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몸둘 바를 알게 하는 교육

민들레
2020-06-16
조회수 1213

2.jpg베짱이를 기르는 교육

평생학습이 시대적 화두가 되고 있다. 사실상 평생학습사회는 꽤 피곤한 사회일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종종걸음으로 뒤쫓아가야 하는 사회가 평생학습사회의 진면목일 가능성이 높다. 평생직장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것이 평생학습이다. 이 직장 저 직장, 이 일 저 일 옮겨 다니면서 평생 동안 진로를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이 지금 자라나는 세대의 미래상일지 모른다.


평생학습과 진로교육 바람이 이처럼 거센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누구나 평생 배우면서 사는 것이건만, 새삼스럽게 평생학습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배경에는 이처럼 고용불안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다. 기술의 급속한 발달과 자동화 기계들로 말미암아 일자리는 줄어들고,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자리들을 놓고 인간들끼리 벌이는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그나마 힘든 일자리는 저임금 이주 노동자들에게 맡기다보니 취업문은 더욱 좁아진다.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할 때 불안하지 않은 부모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자식들이 놀면서 먹고 살 수 있는 재산을 가진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자영업이라도 할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자영업자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고 망하는 업자가 태반이다. 그렇다보니 정작 안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교직에 너도나도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20세기 말까지 학교는 근면 성실한 아이들을 길러내고자 애를 써왔다. 근면 성실하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할 일이 있었던 시대였다. 궁핍하던 시절, 먼 길을 날마다 걸어 다니면서 6년, 12년 개근상을 타는 아이들도 많았다. 이제는 그렇게 근면 성실한 아이들도 흔치 않다. 개근상을 주지 않는 학교도 늘어나고 있다. 근면 성실한 노동자는 이제 이주 노동자로 족한 시대가 된 것일까.

 

근면의 가치를 강조한 개미와 베짱이 우화의 새로운 버전이 있다. 개미는 죽어라 일하다 그만 허리를 다쳐 일도 못하게 되어 빈민으로 전락하고, 그늘에서 노래 부르던 베짱이는 연예기획사에 발탁되어 한류스타가 된다는 얘기다. 21세기 한국 아이들의 꿈이 담긴 우화인 셈이다. 물론 연예인들이 차 안에서 먹고 자면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 게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부를 선망하는 것일 뿐, 스타 베짱이들이 얼마나 죽어라 일을 해야 하는지는 관심 밖이다.

 

한편 여름에 땀 흘려 일하는 개미들에게 즐거운 노래를 들려준 베짱이에게 개미들이 겨울에 양식과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한다는 상생의 해피엔딩 스토리는 대안 진영 사람들이나 좋아할 버전이다. 찬바람 부는 겨울날 매몰차게 베짱이를 내쫓는 일벌레 개미 편을 든 2500년 전의 이솝보다 우리가 조금 더 지혜로워진 것일까. 개미보다는 베짱이가 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많은 이 시대에 대안교육은 어쩌면 베짱이들과 호흡이 잘 맞는 교육인지도 모른다. 대안교육 판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대체로 예술성이 발달한 편이고, 기질적으로도 개미보다는 베짱이에 가까운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대안교육은 베짱이들을 길러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아이들이 자라 숨 막히는 사회에 숨통 역할을 하는 베짱이가 될 수 있다면 그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개미와 베짱이로 나뉘는 단순 구도가 아니다. 개미도 베짱이도 되지 못하고 어영 부영 시간을 보내는 굼벵이들이 나날이 늘고 있다. 무기력한 아이들. 공부도 어영부영 하고, 일할 생각도 별로 없고, 부모한테 빌붙어 살 궁리나 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난다. 경쟁이 너무 심해지면 자포자기하는 참가자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몸둘 바를 모르는 아이들

흔히 요즘 아이들은 절실함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생존이 절실했던 세대나 사회정의가 절실했던 세대와 달리 오늘날의 아이들은 아무것도 절실한 것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하는 진단이다. 여전히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고, 사회정의가 실현된 사회도 아니건만 그 문제가 더 이상 절실하지 않게 된 것은 왜일까.

