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인성교육, 가능할까?

민들레
2020-06-16
조회수 1259

우리는 몰라서 선을 행하지 않는 걸까?

몇 주 전, 취재하러 가는 길이었다. 처음 찾아가는 곳이라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이 잘 안 되었다. 늦을까봐 종종걸음을 치다가 전철에서 내려서야 ‘딱 맞게 도착했구나’ 한숨 돌리며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역한 냄새에 흠칫 걸음을 멈췄다. 화장실 바닥엔 가방 하나가 내팽개쳐져 있고, 주변에는 오물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흔적을 따라가 보니 채 닫지 못한 문틈으로 할머니 한 분이 비틀거리며 바지를 벗고 계신 것이 보였다. 거동이 느리신 것으로 보아 급한 설사에 미처 몸이 따라주지 못해 벌어진 일인 듯했다. 비좁은 화장실 안에서 바지를 반쯤 내린 채 끙끙대고 계신 할머니에겐 분명 도움이 필요했으나, 할머니의 몸이며 화장실 바닥까지 오물범벅이 된 그 상황을 수습하려면 누구든 자기 몸에 변을 묻혀야 했다. 

 어려운 이를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과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재빠르게 뒤엉켜 주춤하는 순간, 누가 연락을 했는지 지하철 여성 역무원이 무전기를 들고 나타났다. “도움 필요한 분 어디 계세요?” 하는 말에 나는 얼른 “저기요!” 하고 할머니가 계신 화장실 칸을 가리키며 그로써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어려움에 처한 할머니를 돌봐줄 책임감 있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이제 나는 망설임 없이 빠져도 되었다. ‘일이십 분으로 될 일이 아닌데, 공적인 일에 늦으면 안 되잖아’, ‘일정도 많은데 하루 종일 악취를 풍기며 돌아다닐 순 없잖아’ 온갖 대의적인 핑계거리로 선뜻 돕지 못한 자신을 합리화하며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며칠 동안 자꾸만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맴돌았다. 여러 변수를 대입해가며 다시 그 상황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약속시간에 쫓기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때 역무원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댈 수 있는 모든 핑계거리가 사라졌더라면 과연 나는 맨손에 변을 묻혀가며 할머니를 도왔을까. 소록도 같은 데선 비닐장갑을 척 끼고 “아이고, 할매 시원하시겠네” 하며 능청스럽게 똥 기저귀를 갈던 내가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눈앞에 두고 왜 뒷걸음쳤을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했던 다른 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번만이 아니었던 거다. 

 프랑스의 심리학자 로랑 베그의 말을 빌면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도덕성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남을 돕는 것도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달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골라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눈치껏 움직이는 정도였으면서 스스로 제법 도덕적 인간인 양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며칠 동안 이 일을 곱씹으며 깨닫게 되었다. 인간이 선을 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 선인지 몰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감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

회의에 참석했던 국회의원 199명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지난 7월 21일 시행령이 내려진 (세계 최초의) 인성교육진흥법은 2012년 대구에서 학교폭력을 당한 중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입법 동기가 되었다.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국민을 육성하여 국가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인성교육진흥법 1조) 만들어졌다는 이 법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승객을 버리고 먼저 탈출한 이준석 선장의 ‘부도덕함’을 개탄하며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어 ‘이준석 방지법’으로도 불린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80년대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보는 듯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국민을 육성하기 위함’이라는 표현에서도 수상한 기운이 감돌지만, 이 사회의 총체적 난국을 내포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이준석 선장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자신들에게 셀프 면죄부를 발급하려는 꼼수도 들여다보인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사람의 사람답지 못함’을 확인한 것이 어찌 이준석 선장뿐이란 말인가. (나를 포함한) 우리가 아이들에게 ‘인성’ 운운할 자격이나 있는 사람들인가. 아니, 그보다 ‘사람의 성품’이란 것이 ‘법’으로 ‘교육’될 수 있는 것일까.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식으로 서울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의 일이다. 추모식이 끝난 후 사람들은 광화문 분향소로 가서 헌화를 하려고 했으나 철옹성같이 에워싸고 최루액과 물대포를 쏘아대는 경찰 병력에 막혀 제각기 흩어지고 말았다. 걸어서 10분이면 갈 거리를 돌고 돌아 쫓고 쫓기며  3시간 반 만에 도착했더니, 새벽 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문을 포기하고 돌아간 상태여서 주변은 어둡고 고요했다. 분향소가 빤히 보이는 바로 앞에서도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경찰들과 한참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하며 돌아보니, 교복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껴입고 머리엔 담요를 뒤집어쓴 여학생 네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때 아닌 4월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아저씨, 저희요. 언니, 오빠들한테 꽃 주려고 학교 땡땡이 치고 왔어요. 쫌 보내주세요” 한다. 중학교 2학년이라고 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어른들이 “우리는 안 들어갈 테니 이 아이들만 좀 보내주자”고 부탁했지만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란 명령이 있었”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경찰에게 그런 사정이 먹힐 리 없었다. 안타까워 발을 구르는 아이들에게 왜 저길 그토록 가고 싶으냐고 묻자, 한 아이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니, 오빠들 불쌍하잖아요.” 

