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삶이 곧 교육'이라는 말에 숨은 함정

민들레
2022-03-21
조회수 882

 

삶과 동떨어진 근대교육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교육의 흐름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경험을 통한 학습learning by doing’를 주창한 존 듀이를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 교육이 한 흐름이라면, 또 한 흐름은 ‘삶의 교육’을 주창한 자유교육의 흐름이다. 실용주의 교육은 20세기 중반 미국 공교육에 접목되면서 진보주의 교육의 한 축을 이룬 반면, 자유교육은 공교육 바깥에서 생겨난 프리스쿨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교육’을 표방한 일본의 유토리 교육과 ‘삶의 힘을 키우는 교육’을 강조하는 한국의 혁신교육은 존 듀이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삶을 위한 교육’을 표방한 덴마크 자유교육을 비롯해 70년대 서구의 프리스쿨운동과 한국의 대안교육운동은 자유교육의 흐름 속에 있다. 자유교육과 실용주의 교육은 둘 다 지식보다 경험을 중시하고 아이들의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지난 100년 동안 두 흐름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교육의 흐름을 만들어오고 있다.

‘삶이 곧 교육’이라는 말은 교육이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자칫 교육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삶과 무관한 것이 없으니 교육 아닌 일이 없고, 세상 모든 일이 교육이라는 말은 달리 교육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교육을 무화시키는 말이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무위의 교육을 이상적인 교육이라 여기는 것도 이와 통한다. 사실상 교육 포기나 다름없다. 이는 교육 과잉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지 이를 교육의 금과옥조처럼 여긴다면 교육도 사회도 퇴보하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현실의 삶을 시뮬레이션하듯 성적대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제도교육이야말로 ‘삶이 곧 교육’이라는 철학을 실제로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자유교육은 경쟁을 터부시하고 삶의 일면만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다. 협력적이고 공동체적인 문화 속에서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이 사회를 보다 공동체적인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아이들이 세상에 나와서 느끼는 것은 혼란과 무기력인 경우가 많다. 세상은 개인이 바꾸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기성제도가 갖는 관성의 힘은 압도적이다.

교육은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웃풋이 인풋에 따라 결정될 거라는 단선적 사고는 교육에서 언제나 배반당해왔다. 권위적인 교육이 체제순응형 인간을 길러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영국의 권위적인 청교도 문화 속에서 민주주의 정신이 꽃을 피운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는 유신시대의 억압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가 민주화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반면에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오히려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물리세계에서처럼 정신세계에서도 반작용의 힘이 작용한다.

‘삶이 곧 교육’이라는 명제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인간의 부정적인 면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삶은 그다지 교육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삶에서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비리가 난무하지만 그런 환경을 바람직한 교육환경이라 여길 사람은 없다. 진보적 교육자들도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삶이 곧 교육이라고 주장한 듀이 역시 아이들에게는 나쁜 것을 배제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선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움터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온실 같은 곳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온실을 잘 관리하는 요령은 식물이 냉해를 입을 염려가 없을 때는 낮에 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이다.

삶과 교육을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혁신교육과 더불어 오늘날 마을공동체교육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삶의 교육’을 지향한다고 해서 학교가 아닌 마을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전주 완산고 교사 박제원은 이렇게 말한다. “마을과 연계하지 않으면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미신이 교육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현실은 누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 혁신학교든 아니든 학교는 학습의 중심지이며, 학교의 역량 역시 학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주위를 자꾸 기웃거리게 되면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

학교 본연의 역할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마을공동체교육에 대한 환상을 경계하자는 말이다. 혁신이라는 것이 반드시 새로운 뭔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삶과 동떨어진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학교와 지역사회를 연결하려는 움직임은 바람직하지만, 학교 또한 삶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과 교사들이 낮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는 배움터이면서 동시에 삶터이자 일터이기도 하다. 학교를 삶터와 동떨어진 공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교육 문제의 해법을 자꾸만 학교 바깥에서 찾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배움의 기쁨을 맛보고, 교사들이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은 마을보다 학교 안에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  박제원, 혁신학교가 혁신교육의 메카가 되려면, 《교육, 제4의 길》, 교육을바꾸는사람들, 2021.01.06.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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