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말, 글 그리고 문해력

민들레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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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어(口語)와 문어(文語)

 

말과 글을 뜻하는 한자어 언문(言文)은 ‘언어’라는 근대식 어휘가 도입된 뒤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언어(言語)’는 근대 일본 학자들이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제창한 랑그-빠롤 개념에서 ‘랑그’를 번역한 말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어언(語言, 위옌)’이라 번역했다. 언(言)도 어(語)도 말을 뜻하는 한자어인데 ‘언어’는 글까지 아우르는 낱말이 되었다. 입말, 글말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우리말 ‘말’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글까지 아우른다.

글자(문자)는 말을 표기하는 방편으로 발명된 것으로 말의 자식인 셈이니, 글도 말의 한 가지라 할 수 있다. 자식을 통해 부모의 유전자가 전해지듯이 문자 덕분에 말은 사라지지 않고 대대손손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말과 글은 인간을 동물의 영장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꿀벌 같은 동물도 몸짓으로 약간의 의사소통을 하지만 언어를 쓰는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인간사회의 상호작용이 복잡해지고 확대되면서 언어 또한 더욱 정교하고 풍성해지고 있다.

문자가 등장한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문자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말은 누구나 하게 되는 것인 반면 글은 예로부터 엘리트 집단의 전유물이었다. 대중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글 또한 모든 사람들이 다룰 수 있게 되었지만, 말에 비해 글은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한글의 경우 말처럼 혼자서 깨치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누군가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게 된다. 글자를 아는 수준을 넘어 글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글로써 소통을 잘 하려면 문장을 조리 있게 쓸 줄 알아야 한다. 먼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 자신의 생각이 분명해야 하고, 그것을 쉽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듯이 쓰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하지만, 글이 꼭 입말과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낱말은 전체 어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낱말만으로 글을 써야 한다면 표현에 상당한 제약이 따를 것이다. 글의 성격에 따라서는 낱말을 조합하는 문장 형식도 말과 다를 수 있다.

언어의 문제와 문체의 문제는 별개로 봐야 한다. 생활글이 아닌 논리적인 글의 문체는 문어체가 더 적절한 경우가 많고, 글마다 문체가 다를 수도 있다. 글은 말과 달리 억양이나 목소리의 느낌을 살릴 수 없기에 그 나름으로 표현기법을 발달시킨 것이 문체다. 말투와 음성에 저마다의 색깔이 있듯이 글도 쓰는 사람에 따라, 또 그 내용에 따라 저마다 다른 형식과 색깔을 띤다. 말의 내용보다 말투나 음성의 높낮이가 더 중요할 수 있듯이 글도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이오덕 선생이 강조한 살아 있는 글쓰기의 기본 원칙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그 한계도 있다고 본다. 그중 하나가 문체의 중요성을 간과한 점이 아닌가 싶다. 글쓰기연구회 회원들이 쓴 글을 보면 비슷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그중에 문체의 개성이 드러나는 글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또 다른 획일성의 위험이 느껴진다. 문인들이 글쓰기연구회에 잘 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함석헌 선생의 글은 입말체가 아니지만 놀라운 힘과 긴장미를 지니고 있다. 말과 일치된 문자로 글을 쓰더라도 글은 말과 달리 그 고유한 형식을 가질 수 있고, 좋은 글은 그래야 한다. 글을 읽기 쉽게 써야 한다거나 글말보다 입말을 우선시하는 관점에는 동의하지만, 형식의 중요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말처럼 메시지를 전하는 형식에 따라 메시지가 달리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음식도 담긴 그릇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사실 모든 문학은 형식의 산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짓는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삶에서 우러난 글이라고 다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이 받쳐주지 않을 때 글은 그저 글자의 조합에 지나지 않거나 밋밋한 글이 되고 만다. 살아 있는 글쓰기의 예로 드는 아이들 시 가운데 그런 것들이 많다. 산문을 시 형식을 빌어 표현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 시의 형식을 갖추었다 보기도 어렵다. 시적인 긴장미, 운율 같은 형식미 없이 단지 산문을 짧게 행갈이만 했을 뿐인 글이 많다.