 

성장과정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본 경험이 없는 세대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가까운 가족이나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성인이 되는 것은 사회화 과정에서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볼 수 있다. 손발을 놀려 일을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고 부모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경험은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요즘은 노작이나 노동의 경험 없이 성인이 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수험 준비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정신적인 노동이긴 하지만, 노동이라 말하기엔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아이들이 할 만한 소소한 집안일들이 사라지면서 어려서부터 노동주체가 아닌 소비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아이들이 모든 관계에서 등가교환의 태도를 보이면서 배움이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가두는 현상에 대해 우치다 타츠루 같은 이는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 일을 통해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체험을 일찍부터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품성이 길러진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걸레 짜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 나이든 세대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열 몇 살이 되도록 한 번도 걸레를 빨아서 방을 닦아보지 않은 아이들이 많은 것이다. 걸레를 빤다 해도 그저 손으로 한 번 꾹 쥐어서 짤 뿐이다. 비틀어서 짜는 법을 모른다. 손빨래를 해본 적도 없고, 걸레를 빨아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세탁기와 청소기가 집집마다 보급된 영향도 있겠고, 요즘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공부만 하라고 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학교에서 생활교육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정이 사실상 생활교육 기능을 상실하면서 학교의 부담이 늘고 있다. 제천간디학교에서는 몇 년 전부터 십대 학생들이 빗자루질 하는 법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는 생활교육을 필수과정으로 넣었다고 한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이름의 이 과정에서는 청소하는 법, 이불 개는 법부터 가르친다. 침대생활을 하다 보니 집에서 한 번도 이불을 개어보지 않은 학생들이 태반이다.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기본적인 일머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모종을 옮겨 심는데 뿌리가 다 드러나게 심어 놓기도 한다. 관찰력이 없고 몸도 굼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그야말로 몸둘 바를 모른다. 어려서부터 소소한 일을 하다 보면 일머리를 알게 된다. 일을 배운다는 것은 일의 과정에서 적절히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일을 해본 사람은 일머리가 있고 처신하는 법을 안다. 눈치가 생겨난다고 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눈치껏 하다 보면 나중에는 스스로 알아서 척척 할 수 있게 된다.

 

어찌 보면 ‘몸둘 바’를 아는 것이야말로 배움과 성숙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돌아가는 판을 읽고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당당하게 있을 줄 아는 것.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스스럼없이 할 줄 아는 것. 그 모습은 보기에도 아름답다. 쭈볏쭈볏거리며 몸둘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도 마음이 편치 않고 안쓰럽다. 인문교육이 자신과 세상을 읽는 눈을 키움으로써 스스로 몸둘 바를 알게 하는 것이라면, 노작교육은 노동을 통해 몸둘 바를 익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안학교에서처럼 노작교육을 하기 힘든 일반학교라 하더라도 최소한 청소 정도는 학생들이 하게 해야 한다. 학교 청소를 아이들이 스스로 하게 하지 않고 용역에 맡기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만약 여력이 있어 노작교육을 한다면 흔히 그렇듯이 맛보기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뺀질거리면서 시간만 때우는 요령을 익히게 하는 것은 몸둘 바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적당히 때우면서 살게 가르치는 셈이다. 농사를 짓든 집을 짓든 마지막까지 완성도 높은 일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건물을 짓더라도 실제로 쓸 수 있는 건물을 지어본 아이는 무엇을 하든 끝까지 책임감 있게 해내는 태도를 몸에 익히게 된다. 그렇게 몸으로 뭔가 의미 있는 노동을 해본 아이들은 삶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는 자기 몸에 대한 자신감이면서, 몸으로 세상과 소통하는느낌이 주는 삶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이다. 게다가 손을 놀리는 일은 뇌 발달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유태인들이 아이들에게 저마다 손기술 한 가지씩을 익히도록 하는 까닭도 여기 있을 것이다. 뭔가 한 가지 손기술을 익힌 아이는 진로를 찾는데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대안적인 진로교육이란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와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생산 활동이나 교환 활동에 참여하여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얻는 다양한 경험과 만남이야말로 우리 삶을 이루는 알짜가 아닐까.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기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하고, 세상에 뭔가 보탬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일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일을 하다보면 그 일에 내재된 가치의 충돌이든 함께 일하는 사람과의 충돌이든 난감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자주 있다. 그럴 때 균형 감각을 잃지 않고 현명하게 판단하고 처신하는 일이야말로 일을 잘 하는 길이다. (진로) 교육이란 결국 이런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발전할수록 노동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든다. 가전제품의 발달로 가사노동이 자동화되면서 아이들이 집안일을 해볼 기회가 줄어들었다면, 생산 현장의 자동화는 일자리를 없애면서 경쟁을 심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 자동화로 말미암아 오히려 삶의 질이 떨어진 셈이다. 자동화 기계들은 생산성을 높이지만 노동의 질은 떨어트린다. 오늘날의 기술자들은 옛날처럼 기계와 소통하지 않고 그저 버턴을 누르고 하염없이 계기판을 들여다볼 뿐이다. 작업과정에서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 결과 전문가들조차도 대체가능한 인력이 되고 있다. 자동화는 생산성을 높이고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영향을 덜 받는 시스템 구축을 원하는 자본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다.

