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십대라는 이름의 시민

민들레
20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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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가라?

천만 촛불 이후 십대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 꼭대기에서 목에 힘주는 어른들이 사실은 매우 찌질하다는 사실을 눈치 채기도 했고, 자신들이 살아갈 세상 돌아가는 꼴이 영 미덥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십대들은 촛불이 겨우내 들불처럼 번지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하기도 했다. 공화국의 국민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생긴 셈이다. 18세 투표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런 촛불 정국에서도 청소년 투표권은 법안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국회의원들의 행태가 장터에서 “애들은 가라” 소리치는 뱀장수들과 진배없다. 새누리당 후신이야 당연히 반대할 일이겠지만 민주당도 이 사안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은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굳이 애들 표까지 끌어 모으지 않아도 이번 선거는 이길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인가.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선거권 연령이 가장 높다는 사실은 국회의원들도 모르지 않을 테다.* 이 나라 청소년들의 정신연령이 더낮다고 보는 걸까. 시험공부만 시켰으니 뭘 알겠냐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애들은 결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시험공부만 하지 않았음이 지난 촛불 정국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적어도 태극기집회에 나오는 수십만 명의 어른들보다는 시대를 읽는 눈이 더 밝다.

  당연하다. IT시대를 리드하는 세대가 십대들이다. SNS라는 새로운 소통수단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IT기술 덕분에 나이 어린 세대가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기술 발달은 대체로 젊은이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기술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를 낳기 마련이다.

  학교 담 너머 현실에 눈을 뜬 십대들은 새삼스레 민주시민교육을 시키겠다는 어른들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우리를 시민으로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민주시민교육은 무슨 개뿔!” 이런 소리를 할법하다. 대통령답지 못했던 대통령은 파면되었지만 교육자답지 못한 학교장의 권위는 굳건한 대한민국 학교에 몸담고 있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교육과잉의 피해자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일까.

  학교에서 하는 일들은 여하튼 '교육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는지 국어, 영어, 수학에다 진로교육에 인성교육, 이제는 민주시 민교육까지 끝없는 교육열차가 이어진다. 칸칸이 옮겨 다니며 울며 겨자 먹기로 교육여행을 해야 하는 승객들의 신세가 처량하다. 기관 차가 낡아버린 지 오랜데 객차만 자꾸 연결해서 어쩌자는 걸까.

  살면서 못 볼 꼴 더 많이 보고 세상과 더 많이 타협한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인성이 좋을 리 없지 않은가.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람풍 하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이 교사의 숙명이라 할지라도 교육으로풀 것과 아닌 것 정도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하건만, 그런 지성조차도 갖추지 못한 이들이 한 나라의 교육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아이들 인성이 수업 시수에 따라 늘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인간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인성교육, 진로교육처럼 교육이란 말이 붙으면 그 본질이 훼손되고 마는 것들이 있다. 삶의 본질에 속하는 것들은 삶과 동떨어진 교육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가치들이다. 인성이나 진로 같은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어떻게 해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가 없음을 드러낸다.

  민주시민교육 또한 마찬가지다. 공화국의 교육은 그 근본에서 민주시민교육이어야 한다. 일상에서 또 교육현장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굳이 따로 시간을 내고 품을 내어 민주시민교육 이란 것을 할 필요가 없다. 민주적인 학교에서 아이들은 저절로 민주 시민으로 자라기 마련이다.

  민주시민교육은 사실상 공교육의 다른 이름이다. 민주공화국이 지향해야 할 교육의 본질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시민교육이란 이름의 또 다른 수업을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공교육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국영수 사이에 ‘공교육’이란 과목이 따로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사람만 민주시민교육을 수업 시수에 포함시키는 발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민주시민교육을 해야 한다면 오히려 교사와 교장들을 대상으로 할 일이다. 학교민주화를 가로막는 것은 학생들이 아니다. 권위에 절어 있는 교장, 승진에 목매는 교사들로 가득한 학교에서 민주시민 교육은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승진제도는 교사들을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고분고분한 교사들을 원하는 기득권층이 승진이라는 올가미로 교사들을 옥죈다. 많은 교사들이 자발적으로그 올가미에 목을 들이민다.민주화의 주체는 민, 곧 평민이다. 평교사야말로 학교민주화의 핵심 세력이다. 교사들로 하여금 교육활동에 전념하지 못하게 만들고 평교사들의 연대를 가로막는 교사 승진제도는 학교민주화를 가로막는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민주시민교육을 하고자 한다면 교사 승진제도부터 개혁할 일이다.



