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공부론(2)_글을 쓰는 일과 짓는 일

민들레
2021-03-30
조회수 1032



글, 쓰기와 짓기 그리고 지어내기

 

‘글짓기’가 맞을까 ‘글쓰기’가 맞을까? 둘다 맞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이를 두고 논쟁이 일어나곤 하는 것은 교육계가 빚어낸 혼란이다. 사실 ‘글짓기’는 ‘글쓰기’보다 역사가 오랜 말이다. 초등과정에서는 주로 ‘글짓기’라 했고, 중등에서는 작문 또는 논술이라는 표현을 써왔다. ‘글쓰기’라는 표현이 ‘글짓기’를 대신하기 시작한 것은 이오덕 선생의 문제제기 이후 한국글쓰기연구회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다. 일기나 동시를 억지로 지어내지 말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쓰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아이들에게 방학숙제로 일기 쓰기를 강제하다 보니 아이들 나름 생각해낸 자구책이 한 달치 일기 몰아 쓰기다. 그렇게 한꺼번에 쓰려니 지어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문방구에서 파는 아이들의 일기장은 기상 시간과 잠자는 시간 그리고 날씨란 같은 양식이 정해져 있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신문이라도 받아보는 집은 날씨란을 채우기가 수월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다른 친구 일기의 날씨란을 베끼거나 대충 채워 넣곤 했다. 글을 좀 쓴다는 아이들에게 하루 일과를 적당히 꾸며내는 것은 날씨에 비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꾸며내고 지어내는 글이 아니라 진솔한 생활글을 쓰도록 한 것은 깨어 있는 교육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글을 ‘짓는’ 것을 터부시한 것은 글과 말의 힘, 이야기의 힘을 간과한 것이다. 다짐이나 축원처럼 말과 글에는 주술적 힘이 있다. 판에 박힌 반성문 같은 일기도 나름 교육적 기능을 한다. 말장난을 터부시한 것은 지나친 엄숙주의이기도 하다. 시는 원래 언어의 유희, 말장난이다. 시조나 하이쿠는 글자 좀 안다는 이들의 유희였다. 소설도 원래는 이야기꾼들이 놀이 삼아 사람들에게 들려주던 것이었다. 그것이 문자로 기록되어 인쇄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근대는 문학이 대중들로부터 상당히 주목받던 시기였다. 대중문학과 대중음악이 대중문화의 쌍두마차 역할을 하던 그 시기에 학교교육에서도 문학적 글쓰기가 장려되었다. 백일장이 곳곳에서 열리고, 모든 아이들이 시(동시)를 지었다. 글쓰기연구회 선생님들이 우려한 것처럼 많은 아이들의 시가 조잡한 말장난에 가까웠던 것은 어른들의 동심천사주의에 아이들이 맞춰준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심사위원들의 구미에 맞는 답안을 제출하는 것은 모든 경연의 룰이다.

글을 쓰는 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지어내기, 짓기, 쓰기 모두 글쓰기의 방식이다. 소설이 지어내는 글이라면, 시는 짓는 글이고, 산문은 쓰는 글에 가깝다. 이오덕 선생은 아이들이 글을 꾸미고 지어내는 것을 보다 못해 글짓기가 아니라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글을 짓고 지어내는 것을 터부시한 것은 글과 이야기의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생활글은 쓰기만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문학적인 글은 짓기와 지어내기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에세이도 구조를 갖고 있지만, 시나 소설은 나름의 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생명력을 얻기 힘들다. 집을 짓듯이 지어야 하는 글이다. 구조가 없는 집이 있을 수 없듯이 제대로 된 글이라면 구조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시의 운율이나 소설의 플롯은 작가가 의도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산문을 짧게 행갈이 했을 뿐인 시는 엄밀히 말해 시라고 할 수 없다. 글쓰기운동은 형식의 중요성을 간과한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말하듯이 쓰는 글이 좋은 글이라지만, 글에는 말과 다른 나름의 형식이 있다. 말의 경우는 표정이나 몸짓, 말투처럼 내용을 보완해주는 다른 요소들이 있지만, 글은 오로지 글만으로 의미를 전달해야 하기에 형식의 중요성이 더 부각된다. 문체는 글의 몸이다. 몸의 기본은 호흡이다. 노래의 박자 같은 것이다. 문체가 받쳐주지 않는 글은 박치가 부르는 노래처럼 듣기가 힘들다. 소리 내어 읽을 때 잘 읽히고 듣기 좋은 글이 좋은 글이다. 글은 글 이전에 말이다. 말은 곧 노래이기도 하다.

