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1년 오스트리아 의사 란트슈타이너가 혈액이 섞였을 때 적혈구의 응집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발견해 ABO 혈액형을 구분하면서 수혈 사고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 밝혀진 혈액형 종류는 150가지가 넘는다. 현재 국제수혈학회가 고지한 주요 혈액형은 30가지 정도인데, 수혈 시 반드시 구별해야 하는 혈액형은 A, B, O, Rh형이다. A, B, O, AB 유형으로 나누는 혈액형 성격설이 과학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20세기 초 혈액형이 발견된 이후 독일의 우생학자들이 이를 인종주의와 결부시켜 게르만족의 피는 A형, 아시아인은 B형이라 주장하며 A형은 우등 인종, B형은 열등 인종이라는 논리를 편 것이 혈액형 성격론의 기원이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에서도 우생학에 근거해 일본인은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A형이 많은데 비해 조선인은 B형이 많아 열등 민족이라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혈액형 성격설은 우생학의 피해자인 한국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다. 유럽인들은 A형과 O형이 80~90퍼센트를 차지해 혈액형 성격론이 발붙일 여지가 없기도 하다.
2차대전 이후 한동안 잊혀져 있던 혈액형 성격설은 1970년대에 일본의 한 방송국 프로듀서가 쓴 혈액형으로 아는 궁합血液型でわかる相性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본을 풍미했다. 혈액형에 따라 반 편성을 하는 유치원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리고 80년대에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대유행을 하게 된다. 당시는 뉴에이지 풍조가 세계를 휩쓸던 시기이기도 했다. 유리 겔러가 형상기억합금을 이용해 숟가락을 구부려 보이는 쇼를 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초능력 사기를 치던 시절이었다.
혈액형 성격설이 ‘론’으로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하나의 ‘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제는 상식이 되다시피 했지만,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혈액형 미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방송을 비롯한 대중문화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B형 남자’라는 가요와 <B형 남자친구>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B형’에 대한 편견이 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여성들 중에는 B형 남자를 기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혈액형 성격론의 허구성은 프랑스인의 44%, 스위스인의 53%가 A형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혈액형 성격론 대로라면 프랑스인과 스위스인들 태반은 내성적이고 소심해야 하고, 100% O형인 페루 원주민들은 모두 성격이 비슷해야 한다.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한다는 것은 유사과학도 아닌,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비과학이다. 혈액의 어떤 성분이 어떻게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지 규명한 연구가 전무하다. 실제 상관관계가 없는 것을 연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대중에게 한번 각인된 믿음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2004년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혈액형 성격설을 믿는 사람이 75%에 이를 정도였다(그중 20%는 결혼 상대를 결정할 때도 혈액형을 고려할 거라고 답했다). 2017년도 갤럽 조사에서는 58%가 여전히 신뢰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미루어 혈액형 미신이 쉽게 사라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미신도 사회적 현상이 되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으므로 미신이라 치부하고 간단히 넘길 일은 아니다. 서울 강남교육청은 2007년 중학교 신입생들에게 배포한 안내 책자에 ‘혈액형에 따른 공부법’을 소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혈액형 성격설이 붐을 이룰 때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심리연구 결과,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확증편향과 신념에 부합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자기충족적 예언의 경향성이 드러났다. 한국인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포츠신문에 실리는 띠별 오늘의 운세가 신문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재미로 보듯이 심심풀이에 그치면 괜찮지만 사회적 미신 수준으로 확산되면 사회문제가 된다. 사람을 보지 않고 그의 생년월일과 혈액형을 따지는 문화는 반지성주의가 뿌리내리기 쉬운 토양이다.
최근에는 뉴에이지 바람을 타고 들어온 점성술이 혈액형 성격설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황도 12궁 별자리는 전통적인 12지신 띠와 숫자가 같다 보니 왠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여겨지는 듯하다. 신세대들은 전통적인 사주 궁합보다 별자리 궁합을 더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양자리는 자기중심적이고 물고기자리는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다는 식의 별자리 성격설 또한 혈액형 성격설처럼 근거 없는 ‘썰’이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뭔가 좀더 로맨틱하고 과학적인(?) 이론 같은 인상을 준다.
