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것을 꿈꾸다
다른 포유류 새끼에 비해 인간의 유아기가 긴 것은 주변 환경에 대해 정보를 습득하고 자기 생각을 형성하는 데 온전히 집중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유아기에는 깨물고, 입에 넣고, 두들기다가 조금 더 크면 기고, 걷고, 뛰고 조금씩 행동반경을 넓혀가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채운다. 그러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제 발로 직접 세상을 만나고 싶어 한다.
청소년들이 친구들과의 여행에는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가족여행은 썩 내켜하지 않는 것은, 부모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는 대체로 간섭은 넘치고 모험의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떠나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위험을 스스로 감당해보고 싶어서다. 위험에는 스릴과 흥분, 그리고 성취감이 동반된다. 그러나 부모에게 ‘위험’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요소여서, 혼자 떼어놓기는커녕 함께하는 여행에서도 낯선 것이 보일 때마다 잔소리 강도가 한층 높아진다. 감시와 통제가 따르는 여행은 답답하고 따분하며 눈치가 보인다.
“친구와 여행을 가고 싶다”는 청소년이 있다면 위험하다고 반대할 것이 아니라, 그 위험을 스스로 책임져보고 싶어 하는 용기를 반갑게 여길 일이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대안학교 아이들은 방학이 되면 가방 하나 메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친구 집을 돌아다니거나, 마음 맞는 친구끼리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곤 한다. 가만히 지켜보면 아이들끼리 떠나는 여행이 어른들의 생각처럼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최근 몇 년 사이 주5일제, 자유학기제 등 학교 밖 체험의 기회가 늘어나며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겨났다. 주말에 예술체험을 할 수 있는 헤이리어린이예술 캠프나 토요자유학교, 혹은 도시 아이들이 농가를 찾아가는 ‘채식보따리학교’ 같은 곳도 있고, 지구촌인디고여행학교, 네팔불이평화원정대, 지구여행학교, 선재학교처럼 방학 때 청소년들과 해외로 떠나는 프로그램도 있다. 로드스꼴라나 양산창조학교처럼 아예 상설 여행학교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프로그램은 많지만 그래서 ‘어떤’ 경험을 선택할 것인가는 더 고민이 된다. 주로 집과 학교와 학원을 맴돌며 청소년기를 보내는 요즘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은 삶을 확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공간의 환기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청소년들 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새로운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평소엔 쉽사리 만나기 어렵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행으로서의 교육과정
대안학교에서 아이들과 여행을 떠나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 그리고 또 하나는 ‘스스로를 감당해보는’ 경험이었다. 먹고, 입고, 자는 생존의 요소를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삶의 과제를 소비적으로 해결해오던 아이들에게 ‘스스로 서보기’란 실로 낯선 경험이다.
제 뒷감당을 해보는 첫 번째 관문은 머물렀던 숙소를 처음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에는 콘도든, 민박이든, 마을회관이든 예외가 없다. 그러면 투덜거리며 꼭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있다. “우리 돈 주고 자는 거잖아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 이 습관적으로 ‘내가 얼마를 지불했는가’를 따진다. 도보순례 중 하룻밤 묵게 된 어느 마을회관에서 동네 이장님이 여행 중엔 잘 먹어야 한다며, 고기를 한 덩어리 끊어다주셨다. 그러자 한 아이가 옆에 와서 의아한 듯 속삭였다. “이거 상한 거예요? 왜 그냥 주세요? 돈이 얼만데….” 대가 없이 베푸는 선의를 낯설어하는 것이 아이들 탓이라고만 하진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숙제는 먹고, 입는 것을 스스로 해결해보는 것이었다. 길 위에서는 먹고, 자고, 씻고, 입는 본능적인 생존의 과제가 일과의 중심에 있다. 저절로 해결되던 일상이 사라지고 제 한 몸 건사하는 일이 하루의 주요 목표가 되었을 때, 아이들은 서로 돕는 경험을 한다. 같은 나이지만 제 삶을 해결하는 능력은 아이들마다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척척 손빨래를 하고, 양에 맞추어 장을 보고, 불이나 칼을 무서워하지 않고 각종 요리를 만들어내는 아이가 (드물게) 있는가 하면, 방 닦은 걸레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고 흔들며 “이거 어떻게 해요” 묻거나 난생 처음 과일을 깎아보겠다고 작은 과도를 쥔 채 벌벌 떠는 아이도 (흔히) 있다. 그건 지적 능력이나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오로지 가정의 문화, 경험의 차이다.