몸이 정신을 만든다. 체(體) 없는 용(用)은 골조 없는 집과 같다. 기초와 기둥도 세우지 않고 인테리어를 할 수는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을 갖고 있듯이, 그리고 몸이 스스로 알아서 숨을 쉬듯이 글 또한 스스로 숨을 쉰다. 좋은 신체를 타고나는 사람이 있듯이 언어감각을 타고난 아이들은 의식하지 않고도 형식미를 갖춘 글을 쓴다. 작은 누나가 엄마 보고 /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 한 개 사라 한다 /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 … 초등 6학년이 쓴 ‘엄마의 런닝구’라는 시다. 나름 운율이 있다. 각운이 있고 리듬이 살아 있다.

 

 짓기가 쓰기에 앞선다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이,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로 만들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성립한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야기는 대집단을 이룰 수 있게 했고 문명을 만들어냈다. 이야기 속에는 인간과 이 세계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고 삶의 지혜를 전승하는 기능이 숨어 있다. 신화나 옛이야기의 역할이다.

일찍이 글쓰기연구회에서 옛이야기를 되살려내는 데 앞장섰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업에는 그다지 힘을 쏟지 않았다. 신문사와 문학출판사들이 동화작가들을 발굴해 아동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했지만, 문단이라는 폐해를 낳기도 했다. 작가라 불리는 특수한 사람들만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민담과 설화는 민간에서 만들어지고 전승되어온 이야기들이다.

이야기는 꾸며낸 허구이지만 그 속에 진실이 담겨 있다.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다. 바라보는 관점이나 상황에 따라 사실은 다양한 모습을 띤다. 붉은 사과는 백열등 아래에서 주황빛을 띤다. 다른 동물의 눈에는 노란색으로 비칠 수도 있다. 색은 사물에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빛과 망막 원추세포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과 사실은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르게 펼쳐질 수 있다.

르포나 다큐멘터리는 사실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작가가 꿰뚫어본 진실을 담지 못하면 가치를 갖기 힘들다. 다큐멘터리가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형식을 갖추는 ‘짓기’ 과정이 빠진 르포나 다큐멘터리는 엉성한 작품이 되고 만다. 소설은 허구의 사실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한다. 모모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은 에밀 아자르가 꾸며낸 이야기 속에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짓기’에 더해 ‘지어내기’도 필요로 한다.

허구의 사실들이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려면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렇게 되면 저것이 저렇게 되는 것이 개연성이다. 전제와 진술이 맞물려 있어야 한다. 개연성이 없는 이야기는 황당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얼기설기 대충 얽어놓은 가설 건물처럼 바람만 불어도 넘어진다. 집을 짓듯이 이야기를 짓는 기술이 필요하다. 기초를 탄탄하게 놓고 골조를 세우면 나머지는 어렵지 않다. 뼈대가 잡히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살아 있으면 이야기는 저절로 풀려 나온다.

체(體)가 용(用)에 앞선다. 플롯이 스토리에 앞서고, 짓기가 쓰기에 앞선다. 내용을 채우기 전에 형식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집을 지은 다음 꾸며야 한다. 인테리어 기술은 잔기술이다. 기초를 놓고,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려 집의 골조를 갖추는 것이 기본기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글을 짓는 것은 논리적 사고, 연역적 사고를 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활 글쓰기는 대개 귀납적 글쓰기다. 실용적인 글쓰기에 가깝다. 문학은 비실용적이지만 일기보다 더 진실을 담을 수 있다.

자기소개서 같은 실용적인 글도 문학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 기업들이 지원자에게 이력서와 함께 자기소개서를 요구하는 것은 이력서에 적힌 사실적인 정보들 사이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것이다. 이력을 지어내어선 안 되지만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지어내야 한다. 이력서 쓰듯이 써서는 자기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소서 쓰기는 소설 쓰기에 가깝다.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한 편의 소설을 쓰는 것이다.

