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교육을 혁신하기 전에 생각해볼 점


종교만큼이나 역사가 오랜 교육제도는 타성이 강한 제도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 어떤 사회, 어떤 시대나 존재하기 마련인 종교와 교육, 의료와 사법제도의 공통점은 인간의 보편성에 기반한 것으로 그만큼 제도의 뿌리가 깊고 넓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혁신이 쉽지 않을뿐더러, 그것의 본질은 혁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료기술이 발달해도 치유의 본질은 인체의 자연치유력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산업화된 현대의술이 증상을 치료하지만, 치유는 또 다른 과정이다. 

인간의 성장을 도모하는 교육제도 또한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이 성장하는 원리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구조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해서 거기에 발맞춰 교육 방식을 혁신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정보사회, 소비사회가 되었다고 교육을 거기에 맞추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소비자의 선택에 맡기듯이 학생(학부모)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까? 교육 혁신을 주장하기 전에 되물어봐야 할 질문이다.

조지프 슘페터가 기업의 혁신으로 꼽는 5가지가 있다. 새로운 제품 생산, 새로운 생산 방법 도입, 새로운 조직 구현, 새로운 판매처 개척, 새로운 구입처 개척이다. 생산과 판매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면 기업은 성장하기 마련이다. 교육을 학력이 우수한 아이들을 길러내어(인재를 생산해) 사회에 내보내는(판매하는) 관점으로 본다면 기업의 혁신 원리를 학교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첨단 기자재를 활용해 지식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수한다면 더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고 혁신이 일어날까?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학교였던 알트스쿨의 실패담은 교육에서의 혁신이 기업의 혁신과 어떻게 다른지를 말해준다. 페이스북 등 IT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첨단 기자재를 도입하고 유능한 교사들을 투입했지만 결과는 학습부진아의 양산이었다. 등하교를 아이들 자율에 맡기고, 학습할 내용을 아이들이 선택하게 한 것은 사실상 교육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출퇴근을 자율에 맡긴 벤처기업이 성공하기 힘든 것은 동료들 간의 상호작용과 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5년이 지나지 않아 알트스쿨 9개 중 5개는 폐교되고, 4개는 다른 학교에 흡수되었다.

기업의 주요 목표가 수익을 내어 재투자를 함으로써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있다면, 학교의 목적은 학교의 성장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이다. 비리를 저지르는 사학재단들처럼 학교를 성장시키기 위해, 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교육자가 아니라 교육사업가들이다. 그 속에서도 아이들의 성장은 일어나겠지만, 그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또는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아이들과 교사가 모여 있기만 해도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자율성과 경험교육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교사의 역할, 지식교육의 필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기초학력은 모든 배움의 토대다. 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읽기와 수학, 과학 영역의 성취도를 평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초학력 없이는 다음 단계의 학습도, 토론도 이루어지기 힘들다. 혁신교육이 성공하려면 표준화교육의 강점을 살려 기초학력을 다진 위에 개별성을 살리는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학습결손이나 학습장애를 겪는 아이들에게는 일찍부터 개별화 교육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교육의 방향은 표준화교육과 기초학습을 기본값으로 하고 그 위에 개별성과 다양성을 가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교육은 삶과 마찬가지로 복잡계다. 학교는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아이들의 성장이 일어나는 곳이다. 성장시키고자 한다고 성장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인풋에 따라 아웃풋이 결정될 거라는 단선적 사고는 교육에서 언제나 배반당해왔다. 권위적인 교육이 반드시 체제순응형 인간을 길러내지도 않는다. 영국의 권위적인 청교도 문화 속에서 민주주의 정신이 꽃을 피운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는 유신시대의 억압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가 민주화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반면에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오히려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물리세계에서처럼 정신세계에서도 반작용의 힘이 작용한다.

교육은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기계가 아님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삶과 동떨어진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학교와 지역사회를 연결하려는 움직임은 바람직하지만, 학교 또한 삶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과 교사들이 낮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는 배움터이면서 동시에 삶터이자 일터이기도 하다. 학교를 삶터와 동떨어진 공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교육 문제의 해법을 자꾸만 학교 바깥에서 찾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삶과 교육을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혁신교육과 더불어 오늘날 마을공동체교육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삶의 교육’을 지향한다고 해서 학교가 아닌 마을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전주 완산고등학교 교사 박제원은 이렇게 말한다. “마을과 연계하지 않으면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미신이 교육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현실은 누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 혁신학교든 아니든 학교는 학습의 중심지이며, 학교의 역량 역시 학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주위를 자꾸 기웃거리게 되면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

학교 본연의 역할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마을공동체교육에 대한 환상을 경계하자는 말이다. 학교와 지역사회의 벽을 허물면서 인턴십을 비롯한 경험 중심의 교육과정을 고등학교 과정에 성공적으로 도입한 메트스쿨이 미국 공교육의 개혁 모델로 주목받으면서 한국에도 활발히 소개되었지만, 영국의 리치아카데미는 전통적인 지식 위주의 교육으로 메트스쿨 못지않게 학생들의 학력을 높이는 데 성공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사중심의 강의식 수업이 학생중심의 플립러닝**보다 못한 학습방식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리치아카데미 역시 메트스쿨처럼 중하위층이 사는 지역에 있는 학교다. 혁신이라는 것이 반드시 새로운 뭔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  박제원, 혁신학교가 혁신교육의 메카가 되려면, 《교육, 제4의 길》, 교육을바꾸는사람들, 2021.01.06.

**  ‘거꾸로 교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 과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미리 내준 학습자료로 집에서 공부를 하고 학교에 와서 실습과 과제를 하는 방식이다. 교실에서 학생 중심의 수업이 가능한 장점이 있는 반면 가정형편에 따른 학습 격차가 커지는 단점이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