여행 와서 제 손으로 끼니를 해먹으며 “그동안 된장찌개에 뭐가 들어가는지도 몰랐다니 참, 인생 헛살았네요” 하던 한 중학생은 여행을 몇 주 만에 된장찌개의 풍미를 더하기 위해 논으로 달려가 우렁이를 건져오는 기지를 터득하기도 했다. 여행의 좋은 점은 예측하지 못한 삶에 던져졌을 때, 그 즉흥적인 상황에 의연히 대처하는 순발력과 유연함이 생긴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도 조금 해방될 수 있다. 길 위에서 스스로 서기 위해 아이들은 잘하는 것, 못하는 것의 빈틈을 메우며 서로의 지혜를 빌린다. 소비하지 않고 스스로 서는 삶은 서로를 기대게 한다.
관광과 여행의 차이
오늘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자본주의와 만나 최고의 돈줄로 작용하기도 한다. 새로운 것, 혹은 어떤 것의 다음 단계를 알고 싶어서 궁금하다면 가봐야 하고, 먹어봐야 하고, 경험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일 년에 두 번 긴 방학이 있는 교사들은 일반 직장인들에 비해 여행을 자주 떠나기 좋은 여건에 있다. 특히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대안학교 교사들은 더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 대안학교 교사들 사이에서 ‘소박한 삶’에 대해 논쟁이 붙은 적이 있다. 비싼 물건을 사는 것은 ‘대안적인 삶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은 괜찮은가에 대한 것이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삶은 누구나 꿈꾸는 인생이지만, 여행을 많이 하는 것이 정말 좋은 삶인지 한번쯤 돌아볼 일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내게 배낭 메고 돌아다니는 고생스러운 여행은 그만 하고 바닷가 휴양지 같은 데서 늘어지게 쉬다 오라고 권한 적이 있다. 그 조언을 받아 떠난 여행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났다. 나는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으나 현지인들의 서비스로 도배된 그 여행에서 내 정체성은 철저히 ‘소비자’였고, 타인의 불행 위에 내 삶이 얹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떠나는 자의 정체성이 ‘여행자’냐, ‘관광객’이냐에 따라 같은 풍경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된다. ‘빛을 본다’는 뜻의 관광은 소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좋은 풍경들을 본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문재 시인은 ‘여행이 온몸으로 하는 것이라면 관광은 두 눈으로 한다. 여행자가 현지인에게 반가운 손님이라면 관광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소비자일 따름’이라고 했다.
해외여행이 흔해지고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이다. 지금은 영유아기 때부터 비행기 타는 일이 흔해져서, 머리도 가누지 못 하는 아이의 목을 받치고 여권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가족끼리 떠나는 여행마저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의도가 앞서다보니 여행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낯선 곳에 가면 자꾸 싸운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다는 건 그만큼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뜻하므로. 그러나 기대를 가지고 떠난 여행지에서 싸우는 것은 집에서 싸우는 것보다 스트레스가 크다. “여기까지 와서!” 의견 하나 딱딱 못 맞춰주는 배우자에게 더 화가 나고, “여기까지 와서!” 날마다 보던 발밑의 개미나 들여다 보고 있는 아이에게 울화통이 터져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해외에 나가면 마음속에선 ‘비싼 돈 들여서 왔는데 나중에 기억 못하면 어쩌지’ 하는 조바심도 인다. 나중에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증거물로 보여주려고 가는 곳마다 인증샷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시간과 돈을 들여 많은 것을 보고 왔지만 몸에 쌓인 것은 피로고, 마음에 남은 것은 여행을 ‘다녀왔다’는 위안뿐이다.
여행은 일탈이지만 일상이기도 하다. 일상을 벗어난 그곳에서도 우리는 먹고, 자고, 만나며 삶을 ‘살아간다.’ 공간을 떠났다고 삶의 시계가 멈추지는 않는다. 그러니 떠나기 전에 기억해야 한다. ‘구경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 짧은 순간을 ‘살러’ 가는 것임을.
떠나지 않고 떠나기
현충일을 낀 이번 연휴에도 몇 만 명이 해외로 나간다고 떠들썩하다. 그만큼 여행이 일상화되었지만, 여전히 현실에는 떠나는 이보다는 떠나기를 꿈꾸며 살아가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여행은커녕 외식 한번 할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가족들, 어린아이를 가까스로 떼어 놓고 샤워를 오래오래 하는 것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대체하는 엄마들, 매달 생활비만 해도 빠듯한 통장 잔고를 보며 떠나고픈 마음을 접고 또 접는 사람들, 언젠가 떠날 것을 기약 없이 꿈꾸며 살아가는 현실 속의 많은 사람들.