 울컥했다. 그래, 그거면 되는데, 가엾은 마음, 측은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 304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애도하는 것에 그것 말고 더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니. 아이와 나는 코끝이 빨개져서 함께 울먹였다. 

왜 추모를 막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시무룩해져서 돌아서는 아이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결국 긴 담벼락처럼 줄지어 선 경찰버스 밑을 엉금엉금 통과해 분향소에 들어가 한 송이 꽃을 바치며, 죽은 자에 대한 애도조차 허락지 않는 이 사회의 비정함에 가슴이 먹먹했다. 최루액이 눈에 들어갔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당황하며 따가운 눈물을 흘리던 고등학생들도 생각났다. 끝내 망자에게 슬픔을 전하지 못한 저 아이들, 공권력에 가로막혀 울며 돌아간 저 많은 아이들은 오늘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인성교육진흥법이 시행된다는 소식을 들으니 대번에 그날의 장면이 다시 떠오르며, ‘애도와 연민’이라는 아이들의 소중한 감정도 짓밟아버리면서 도대체 무슨 인성교육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화부터 치밀었다. 이 사회가 말하는 ‘교육’이란 게 무엇일까 깊은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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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유가족들이 광화문에서 단식을 할 때 동참했던 한 고등학생은 슬퍼할 시간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 이 야만적인 사회에서, 세상이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민들레』 98호, ‘봄날, 학교, 그리고 너’, 양지혜). 누군가의 눈물로 자신의 삶이 지탱되는 것에 대한 미안함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밀양 송전탑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살고 있는 청년도 화나고 슬프고 때론 벅차오르는 기쁨이 없는 공부는 공부가 아니라고, 제발 아이들의 감정을 억누르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민들레』 99호, ‘할매 할배와 밀양을 살며’, 남어진). 그들의 이야기가 모두 인간다움을 되찾고 싶다는 절절한 몸부림으로 들려서 그 원고들을 읽으며 가슴이 아팠다. 

인간 본연의 성품이란 것이 의도적으로 교육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스럽지만 인성교육을 ‘사람다운 길을 찾는 공부’라 정의한다면 살아 있는 생명체로 서로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 그게 사람다움의 시작이 아닐까. 지금의 교육은 인간다움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본래 지닌 인간다움마저 싹 뭉개버리는 듯하다.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아이들의 싹수를 아예 잘라,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로 만들려는 속셈은 아닌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인간의 선행과 악행은 사회성에 근원한다

