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동산이 폭등하면서 집값을 잡기 위해 세제가 개편되자 ‘종부세 폭탄’이라며 아우성이다. 다른 한편에는 임대료에 허리가 휘는 자영업자들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대출을 받아 임대료를 내다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가진 자들의 사리사욕을 제어할 수 있는 공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민란은 한 왕조가 기우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개, 돼지 취급을 받던 소작농들이지만 한 나라를 지탱하는 초석임을 역사는 되풀이해서 증명한다.
자본주의가 도래하기 전 이 땅은 지주들의 나라였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인 신분을 면치 못했다. 지주의 자리를 자본가들이 대신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소작인은 부동산 임차인과 노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논밭이 가치 있는 부동산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상가나 아파트가 가치 있는 부동산이 되었다. 임차인이 내는 임대료가 현대판 소작료인 셈이다. 한 해 동안 머슴살이를 한 댓가로 새경을 받아 입에 풀칠하던 이들이 오늘날에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나마 정규직 머슴들은 먹고살 만해졌지만 비정규직 머슴들의 삶은 예나제나 비슷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소작인들의 삶이 더욱 궁핍해지고 있다. 장사는 공치는데 임대료는 꼬박꼬박 내야 한다. 가뭄이 들어 먹을 것도 모자라는 판에 소작료를 갈취 당하던 시절과 별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허리가 굽도록 일해서 거둔 수확물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지주들이 다 가져가고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만 남겨주던 폐습이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십여 년 전 정동영 의원이 현대판 소작료와 같은 임대료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2의 동학혁명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120년 전 동학혁명의 불씨도 지나친 소작료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영업자들은 소작농이라는 공통의 신분 개념이 없고,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결속하기가 쉽지 않다. 민란으로 이어질 만큼 공통분모가 뚜렷하지 않은 셈이다.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박노자는 ‘파편화된 개인들’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취업전선에서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는 젊은이들은 모래알처럼 원자화되어 헬조선을 바꿀 생각을 하기보다 저마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궁리할 따름이다.
오늘날 대기업은 옛날의 천석꾼, 만석꾼 같은 대지주와 같은 존재다.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은 낙수효과 운운하며 “지주가 잘 되어야 소작농도 잘살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세뇌를 시켰고, 순진한 소작농들은 그런 말을 되뇌는 마름들을 제 손으로 뽑아 금배지를 달아주었다. 대지주가 직영하는 논밭에서 일하는 정규직 머슴들은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머슴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 정규직 머슴들의 조합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에 바쁘다.
조선 말기의 소작농 신분이나 다름없는 다수 국민들은 어느덧 계층이동이 불가능한 새로운 신분제 사회로 접어들었음을 체감하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잠시 신분제 사회가 무너진 것처럼 보였던 시기가 있었지만, 혼란기에 빚어진 착시 현상이었다. 개천 출신 용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잘살아보세’라는 노랫소리가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은 잠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신분제는 무너지지 않았고 잠시 흐트러졌을 뿐이다. 양반 신분을 돈으로 살 수 있었던 지난 백여 년 동안 흐트러졌던 신분제가 빠르게 복구되는 중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 ‘금수저, 흙수저’ 같은 말이 초등 아이들 입에서도 오르내리는 게 그 반증이다.
신분제 사회로 회귀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일은 쉽지 않다. 서구처럼 좀 더 인간적인 신분제 사회가 그나마 대안일까? 중산층을 늘이고 복지제도로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정도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이자 차선의 사회일 것이다. 사익을 절도 있게 추구하고, 사익과 공익이 충돌할 때 공익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시민이 늘어난다면 그래도 살 만한 사회가 될 것이다. 교육의 역할이다. 학교는 장래 소작공이 될 아이들에게 ‘지주가 잘 되어야 소작농도 잘살 수 있다’고 세뇌시킬 것이 아니라, 소작공의 권리 곧 노동권을 가르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자각 곧 시민의식을 불어넣어야 한다.
사실 시민의식은 지주와 건물주들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이들이 스스로 그 덕목을 갖추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남의 발을 밟은 사람은 밟힌 사람의 아픔을 느끼기 어려운 법이다. 밟힌 사람이 “아얏!” 소리를 내어야 비로소 자신이 남의 발을 밟았음을 깨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좁은 땅에서 복작거리며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남의 발을 밟게 된다. 시민의식이란 다른 사람의 발을 밟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는 것이자 자기도 모르게 밟았을 경우 얼른 발을 치우고 사과할 줄 아는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부동산이 폭등하면서 집값을 잡기 위해 세제가 개편되자 ‘종부세 폭탄’이라며 아우성이다. 다른 한편에는 임대료에 허리가 휘는 자영업자들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대출을 받아 임대료를 내다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가진 자들의 사리사욕을 제어할 수 있는 공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민란은 한 왕조가 기우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개, 돼지 취급을 받던 소작농들이지만 한 나라를 지탱하는 초석임을 역사는 되풀이해서 증명한다.