어려운 형편에서도 부모들은 시간과 돈을 내어 ‘아이를 위해’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만, 많이 돌아다닌다고 견문이 넓어지는 건 아니다. 해외여행, 특히 경제수준이 한국보다 낮은 나라를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균형을 잘 잡지 않으면 어딜 가나 대접 받는 ‘소비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잘 사는 나라 국민으로서의 우월감을 느끼고 ‘갑을 관계’에 길들여져 돌아올 수도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이것저것 많이 찾아다니기보다는, 자기 삶의 범주 안에서 애정을 가지고 가까이 있지만 몰랐던 것들,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 또한 세상을 이해하고 삶을 배우는 데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에는 이런 시가 붙어 있다.
엄마, 토끼가 아픈가 봐요
쪽지 시험은 100점 받았어?
아까부터 재채기를 해요
숙제는 했니?
당근도 안 먹어요
일기부터 써라
_김미혜 <말이 안 통해>
이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같은 것을 바라보며 함께 공감해주는 엄마이지 더 넓은 세상이 아닐 것이다. 아이가 발견해낸 세상을 무시한 채 부모들이 원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어른들의 앞선 마음이다. 발름거리는 토끼의 콧잔등이 아프리카 초원보다 더 넓을 수도 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유연한 아이들은 정작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날마다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며 살아간다. 지도를 펼쳐 놓고 정글 탐험도 하고, 만화 속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도 떠나고, 그림을 그리며 우주 탐험도 한다. 공원에서 만난 나비 한 마리에게 서도 신세계를 만나고, 길고양이와도 우정을 나눈다. 권태롭고 불안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낯선 세계를 갈망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이다. 그러나 며칠 훌쩍 떠나는 여행이 잠시 위로는 될지언정, 돌아오면 오롯이 기다리고 있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 할 것이다.
종내는 삶에서 도망치지 않고, 삶을 껴안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할 줄 아는 자에게 삶의 아름다움이 머문다. 두 발 딛고 선 이곳에서 새로운 나와 이웃,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떠나지 않고도 날마다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장희숙(격월간 민들레 편집장)
너머의 것을 꿈꾸다
다른 포유류 새끼에 비해 인간의 유아기가 긴 것은 주변 환경에 대해 정보를 습득하고 자기 생각을 형성하는 데 온전히 집중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유아기에는 깨물고, 입에 넣고, 두들기다가 조금 더 크면 기고, 걷고, 뛰고 조금씩 행동반경을 넓혀가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채운다. 그러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제 발로 직접 세상을 만나고 싶어 한다.
청소년들이 친구들과의 여행에는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가족여행은 썩 내켜하지 않는 것은, 부모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는 대체로 간섭은 넘치고 모험의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떠나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위험을 스스로 감당해보고 싶어서다. 위험에는 스릴과 흥분, 그리고 성취감이 동반된다. 그러나 부모에게 ‘위험’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요소여서, 혼자 떼어놓기는커녕 함께하는 여행에서도 낯선 것이 보일 때마다 잔소리 강도가 한층 높아진다. 감시와 통제가 따르는 여행은 답답하고 따분하며 눈치가 보인다.
“친구와 여행을 가고 싶다”는 청소년이 있다면 위험하다고 반대할 것이 아니라, 그 위험을 스스로 책임져보고 싶어 하는 용기를 반갑게 여길 일이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대안학교 아이들은 방학이 되면 가방 하나 메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친구 집을 돌아다니거나, 마음 맞는 친구끼리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곤 한다. 가만히 지켜보면 아이들끼리 떠나는 여행이 어른들의 생각처럼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최근 몇 년 사이 주5일제, 자유학기제 등 학교 밖 체험의 기회가 늘어나며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겨났다. 주말에 예술체험을 할 수 있는 헤이리어린이예술 캠프나 토요자유학교, 혹은 도시 아이들이 농가를 찾아가는 ‘채식보따리학교’ 같은 곳도 있고, 지구촌인디고여행학교, 네팔불이평화원정대, 지구여행학교, 선재학교처럼 방학 때 청소년들과 해외로 떠나는 프로그램도 있다. 로드스꼴라나 양산창조학교처럼 아예 상설 여행학교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프로그램은 많지만 그래서 ‘어떤’ 경험을 선택할 것인가는 더 고민이 된다. 주로 집과 학교와 학원을 맴돌며 청소년기를 보내는 요즘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은 삶을 확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공간의 환기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청소년들 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새로운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평소엔 쉽사리 만나기 어렵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행으로서의 교육과정
대안학교에서 아이들과 여행을 떠나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 그리고 또 하나는 ‘스스로를 감당해보는’ 경험이었다. 먹고, 입고, 자는 생존의 요소를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삶의 과제를 소비적으로 해결해오던 아이들에게 ‘스스로 서보기’란 실로 낯선 경험이다.
