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인종, 성 정체성, 장애 등을 비하하거나 편견을 담고 있는, 또는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표현을 쓰지 말자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사회에서는 이미 80년대부터 사회적 이슈가 된 사안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십여 년 전부터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김치녀’, ‘된장녀’ 같은 여성 비하 표현과 ‘장애우’와 ‘장애인’을 둘러싸고 일었던 논란은 PC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PC주의는 단순히 언어 순화 차원을 넘어, 인류 사회가 차별을 지양하고 보다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도 할리우드에 뿌리내린 PC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게임이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 산업에서 PC는 작품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 되고 있다. <맨인블랙4>에 흑인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 또한 PC의 영향일 텐데, 유감스럽게도 관객들의 호응은 별로였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표현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각성하게 한 점에서 PC주의는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왔지만, 그 부작용도 적지 않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을 다룬 소설 <앵무새 죽이기>가 '흑인(nigger)’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과유불급은 PC운동에 무엇보다 필요한 격언일 듯하다. 흔히 진보의 레토릭처럼 비치는 PC는 설교조의 개입, 독선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거부감과 혐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씹선비’ ‘진지충’ 'PC충' 같은 표현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2018년 ‘정치적 올바름은 진보일까’라는 주제로 열린 <멍크 토론회>에서 스티븐 프라이는 자신이 좌파임에도 PC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로 '역효과'를 들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PC운동은 “우파 신병을 모집하는 하사” 역할을 할 뿐이다. 실제로 미국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는 PC를 공개적으로 저격함으로써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역설적으로 PC주의가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던 셈이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는 데 페미니즘과 PC가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을 것이다.
지난해 <김어준의 뉴스공장> 폐지 공격에 맞서 추미애 의원이 “자유로운 편집권을 누리지 못하고 외눈으로 보도하는 언론들이 시민 외에는 눈치 볼 필요가 없이 양눈으로 보도하는 뉴스공장을 타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데 대해,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외눈은 장애 비하 표현”이라며 시비를 걸고 나선 것도 진보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잘 보여준다. 맥락을 읽지 못하는, 그야말로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는 비판이다. 장의원은 ‘눈 뜬 장님’도 장애 비하 표현이라고 딴지를 걸고 싶겠지만, 그러자면 국어대사전에 먼저 딴지를 걸어야 할 것이다. ‘눈 뜬 시각장애인’으로 바꿔야 한다고. 판소리 심청가에 나오는 ‘심봉사’도 ‘시각장애인 심씨’라고 바꾸어야 할까?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맥락과 언어의 쓰임새를 무시하는 것은 지적 미숙을 드러내는 것이다. 흔히 정치적 올바름에 근거해 바른 말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말을 전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말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 세상에 넘쳐나는 까닭은 하기 쉬운 말, 누구에게도 반박당하지 않고 ‘가오 잡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없다. 맥락과 분리된 바른 말은 신념에 사로잡힌 박제된 말이 되고 만다. 신념이란 것이 애당초 박제된 이념이기 때문이다.
바르게살기운동본부에서나 할 법한 ‘지당한 말씀’을 대중들을 향해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말이 사람들에게 가닿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 말은 수신을 염두에 둔 ‘발신’이 아니라 ‘발산’이다. 무작위로 배포되는 삐라나 전단지는 그중 극히 일부라도 누군가의 뇌리에 흔적을 남기겠지만, ‘지당한 말씀’은 그저 사라질 뿐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메시지가 아니라 혼잣말에 불과하다. 아니, 혼잣말의 경우는 때로 자기 자신을 향한 메시지일 수 있지만, 지당한 말씀은 자신에게도 수신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수신되지 않는 말을 우리는 ‘헛소리’라고 부른다.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한쪽 귀로 들어왔다 다른 쪽 귀로 흘러나가는 이유다.