200여 명의 문명고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신청 반대 시위를 벌였다. 사진=전교조 경북지부.jpg

△ 200여 명의 문명고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신청 반대 시위를 벌였다. 사진=전교조 경북지부


평범한 십대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다

민주주의(democracy)는 원래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demos)의 지배(cracy)를 뜻하는 말이다.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이 연대해 권력을 통제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참정권이 실현된 게 서구에서도 불과 1백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여성참정권이 보장된 것은 1920년이다. 흑인 참정권보다 50여 년 뒤다) . 십대들의 참정권은 그보다 더 늦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십대들이 연대하기 시작했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채택하기로 한 경산시 문명고에서 “저희는 ‘문 맹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팻말을 든 신입생들과 재학생들의 끈질긴 반대 시위로 결국 채택이 무산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학생들은 교장실 앞에 죽치고 앉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구미시 오상고도 연구학교 신청을 했지만 학생 수백 명이 운동장에서 반대 집회를 하는 등 반발이 커지자 신청을 철회했다.

  문명고와 오상고 학생들은 이 사회의 평범한 청소년들이다. 더욱이 TK (대구경북) 지역에서 자라난 이 평범한 십대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촛불집회로 나타난 시민들의 광범위한 공감대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힘없는 십대들도 자신들이 광범위한 시민세력과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될 때 힘을 갖게 된다. 힘없는 약자들이 연대를 통해 정치세력화 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작동하기 시작한다. 

  정치적 의미에서 시민은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 집단이다. 국가권력에 맞설 만한 시민권력이 만들어질 때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 역사적으로 시민이 탄생한 것은 도시라는 공동의 삶터에 서로 긴밀히 엮여 운명공동체임을 자각한 소시민들이 연대하여 봉건 영주에 맞설 만큼 세력화 되었을 때였다. 연대를 통해 정치세력 화한 시민들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 의는 시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시민에 의한 정치다.

  어른들이 가는 귀가 어두워 잘 못 듣고 있을 뿐, 우리 사회 십대들은 이미 자신들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시민교육이다. 공동체의 시민은 그렇게 길러진다. 사교육에 치어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지만 또한편에서는 이렇게 건강한 시민들이 길러지고 있다. 깨어 있는 교사 들의 역할이 적지 않을 것이다. 승진점수에 연연하지 않는 교사들이 시험점수에 연연하지 않는 아이들을 길러낼 수 있다.

  공교육은 글로벌 인재를 기르는 교육이 아니다. 다국적기업의 이익에 기여하는 인재는 유능할지는 모르지만 공동체에는 위험한 존재 다. 기업의 이익을 높이는 길은 비용을 낮추는 데 있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은 대체로 비용 항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살을 깎아 공룡의 배를 불리는 데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는 일을 공동체가 한다면 자멸적인 행위를 하는 셈이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평범한 시민들을 길러내는 일이 공교육의 역할이다. 장정일이 우치다 타츠루의 말을 빌어 엘리트 교육에 대해 한 말에 귀 기울여볼 만하다.


엘리트는 ‘장소’ 오로지 ‘장소’와 긴밀하게 연관된 사람이다. 임진왜란때 의병을 지휘했던 남명 조식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1992년 로스앤젤 레스 폭동 때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결집했던 예비역과 한인 유학생들이 엘리트다. … 풀뿌리 지역 활동가들, 혹은 지역 경제를 잠식하는 가맹점 가입을 거부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구멍가게를 연사람들, 그들이 엘리트다. 

(한국일보 2016. 12. 30.)


  굳이 ‘엘리트’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다. 여기서 말하는 엘리트는 풀무학교에서 오랫동안 써온 ‘위대한 평민’이란 표현과도 통하는 말일 것이다. 풀무학교가 언제부턴가 ‘위대한 평민’이란 말대신 ‘더불어 사는 평민’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맥이 닿는 변화라고 본다. 자신의 삶이 공동체와 긴밀하게 엮여 있음을 자각하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평범한 시민들이야말로 민주사회를 이루는 핵심이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교육도 마찬가 지다. 방향이 제대로 잡혀 있어야 길을 잃지 않는다. 정신없이 달리고 보니 낭떠러지더라 하면 곤란하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선 정국에서 교육 공약들이 쏟아지고 있다. 민주시 민을 기르는 것이 공교육의 역할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먼저 십대들을 시민의 일원으로 존중해야 한다. 18세 투표권은 그것을 드러내는 최소한의 제도적 표현이다. 십대라는 이름의 시민들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교육개혁의 초석이 될 것이다.


* 한국(만 19세), 폴란드 (만 20세)를 제외한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이 만 18세 투표권을 보장한다. 오스트리아, 브라질, 에콰도르 같은 나라는 만 16세로 정하고 있다. 일본은 작년에 18세로 낮추었다. 


현병호 · 발행인 mindle1603@gmi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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