또 관념에 기초한 글이라고 해서 다 나쁜 글은 아니다. 관념이 아닌 삶에 뿌리를 둔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도그마가 되면 그것도 위험하다. 관념에 기초한 글도 삶을 통찰하는 힘을 가질 수 있고, 철학서를 비롯한 많은 책들이 그렇다. 어설픈 관념이 아니라 삶과 우주의 비밀을 꿰뚫는 관념은 입말체로 표현하기에 한계가 있다.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말이 갖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신심명> 같은 경전은 쉬운 언어로 깊은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지만, 복잡한 현상을 분석하고 표현하려면 복잡한 언어가 필요하다. 수학적 언어를 보면 문어의 필요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셈은 구어로도 가능하나 수학은 문자와 기호를 필요로 한다. 하나둘셋넷이 구어라면, 일이삼사는 문어, 1234는 기호다. 셈도 복잡한 것은 기호로 표현된다. 허수 i라는 기호 문자 덕분에 수의 세계가 극적으로 확장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려면 구어로는 불가능하다. 허수, 복소수라는 새로운 낱말이 필요하고, 새로운 수식이 필요하다. 문자와 기호 없이는 수학적 사유가 발달할 수 없다.

일상적으로 쓰는 구어는 어떤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다. 벌이 다른 벌들에게 꽃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8자 춤을 추듯이 실용적인 목적을 띠고 있는 언어가 구어다. 반면에 문어는 사유를 위한 언어다. 때문에 입말을 살리는 것과 글말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다 필요하다.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듯이 구어만으로 살 수는 없다. 실용의 세계에 머물러서는 사유가 깊어지지 않는다.

구어 위주로 생활하다 보면 일상에서 쓰이는 어휘만 접하게 되면서 언어의 해상도가 떨어진다. 개념어를 정확히 모르면 맥락을 파악하는 힘이 떨어지고 깊이 있는 책을 읽어내지 못하게 된다. 책을 읽지 않으면서 점점 어휘력이 빈약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빈약한 어휘로는 개인의 다양한 감정과 상황을 표현하기 힘들 뿐더러 복잡한 사회 현상을 분석할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이 학술어를 익히거나 문어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지만, 문학이나 학문에 소질을 보이는 아이들은 그 언어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줄 필요가 있다.


읽기와 문해력

 

말 전하기 놀이를 해보면 몇 사람을 거치지 않아 말이 다르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복잡한 말일수록 더 그렇다. 글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글도 독자들마다 다르게 읽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주목을 끌지 못한 대목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바꿔놓는 구절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구절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말이나 글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읽히는 까닭은 모두가 자신의 과거를 짊어지고 커뮤니케이션 장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나의 문해력은 나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위에 구축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만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셈이다. 내게는 붉게 보이는 색깔이 누군가의 망막에는 노란색으로 비칠 수도 있다. 우치다 타츠루가 ‘오염’이라는 표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맥락이 통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완전히 무구하고 투명한 독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설령 존재한다 해도 그러한 독자는 텍스트를 하나의 글자로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문해력이란 독자의 경험을 말하며, 실제의 인생을 말하고, 곧 ‘더럽혀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여러 가지 요소들이 우리의 리터러시 형성에 참여하고 있다. 인종, 성차, 계급, 신앙, 정치적 입장, 국적, 직업, 연봉, 지능, 가정환경, 병력, 성적 기벽 등 다양한 요소들이 우리의 읽기에 관여한다. 그중에 한 가지만이 결정적인 요소이고 나머지는 논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단언하려면 상당한 오만과 둔감함이 필요할 것이다. 여러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읽기에는 가압되어 있고, 그 편견이 가하는 압력의 강약이나 농담(濃淡)은 사람마다 다르다. _우치다 타츠루, 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김석중 옮김, 서커스, 137-138 pp

 