클리셰Cliche는 ‘상투적인 표현’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원래는 인쇄 용어였다. 식자공들이 활자를 하나하나 골라서 조판 작업을 하던 시절, 자주 쓰이는 상투적인 문구들을 활자 묶음으로 만들어 아예 따로 모아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상투적인 표현은 식자공이 묶음 활자로 처리하듯 청중도 독자도 묶음으로 처리해 건너뛰고 만다. 메시지가 메시지일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을 수신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의미 있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그것은 메시지가 된다. PC주의가 언어를 박제화하고 진보를 희화화하는 데 기여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이 토론회 참가자 3천 명을 대상으로 ‘PC는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토론 시작 전 찬성 36%, 반대 64%였던 응답이 토론이 끝난 후에는 찬성 30%, 반대 70%로 바뀌었다.(www.muckdebates.com).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인종, 성 정체성, 장애 등을 비하하거나 편견을 담고 있는, 또는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표현을 쓰지 말자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사회에서는 이미 80년대부터 사회적 이슈가 된 사안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십여 년 전부터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김치녀’, ‘된장녀’ 같은 여성 비하 표현과 ‘장애우’와 ‘장애인’을 둘러싸고 일었던 논란은 PC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PC주의는 단순히 언어 순화 차원을 넘어, 인류 사회가 차별을 지양하고 보다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도 할리우드에 뿌리내린 PC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게임이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 산업에서 PC는 작품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 되고 있다. <맨인블랙4>에 흑인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 또한 PC의 영향일 텐데, 유감스럽게도 관객들의 호응은 별로였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표현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각성하게 한 점에서 PC주의는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왔지만, 그 부작용도 적지 않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을 다룬 소설 <앵무새 죽이기>가 '흑인(nigger)’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과유불급은 PC운동에 무엇보다 필요한 격언일 듯하다. 흔히 진보의 레토릭처럼 비치는 PC는 설교조의 개입, 독선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거부감과 혐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씹선비’ ‘진지충’ 'PC충' 같은 표현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2018년 ‘정치적 올바름은 진보일까’라는 주제로 열린 <멍크 토론회>에서 스티븐 프라이는 자신이 좌파임에도 PC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로 '역효과'를 들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PC운동은 “우파 신병을 모집하는 하사” 역할을 할 뿐이다. 실제로 미국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는 PC를 공개적으로 저격함으로써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역설적으로 PC주의가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던 셈이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는 데 페미니즘과 PC가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을 것이다.
지난해 <김어준의 뉴스공장> 폐지 공격에 맞서 추미애 의원이 “자유로운 편집권을 누리지 못하고 외눈으로 보도하는 언론들이 시민 외에는 눈치 볼 필요가 없이 양눈으로 보도하는 뉴스공장을 타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데 대해,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외눈은 장애 비하 표현”이라며 시비를 걸고 나선 것도 진보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잘 보여준다. 맥락을 읽지 못하는, 그야말로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는 비판이다. 장의원은 ‘눈 뜬 장님’도 장애 비하 표현이라고 딴지를 걸고 싶겠지만, 그러자면 국어대사전에 먼저 딴지를 걸어야 할 것이다. ‘눈 뜬 시각장애인’으로 바꿔야 한다고. 판소리 심청가에 나오는 ‘심봉사’도 ‘시각장애인 심씨’라고 바꾸어야 할까?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맥락과 언어의 쓰임새를 무시하는 것은 지적 미숙을 드러내는 것이다. 흔히 정치적 올바름에 근거해 바른 말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말을 전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말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 세상에 넘쳐나는 까닭은 하기 쉬운 말, 누구에게도 반박당하지 않고 ‘가오 잡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없다. 맥락과 분리된 바른 말은 신념에 사로잡힌 박제된 말이 되고 만다. 신념이란 것이 애당초 박제된 이념이기 때문이다.
바르게살기운동본부에서나 할 법한 ‘지당한 말씀’을 대중들을 향해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말이 사람들에게 가닿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 말은 수신을 염두에 둔 ‘발신’이 아니라 ‘발산’이다. 무작위로 배포되는 삐라나 전단지는 그중 극히 일부라도 누군가의 뇌리에 흔적을 남기겠지만, ‘지당한 말씀’은 그저 사라질 뿐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메시지가 아니라 혼잣말에 불과하다. 아니, 혼잣말의 경우는 때로 자기 자신을 향한 메시지일 수 있지만, 지당한 말씀은 자신에게도 수신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수신되지 않는 말을 우리는 ‘헛소리’라고 부른다.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한쪽 귀로 들어왔다 다른 쪽 귀로 흘러나가는 이유다.
클리셰Cliche는 ‘상투적인 표현’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원래는 인쇄 용어였다. 식자공들이 활자를 하나하나 골라서 조판 작업을 하던 시절, 자주 쓰이는 상투적인 문구들을 활자 묶음으로 만들어 아예 따로 모아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상투적인 표현은 식자공이 묶음 활자로 처리하듯 청중도 독자도 묶음으로 처리해 건너뛰고 만다. 메시지가 메시지일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을 수신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의미 있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그것은 메시지가 된다. PC주의가 언어를 박제화하고 진보를 희화화하는 데 기여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이 토론회 참가자 3천 명을 대상으로 ‘PC는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토론 시작 전 찬성 36%, 반대 64%였던 응답이 토론이 끝난 후에는 찬성 30%, 반대 70%로 바뀌었다.(www.muckdebates.com).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