 언젠가 뉴스에서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하는 장면이 보도되었다. 경찰이 초등학교 강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나쁜 짓을 한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소년을 ○○소년이라고 합니다. 빈 칸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요?” 하는 문제에 ‘비행’이라는 답을 맞힌 정답자는 환호하고, 틀린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뒷자리로 물러났다. 학교마다 우승자를 뽑아 왕중왕전을 펼치고, 거기서 또 최고로 뽑히면 거한 포상이 주어지는 ‘범죄 예방 골든벨’이라는 이 프로그램이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모범 교육사례로 주목받고 있었다. 성적 경쟁과 똑 닮은 이런 경쟁식 퀴즈쇼가 정말 학교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정답을 못 맞힌 아이들은 패배자가 되어 정답자의 활약을 구경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자랑스럽게 꽃다발을 목에 거는 그 대회가 오히려 아이들을 더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지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걱정되는 것은 전면 시행되는 인성교육법을 구구절절 뜯어봐도 다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 선인지 몰라서가 아니니, 덩달아 의무적으로 연간 4시간 인성교육을 받아야 하고 일거리만 잔뜩 늘어난 교사들에게나 자기의 인성이 생활기록부에 반영되는 아이들에게 이 형식적인 교육과정이 어떻게 다가갈지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인간답다’ 혹은 ‘그렇지 못하다’ 확연히 느끼게 되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혼자 있을 때는 잘 알기가 어렵다. 게다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강렬한 욕구는 대부분 깊숙한 인간 관계 속에 있을 때 생겨난다. “아,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의 모방 심리가 아이돌 가수를 볼 때만 생기는 건 아니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첫 번째 동기는 ‘인간의 사회성’에 근원한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화장실에서도 남이 볼 때 손을 씻을 확률이 높고, 조깅을 할 때도 남이 보고 있으면 더 열심히 뛰며, 누군가 도움을 청했을 때 이타적인 행위를 할 확률도 다른 이가 보고 있을 때 더 높아진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다운 사람을 많이 만나게 하는 것만큼 좋은 인성교육은 없을 것이다. 학교라는 틀 안에서 형식적 교육과정으로 ‘사람됨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 가능할까 자꾸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은 교과과정과 삶이 비교적 맞닿아있는 대안학교에서마저 실로 서로의 사람다움을 발견한 것은 주로 교실 밖이었던 경험 때문이다. 이를테면 폭우가 쏟아지는 날, 케첩으로 하트를 그린 식빵을 접시에 담아 어디론가 바삐 가는 아이들에게   “어딜 가니?” 묻자 “시설 샘이 비 맞으며 지붕을 고치고 계셔서 이것 좀 갖다 드리려고요” 할 때, 혼자 계신 동네 어르신들께 반찬을 해드리겠다고 모여서는 맨날 드시는 나물무침을 좋아하실 거다, 아니다 안 드셔본 미트볼을 좋아하실 거다 실랑이할 때, 그런 순간들은 대부분 수업 바깥에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의도적인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변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가는 속에 아이들 스스로 진짜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하고 느꼈다.



사람에 비추어

 인성교육진흥법에 대한 소문이 돌 때부터 이미 인성교육 지도자 과정이 비전 있는 취업문으로 각광받기 시작했고, 인성교육과 관련된 DVD나 교구를 파는 쇼핑몰이 생겨나며 사교육 시장마저 들썩이고 있는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미 던져진 주사위 앞에서 ‘이런 부질없는 법조항일랑 다 집어치우라’고 대책 없는 비판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답답하다.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고 타인·공동체·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기 위함’(인성교육진흥법 2조)이라는 게 인성교육진흥법의 진짜 이유라면 강당에 모아놓고 충효니 예절이니, 삶에 와 닿지도 않는 내용을 주입할 그 시간에 아이들에게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길 바란다. 아이들의 인성을 염려한다면 자원봉사마저 점수 따는 수단으로 만들고,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를 상·벌점으로 규제하려는 그 억압적인 교육 방식부터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교육은 뭘 하려고 들 게 아니라, 뭘 하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게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상황이다.

 인성교육에서 내세우고 있는 존중, 배려, 소통, 협동 같은 핵심가치들을 분절적으로 떼어내어 억지스런 ‘옥상옥’을 만들 것이 아니라 이미 하고 있는 교육에서 아이들 삶과 제대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중학교 자유학기제나 고교 자유학년제도 시도되고 있고, 세월호 이후 수학여행도 단체여행을 벗어나 작은 단위의 의미 있는 체험학습으로 개선되고 있다. 혁신학교들에선 지역 속의 학교를 만들어가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런 노력을 인성교육과 연결해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눈앞에 맞닥뜨린 ‘인성교육진흥법’의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까. 이렇게라도 조금씩 배움의 울타리를 넓히고 학교와 세상 사이를 가로막은 담장을 낮춰서 아이들에게 더 많은 사람과 삶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랄 뿐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본보기가 될, 혹은 반면교사 삼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지지고 볶으며 ‘사람에 비추어’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고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속에서 조금씩 ‘자기다움’과 ‘인간다움’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인성’이 ‘교육’될 수 있는 거라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타자’야말로 사람이 사람다움을 배울 수 있는 근원이자, 가장 좋은 스승일 것이다.


장희숙(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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