나를 조건 짓는 것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고 그 위에서 나의 삶이 펼쳐지고 있다. 읽기만이 아니라 듣기와 말하기, 쓰기 또한 그 ‘더럽혀짐’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해의 가능성은 동시에 오해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오해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투명한 소통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해의 여지가 열려 있기에 이해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문해력은 곧 맥락을 읽어내는 힘이다. 말이나 글 자체의 맥락도 있지만 화자와 청자, 저자와 독자 사이의 맥락도 있다. 그래서 한 편의 시는 그 시를 읽는 모든 사람에게 다른 시가 된다. 고전의 경우 한 시대가 갖고 있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읽히기도 한다. 하나의 경전에 수많은 주석본이 가능한 까닭이다. 읽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에 수학적 명제와 정리는 명확한 정의 속에서 투명하게 표현된다. 오해의 여지가 없는 투명한 명제는 발신자나 수신자가 없이도 홀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직선도 직각삼각형도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은 곧 언어다. 직선, 직각삼각형이라는 언어가 수학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자연을 관찰하는 과학자는 자연이 수학의 언어와 부합하는지를 확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가 자연보다 앞선다고도 말할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복음서 첫 구절은 이러한 우주의 비밀을 전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수학적 명제와 달리 사람의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생성된다.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수신자가 있기 때문이다. 혼잣말도 자기 자신을 수신자로 상정한 말이다. 곧 자신이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다. 모든 메시지는 수신자가 그것을 자신을 향한 메시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메시지가 된다. 신의 말, 절대적 타자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사랑의 세계는 타자의 말이 들리는 세계다.

우리는 오염된 상태로 듣기와 읽기에 참여하지만,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 한 발을 내딛는 시도를 끊임없이 함으로써 일일우일신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듣기와 읽기는 종교적 경험과도 통한다. 문해력은 달리 말해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힘이다. 그럴 때 제대로 된 발신도 가능하다. 들을 수 없으면 말을 할 수 없듯이, 글을 읽을 줄 모르면 글을 쓰지 못한다. 듣기와 말하기, 읽기와 쓰기는 연결되어 있다. 말하기와 쓰기에 앞서 듣기와 읽기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듣기가 시간적 경험이라면 읽기는 공간적 경험이다. 말은 발화되는 순간부터 시간과 함께 흐르면서 맥락을 만들어간다. 처음 발화된 말은 발화된 그 순간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발화된 말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확정된다. 청자는 화자의 말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맥락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말의 의미를 조합해낸다. 반면에 읽기의 경우는 지금 여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텍스트 위를 독자가 종횡무진 오가면서 의미를 조합해낸다. 듣기가 시간 여행이라면 읽기는 공간 여행인 셈이다. 듣기가 귀납식으로 의미에 다가간다면 읽기는 연역식으로 다가간다.

뉴스를 듣는 것과 종이신문을 보는 것, 스마트폰으로 보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종이신문을 볼 때 우리는 전체를 스윽 훑어보면서 그 중에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나 제목에 눈길이 멈추면 그제서야 기사를 읽기 시작한다. 스캐닝 다음에 리딩이 시작된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진행하는 연역식 읽기가 자동으로 된다. 때로는 1면 톱기사부터 읽기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때도 제목과 사진, 기사 전체를 한눈에 스캔한 다음 작은 글자로 된 기사를 읽는다. 디지털 매체는 종이매체에 비해 스캐닝이 힘들다. 화면 자체가 작기 때문에 스크롤을 해도 전체를 한눈에 보기가 쉽지 않다.

종이신문을 읽을 때는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정보도 눈에 들어온다. 애써 읽으려 하지 않아도 제목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사진이 시선을 끈다. 나의 알고리즘이 아닌 다른 알고리즘이 작동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넓다. 디지털 신문의 경우 주요 뉴스 제목을 통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도 있지만 종이신문에 비해 그 기능은 훨씬 떨어진다. 유튜브 같은 동영상 매체의 경우는 그 가능성이 더욱 좁아진다. 비슷한 정보를 자동으로 검색해서 보여주는 알고리즘 덕분에 자기가 보고 싶은 기사만 보게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

필터링 검색 알고리즘은 우리 뇌에 장착되어 있는 알고리즘을 흉내낸 것이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은 개도 사람도 자기 알고리즘의 한계 안에서 인식한다는 말이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먼저 인식하는 자동 알고리즘이 장착되어 있다. 듣기와 읽기의 메커니즘 역시 이러한 알고리즘에 기반하여 작동한다. 그 알고리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배움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익숙한 세계로부터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을 내딛는 ‘비약’ 또는 ‘비상’이 없다면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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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의 철학적 언어였던 그리스어로 쓰여진 요한복음서에서 ‘말씀’에 해당하는 ‘logos’는 ‘말’이자 이성적 원리, 법칙, 진리를 의미하는 낱말이다. 중국어 성경에서는 이를 ‘도道’라 번역했는데, ‘도’에는 ‘말’이라는 의미가 없다. 도덕경에서 “도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했을 때의 말이 일상적인 말이라면, logos는 말을 존재하게 하는 말, 언어의 법칙 같은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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