 

자소서는 당연히 자소설이다. 단지 사실들의 나열만을 원했다면 자소서가 아니라 이력서로 충분하다. 자소서는 거짓을 짓고 자신에 대한 미사여구를 나열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력서에 나와 있는 사실들 사이를 채우는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것, 그리고 이 회사에 들어와서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지 미리 들려달라는 것, 그리고 그 두 이야기 사이를 연결해달라는 것이다. 이게 소설이 아니면 무엇인가? 소설의 힘은 글재주에 있지 않다. 소설의 힘은 이야기에, 그 진실성에 있다.(권재원, 교육 그 자체, 우리학교, 2020년, 253쪽)

 

 미래가 과거를 결정한다

 

집의 형식이 골조라면 이야기의 형식은 플롯이다. 기초를 놓고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린 다음 지붕을 얹는 것이 집 짓는 일의 순서다. 시간 순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인과관계로 보면 들보가 기둥을 눌러주고 연결해줄 때 비로소 기둥들도 제 자리를 잡는다. 들보가 기둥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기둥이 바로 서려면 기초도 필요하고 이웃 기둥과 들보도 있어야 한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다 보면 스스로 서게 되는 삶의 이치도 이와 같다.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플롯에서도 과거가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미래 또한 과거에 영향을 미친다. 인과관계는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붓글씨를 쓸 때 앞서 그은 획이 다음 획에 영향을 미치지만, 앞 획의 의미는 다음 획에 의해 결정한다. 잘못 그은 것처럼 보이는 획도 다음 획에 의해 멋진 획이 될 수 있다. 과거는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 결정력을 갖고 있진 않다. 오히려 미래가 과거를 결정한다. 고수는 하수에 비해 운신의 폭이 넓어 하수가 생각지도 못한 획을 그어 작품을 완성시킨다.

사건의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다. 우리의 삶과 이야기도 마지막 장을 덮을 때야 의미가 분명해진다. 미래는 열려 있지만 모든 삶이 죽음에 이르듯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 끝이 있음으로 해서 삶은 의미를 띄고 이야기는 생명력을 얻는다. 인간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죽음이 예정된 존재로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응답하는 종교 또한 이야기와 함께 등장한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집단이 이겨온 것이 인류의 역사다.

문학이 철학이나 수학처럼 ‘학’으로 불릴 수 있는 근거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란 존재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문(글자)의 학문’이지만, 문자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문학은 존재해왔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민담과 설화는 문학의 원형 같은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기도와 주술을 문학의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말의 힘, 이야기의 힘이 작동할 때 거기에 문학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독특한 능력이라면, 문학은 인간종의 근원에 닿아 있는 가장 오랜 학문이자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학문인 셈이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과 달리 문학은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진실을 파헤친다. 문학의 도구인 언어의 본질은 관계다. 사람을 비롯해 세상 만물이 관계의 존재이듯이, 언어의 의미 또한 사람과 사람의 사이, 언어와 언어의 사이에서 생겨난다. 의미는 단어 속에 있지 않고 문장 속에서 비로소 의미가 부여된다. 음이 다른 음과의 관계에 의해 의미가 드러나듯이 언어 역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언어의 이러한 속성은 곧 존재의 속성이다. 언어만큼 존재의 진실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도구가 없다. 하지만 언어와 존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일찍이 노자가 언명했듯이 언어의 한계는 일찍부터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2500년 전 노자 시대에 비해 오늘날의 언어는 훨씬 더 정교하고 풍부해졌다. 그 무렵 피타고라스는 정수만 알고 있었으나 그 뒤 인류는 무리수와 소수, 허수 같은 새로운 수의 세계를 발견하고 우주의 비밀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진리를 담기에 언어의 그릇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나마 언어 덕분에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양자역학의 토대를 놓은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가 눈 덮인 산장에서 토론을 하던 중 닐스 보어가 설거지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설거지는 언어와 같군요. 물도 더럽고 행주도 더럽지만 이걸로 접시를 깨끗하게 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언어도 마찬가지예요. 개념이 불명확하고 논리가 적용되는 범위도 뚜렷하지 않지만 이런 언어를 가지고도 자연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_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가운데

 

불가지(不可知)의 세계가 있음을 아는 것도 불가지라는 언어가 있어서이다. 인간은 자신이 뭔가를 모른다는 것을 아는 역설적인 존재다. 알듯말듯한 상태, 뇌가 간지러운 그 느낌 덕분에 인간의 집단지성이 계속 진화하고 있을 것이다. 언어 또한 인간의 집단지성과 함께 점점 진화한다. 새로운 개념어와 정의가 생겨나면서 이전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수학적 언어의 확장은 언어의 발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래에 새롭게 생겨날 언어들에 의해 지금의 불완전한 언어가 좀더 완전해지면서 존재의 비밀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소수 π의 끝자리는 끝내 밝혀지지 않으리라. 그 덕분에 무한한 우주가 존재할 수 있기에.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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