제 뒷감당을 해보는 첫 번째 관문은 머물렀던 숙소를 처음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에는 콘도든, 민박이든, 마을회관이든 예외가 없다. 그러면 투덜거리며 꼭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있다. “우리 돈 주고 자는 거잖아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 이 습관적으로 ‘내가 얼마를 지불했는가’를 따진다. 도보순례 중 하룻밤 묵게 된 어느 마을회관에서 동네 이장님이 여행 중엔 잘 먹어야 한다며, 고기를 한 덩어리 끊어다주셨다. 그러자 한 아이가 옆에 와서 의아한 듯 속삭였다. “이거 상한 거예요? 왜 그냥 주세요? 돈이 얼만데….” 대가 없이 베푸는 선의를 낯설어하는 것이 아이들 탓이라고만 하진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숙제는 먹고, 입는 것을 스스로 해결해보는 것이었다. 길 위에서는 먹고, 자고, 씻고, 입는 본능적인 생존의 과제가 일과의 중심에 있다. 저절로 해결되던 일상이 사라지고 제 한 몸 건사하는 일이 하루의 주요 목표가 되었을 때, 아이들은 서로 돕는 경험을 한다. 같은 나이지만 제 삶을 해결하는 능력은 아이들마다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척척 손빨래를 하고, 양에 맞추어 장을 보고, 불이나 칼을 무서워하지 않고 각종 요리를 만들어내는 아이가 (드물게) 있는가 하면, 방 닦은 걸레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고 흔들며 “이거 어떻게 해요” 묻거나 난생 처음 과일을 깎아보겠다고 작은 과도를 쥔 채 벌벌 떠는 아이도 (흔히) 있다. 그건 지적 능력이나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오로지 가정의 문화, 경험의 차이다.
여행 와서 제 손으로 끼니를 해먹으며 “그동안 된장찌개에 뭐가 들어가는지도 몰랐다니 참, 인생 헛살았네요” 하던 한 중학생은 여행을 몇 주 만에 된장찌개의 풍미를 더하기 위해 논으로 달려가 우렁이를 건져오는 기지를 터득하기도 했다. 여행의 좋은 점은 예측하지 못한 삶에 던져졌을 때, 그 즉흥적인 상황에 의연히 대처하는 순발력과 유연함이 생긴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도 조금 해방될 수 있다. 길 위에서 스스로 서기 위해 아이들은 잘하는 것, 못하는 것의 빈틈을 메우며 서로의 지혜를 빌린다. 소비하지 않고 스스로 서는 삶은 서로를 기대게 한다.
관광과 여행의 차이
오늘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자본주의와 만나 최고의 돈줄로 작용하기도 한다. 새로운 것, 혹은 어떤 것의 다음 단계를 알고 싶어서 궁금하다면 가봐야 하고, 먹어봐야 하고, 경험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일 년에 두 번 긴 방학이 있는 교사들은 일반 직장인들에 비해 여행을 자주 떠나기 좋은 여건에 있다. 특히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대안학교 교사들은 더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 대안학교 교사들 사이에서 ‘소박한 삶’에 대해 논쟁이 붙은 적이 있다. 비싼 물건을 사는 것은 ‘대안적인 삶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은 괜찮은가에 대한 것이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삶은 누구나 꿈꾸는 인생이지만, 여행을 많이 하는 것이 정말 좋은 삶인지 한번쯤 돌아볼 일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내게 배낭 메고 돌아다니는 고생스러운 여행은 그만 하고 바닷가 휴양지 같은 데서 늘어지게 쉬다 오라고 권한 적이 있다. 그 조언을 받아 떠난 여행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났다. 나는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으나 현지인들의 서비스로 도배된 그 여행에서 내 정체성은 철저히 ‘소비자’였고, 타인의 불행 위에 내 삶이 얹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떠나는 자의 정체성이 ‘여행자’냐, ‘관광객’이냐에 따라 같은 풍경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된다. ‘빛을 본다’는 뜻의 관광은 소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좋은 풍경들을 본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문재 시인은 ‘여행이 온몸으로 하는 것이라면 관광은 두 눈으로 한다. 여행자가 현지인에게 반가운 손님이라면 관광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소비자일 따름’이라고 했다.