자본주의가 도래하기 전 이 땅은 지주들의 나라였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인 신분을 면치 못했다. 지주의 자리를 자본가들이 대신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소작인은 부동산 임차인과 노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논밭이 가치 있는 부동산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상가나 아파트가 가치 있는 부동산이 되었다. 임차인이 내는 임대료가 현대판 소작료인 셈이다. 한 해 동안 머슴살이를 한 댓가로 새경을 받아 입에 풀칠하던 이들이 오늘날에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나마 정규직 머슴들은 먹고살 만해졌지만 비정규직 머슴들의 삶은 예나제나 비슷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소작인들의 삶이 더욱 궁핍해지고 있다. 장사는 공치는데 임대료는 꼬박꼬박 내야 한다. 가뭄이 들어 먹을 것도 모자라는 판에 소작료를 갈취 당하던 시절과 별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허리가 굽도록 일해서 거둔 수확물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지주들이 다 가져가고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만 남겨주던 폐습이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십여 년 전 정동영 의원이 현대판 소작료와 같은 임대료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2의 동학혁명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120년 전 동학혁명의 불씨도 지나친 소작료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영업자들은 소작농이라는 공통의 신분 개념이 없고,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결속하기가 쉽지 않다. 민란으로 이어질 만큼 공통분모가 뚜렷하지 않은 셈이다.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박노자는 ‘파편화된 개인들’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취업전선에서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는 젊은이들은 모래알처럼 원자화되어 헬조선을 바꿀 생각을 하기보다 저마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궁리할 따름이다.
오늘날 대기업은 옛날의 천석꾼, 만석꾼 같은 대지주와 같은 존재다.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은 낙수효과 운운하며 “지주가 잘 되어야 소작농도 잘살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세뇌를 시켰고, 순진한 소작농들은 그런 말을 되뇌는 마름들을 제 손으로 뽑아 금배지를 달아주었다. 대지주가 직영하는 논밭에서 일하는 정규직 머슴들은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머슴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 정규직 머슴들의 조합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에 바쁘다.
조선 말기의 소작농 신분이나 다름없는 다수 국민들은 어느덧 계층이동이 불가능한 새로운 신분제 사회로 접어들었음을 체감하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잠시 신분제 사회가 무너진 것처럼 보였던 시기가 있었지만, 혼란기에 빚어진 착시 현상이었다. 개천 출신 용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잘살아보세’라는 노랫소리가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은 잠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신분제는 무너지지 않았고 잠시 흐트러졌을 뿐이다. 양반 신분을 돈으로 살 수 있었던 지난 백여 년 동안 흐트러졌던 신분제가 빠르게 복구되는 중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 ‘금수저, 흙수저’ 같은 말이 초등 아이들 입에서도 오르내리는 게 그 반증이다.
신분제 사회로 회귀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일은 쉽지 않다. 서구처럼 좀 더 인간적인 신분제 사회가 그나마 대안일까? 중산층을 늘이고 복지제도로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정도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이자 차선의 사회일 것이다. 사익을 절도 있게 추구하고, 사익과 공익이 충돌할 때 공익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시민이 늘어난다면 그래도 살 만한 사회가 될 것이다. 교육의 역할이다. 학교는 장래 소작공이 될 아이들에게 ‘지주가 잘 되어야 소작농도 잘살 수 있다’고 세뇌시킬 것이 아니라, 소작공의 권리 곧 노동권을 가르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자각 곧 시민의식을 불어넣어야 한다.
사실 시민의식은 지주와 건물주들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이들이 스스로 그 덕목을 갖추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남의 발을 밟은 사람은 밟힌 사람의 아픔을 느끼기 어려운 법이다. 밟힌 사람이 “아얏!” 소리를 내어야 비로소 자신이 남의 발을 밟았음을 깨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좁은 땅에서 복작거리며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남의 발을 밟게 된다. 시민의식이란 다른 사람의 발을 밟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는 것이자 자기도 모르게 밟았을 경우 얼른 발을 치우고 사과할 줄 아는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