가 쓰는 문자 중에 표음문자인 알파벳과 한글의 장점을 따라올 문자가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한자교육을 둘러싼 논란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70여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이는 우리말 어휘의 상당수가 한자어인 데다 한글 전용을 둘러싸고 이념 갈등까지 뒤섞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말과 글을 빼앗길 뻔했던 역사적 경험 탓에 한글 사랑은 곧 나라 사랑으로 통했다. 1948년 10월 9일 제헌국회의 여섯 번째 법률로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것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이후 공문서에서는 한글 전용과 한자 병기가 대세가 되었지만 신문은 오랫동안 국한문 혼용을 고수했다. 이는 압축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언론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1988년 5월 최초의 한글 전용 가로쓰기 신문인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고 한글 전용에 대한 편견이 빠르게 불식되면서 1995년 한글날부터 모든 종합일간지들이 한글 전용을 하기에 이르렀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서 통일교육이 강조되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갔다. 학교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전교조 교사들을 비롯해 진보적 인사들은 대체로 한글 전용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한자교육은 교총이나 교장단, 유학자 같은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사람들의 주장으로 비쳤다. 1990년대 국어교육에 전교조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단체는 이오덕 선생을 중심으로 한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일 것이다. ‘살아 있는 글쓰기’ 운동을 통해 아이들을 살리고 우리말과 글을 살리는 일에 앞장선 글쓰기연구회의 영향력은 학교 밖에서 활동하는 글쓰기 교사들에게까지 미쳤다.
90년대 전후로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전교조와 글쓰기교육연구회 교사들의 영향은 세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30~40대 교사들에게 학창 시절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이들은 대체로 그때 그 선생님들일 것이다. 특히 국어교사의 상당수는 학생 시절 존경하던 선생님의 영향으로 교사의 길로 들어선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사들이 한글 전용 세대이고, 한문 과목이 선택이다 보니 한자를 가르치는 학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kess.kedi.re.kr에 선택과목 학교 통계가 실려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한자를 못 읽는 대학생들이 점점 늘어나는 걸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해방 이후부터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았지만, 한자교육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쳤고, 90년대에도 대학교재는 국한문 혼용체를 썼다. 그러다 일간지들이 한글 전용을 택하면서 대세는 한글 전용으로 기울어졌고, 민주정부가 수립된 이후 모든 분야에 한글 전용이 보편화되어 공문서에서도 한자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대학 교재도 법학 서적 외에는 한자를 쓰지 않게 되었다. 대학생들이 전공 서적을 읽어내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리포트를 ‘금일까지 제출’하라는 말을 ‘금요일까지 제출’로 알아듣고는 왜 헷갈리는 표현을 쓰냐고 오히려 교수에게 따지는 대학생이 있다고 한다. 연하장에 “새해를 맞아 명복을 빕니다” 같은 문구가 등장한 것은 오래전이다. ‘동해’를 ‘동쪽에서 뜨는 해’로 아는 중학생이 태반일 정도다.
아이들의 어휘력이 줄어드는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뭔가를 읽고 있지만 긴 글을 읽어내는 힘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문해력의 기초는 어휘력이다. 어휘력이 떨어지는 것이 한자를 모르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한자어로 된 추상적인 낱말은 한자를 모를 경우 수많은 용례를 접해야 감을 잡을 수 있다. 모르는 단어가 연달아 나오면 맥락만으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어 점점 책을 멀리하게 된다. 긴 글을 읽지 않으니 어휘력이 자라기 힘들고 어휘력이 떨어지니 긴 글을 읽지 않게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교육부는 2019년 초등 5·6학년 교과서에 사용할 한자 300자를 발표했는데, 한글학회와 전교조는 학습 부담 증가 등의 이유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어려운 한자어 낱말을 각주처럼 풀이해주는 것조차 반대하는 것은 아직도 한글 전용이 이념의 문제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준다. 한자 사교육시장을 부추기고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가중시킬 거라는 우려가 있긴 하나, 이는 한자교육 방법을 개선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한문이 아닌 한자어 낱말을 읽기 중심으로 가르치면 된다.
한자교육을 정규 교육과정에 넣어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어에 관심 있거나 어휘력을 키우고 싶은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학습할 수 있게 교재를 잘 만들면 된다. 쓰기보다 읽기 중심으로, 기초 한자로 된 개념어들을 알 수 있는 한자 개념어 사전 같은 것이 있으면 한자어 낱말을 좀더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한자어 끝말 잇기 놀이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학습법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위치(位置)-치환(置換)-환전(換錢)-전주(錢主)-주인(主人)... 같은 방식으로 한자어가 같은 낱말을 이어가면서 낱말의 간단한 용례를 하나씩 말하는 식이다.
언어교육은 소통을 위한 것이다. 문해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한자’를 아는 것보다 한자어로 된 개념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포도(葡萄)’나 ‘귤(橘)’도 한자어지만 굳이 한자를 몰라도 소통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디지털 시대에 한자의 한계는 점점 더 부각될 테고, 한자를 살리고자 우리가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자를 서둘러 폐기하는 것도 현명한 처사는 아니다. 아직도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맞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다. 문해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에서 한자어 학습을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 1951년 정부는 교육한자 1,000자를 정하고 1957년에 300자를 추가하여 1964년부터 학교에서 가르치다 1970년 한글 전용 정책으로 중단한 뒤 1972년에 다시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를 제정하여 중고등 과정에서 선택적으로 가르칠 수 있게 하고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