해외여행이 흔해지고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이다. 지금은 영유아기 때부터 비행기 타는 일이 흔해져서, 머리도 가누지 못 하는 아이의 목을 받치고 여권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가족끼리 떠나는 여행마저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의도가 앞서다보니 여행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낯선 곳에 가면 자꾸 싸운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다는 건 그만큼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뜻하므로. 그러나 기대를 가지고 떠난 여행지에서 싸우는 것은 집에서 싸우는 것보다 스트레스가 크다. “여기까지 와서!” 의견 하나 딱딱 못 맞춰주는 배우자에게 더 화가 나고, “여기까지 와서!” 날마다 보던 발밑의 개미나 들여다 보고 있는 아이에게 울화통이 터져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해외에 나가면 마음속에선 ‘비싼 돈 들여서 왔는데 나중에 기억 못하면 어쩌지’ 하는 조바심도 인다. 나중에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증거물로 보여주려고 가는 곳마다 인증샷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시간과 돈을 들여 많은 것을 보고 왔지만 몸에 쌓인 것은 피로고, 마음에 남은 것은 여행을 ‘다녀왔다’는 위안뿐이다.
여행은 일탈이지만 일상이기도 하다. 일상을 벗어난 그곳에서도 우리는 먹고, 자고, 만나며 삶을 ‘살아간다.’ 공간을 떠났다고 삶의 시계가 멈추지는 않는다. 그러니 떠나기 전에 기억해야 한다. ‘구경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 짧은 순간을 ‘살러’ 가는 것임을.
떠나지 않고 떠나기
현충일을 낀 이번 연휴에도 몇 만 명이 해외로 나간다고 떠들썩하다. 그만큼 여행이 일상화되었지만, 여전히 현실에는 떠나는 이보다는 떠나기를 꿈꾸며 살아가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여행은커녕 외식 한번 할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가족들, 어린아이를 가까스로 떼어 놓고 샤워를 오래오래 하는 것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대체하는 엄마들, 매달 생활비만 해도 빠듯한 통장 잔고를 보며 떠나고픈 마음을 접고 또 접는 사람들, 언젠가 떠날 것을 기약 없이 꿈꾸며 살아가는 현실 속의 많은 사람들.
어려운 형편에서도 부모들은 시간과 돈을 내어 ‘아이를 위해’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만, 많이 돌아다닌다고 견문이 넓어지는 건 아니다. 해외여행, 특히 경제수준이 한국보다 낮은 나라를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균형을 잘 잡지 않으면 어딜 가나 대접 받는 ‘소비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잘 사는 나라 국민으로서의 우월감을 느끼고 ‘갑을 관계’에 길들여져 돌아올 수도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이것저것 많이 찾아다니기보다는, 자기 삶의 범주 안에서 애정을 가지고 가까이 있지만 몰랐던 것들,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 또한 세상을 이해하고 삶을 배우는 데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에는 이런 시가 붙어 있다.
엄마, 토끼가 아픈가 봐요
쪽지 시험은 100점 받았어?
아까부터 재채기를 해요
숙제는 했니?
당근도 안 먹어요
일기부터 써라
_김미혜 <말이 안 통해>
이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같은 것을 바라보며 함께 공감해주는 엄마이지 더 넓은 세상이 아닐 것이다. 아이가 발견해낸 세상을 무시한 채 부모들이 원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어른들의 앞선 마음이다. 발름거리는 토끼의 콧잔등이 아프리카 초원보다 더 넓을 수도 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유연한 아이들은 정작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날마다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며 살아간다. 지도를 펼쳐 놓고 정글 탐험도 하고, 만화 속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도 떠나고, 그림을 그리며 우주 탐험도 한다. 공원에서 만난 나비 한 마리에게 서도 신세계를 만나고, 길고양이와도 우정을 나눈다. 권태롭고 불안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낯선 세계를 갈망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이다. 그러나 며칠 훌쩍 떠나는 여행이 잠시 위로는 될지언정, 돌아오면 오롯이 기다리고 있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 할 것이다.
종내는 삶에서 도망치지 않고, 삶을 껴안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할 줄 아는 자에게 삶의 아름다움이 머문다. 두 발 딛고 선 이곳에서 새로운 나와 이웃,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떠나지 않고도 날마다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장희숙(격월간 민들레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