 

세상은 나날이 자본의 입맛에 더 맞추어지고 있다. 대안적인 진로란 이 흐름에 저항하고자하는 것이지만, 거대한 흐름 속에서 휩쓸려가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규모 자본이 추진하는 기술 발달에 맞서 적정기술을 개발하는 일은 더욱이 쉽지 않다. 원자력발전소와 자전거발전기의 격차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안을 추구하는 일이 자기 만족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으려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대안적인 진로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기보다는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공동체 수준에서 볼 때 모든 일의 근본 동기는 공동체의 지속가능성과 번영을 위한 것이다. 모든 공동체는 의식주와 종족 번식을 위한 생존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동체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데 필요한 기능과 품성을 기르고자 그 나름의 장치를 갖고 있다. 생존의 토대를 위한 장치처럼 보이는 경제도 실상은 어떤 기능과 품성을 기르기 위한 장치로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교육은 그런 장치 중에 중요한 요소이다. 진로교육이란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 장치 가운데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직업을 찾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아니라 일에 임하는 태도와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능력, 삶의 자세를 가르치는 것이 진로교육의 본래 역할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대안교육 현장에서도 진로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다. 부모들이 더 애가 타는 눈치다. 길찾기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부모와 교사들이 이제 품에서 떠나보내야하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계속하는 모습도 보인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부모들은 자식의 진로에 도움을 주었다. 가업을 잇게 하는 길도 있고, 인맥의 힘을 빌어 취업을 알선해 주는 것이 능력 있는 부모의 역할로 통한다. 20대 초반에 자력으로 자기 길을 열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안적인 교육을 시켰으니 대안적인 진로까지 열어줘야 한다면, 그 교육은 아무래도 대안적이지 못한 교육이 아닐까. 교육이 부실해서 에프터서비스를 해줘야 하는 것이라면 부실 교육을 보강할 일이다. 대학 학점까지 챙기는 매니저맘들과 대안적인 진로를 찾아주려는 대안맘들의 차이는 어디 있을까.

 

대안학교를 나와 서울 종로 거리에서 엿을 파는 친구가 있다. 길거리에서 엿장수를 보고 그 신명에 반해 가위질을 배우고 엿을 떼오는 곳을 알아내어 날마다 종로 거리에 나와 엿을 판다. 이 친구가 엿장수로 인생을 마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엿장수의 신명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어 새로운 세계로 연결지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대안적인 진로에 너무 연연할 게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는 아이들에게 맡겨둬도 좋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잘못 살지 않았다면 아이들도 잘못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사실 대안적인 진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웬만한 일은 하기에 따라서는 모두 대안적인 일이 될 수 있다. 웬만한 사람들과 웬만한 일을 웬만큼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어쩌면 대안적인 진로교육의 방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웬만함’이라는 애매한 표현 속에는 ‘원만함’이라는 덕목이 숨어 있다.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신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아이들은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현병호 발행인

(이 글은 2013년 6월에 발행된 격월간 <<민들레_87호>> 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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