별자리 애호가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심리학자 찰스 레이카트가 미국의 종합사회조사(GSS) 데이터를 토대로 확인한 결과 별자리와 성격이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치적 진보성(표본집단 40,637명)과 이타성(표본집단 3,004명) 등을 묻는 질문에 모든 별자리들이 비슷한 비율로 응답한 것이다. 그럼에도 태곳적부터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인간의 운명을 연결지어온 유구한 습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점성술과 연금술의 시대가 지난 지 오래지만, 인간 이해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그 수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1901년 오스트리아 의사 란트슈타이너가 혈액이 섞였을 때 적혈구의 응집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발견해 ABO 혈액형을 구분하면서 수혈 사고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 밝혀진 혈액형 종류는 150가지가 넘는다. 현재 국제수혈학회가 고지한 주요 혈액형은 30가지 정도인데, 수혈 시 반드시 구별해야 하는 혈액형은 A, B, O, Rh형이다. A, B, O, AB 유형으로 나누는 혈액형 성격설이 과학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20세기 초 혈액형이 발견된 이후 독일의 우생학자들이 이를 인종주의와 결부시켜 게르만족의 피는 A형, 아시아인은 B형이라 주장하며 A형은 우등 인종, B형은 열등 인종이라는 논리를 편 것이 혈액형 성격론의 기원이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에서도 우생학에 근거해 일본인은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A형이 많은데 비해 조선인은 B형이 많아 열등 민족이라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혈액형 성격설은 우생학의 피해자인 한국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다. 유럽인들은 A형과 O형이 80~90퍼센트를 차지해 혈액형 성격론이 발붙일 여지가 없기도 하다.
2차대전 이후 한동안 잊혀져 있던 혈액형 성격설은 1970년대에 일본의 한 방송국 프로듀서가 쓴 혈액형으로 아는 궁합血液型でわかる相性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본을 풍미했다. 혈액형에 따라 반 편성을 하는 유치원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리고 80년대에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대유행을 하게 된다. 당시는 뉴에이지 풍조가 세계를 휩쓸던 시기이기도 했다. 유리 겔러가 형상기억합금을 이용해 숟가락을 구부려 보이는 쇼를 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초능력 사기를 치던 시절이었다.
혈액형 성격설이 ‘론’으로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하나의 ‘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제는 상식이 되다시피 했지만,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혈액형 미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방송을 비롯한 대중문화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B형 남자’라는 가요와 <B형 남자친구>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B형’에 대한 편견이 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여성들 중에는 B형 남자를 기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혈액형 성격론의 허구성은 프랑스인의 44%, 스위스인의 53%가 A형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혈액형 성격론 대로라면 프랑스인과 스위스인들 태반은 내성적이고 소심해야 하고, 100% O형인 페루 원주민들은 모두 성격이 비슷해야 한다.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한다는 것은 유사과학도 아닌,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비과학이다. 혈액의 어떤 성분이 어떻게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지 규명한 연구가 전무하다. 실제 상관관계가 없는 것을 연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대중에게 한번 각인된 믿음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2004년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혈액형 성격설을 믿는 사람이 75%에 이를 정도였다(그중 20%는 결혼 상대를 결정할 때도 혈액형을 고려할 거라고 답했다). 2017년도 갤럽 조사에서는 58%가 여전히 신뢰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미루어 혈액형 미신이 쉽게 사라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미신도 사회적 현상이 되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으므로 미신이라 치부하고 간단히 넘길 일은 아니다. 서울 강남교육청은 2007년 중학교 신입생들에게 배포한 안내 책자에 ‘혈액형에 따른 공부법’을 소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혈액형 성격설이 붐을 이룰 때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심리연구 결과,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확증편향과 신념에 부합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자기충족적 예언의 경향성이 드러났다. 한국인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포츠신문에 실리는 띠별 오늘의 운세가 신문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재미로 보듯이 심심풀이에 그치면 괜찮지만 사회적 미신 수준으로 확산되면 사회문제가 된다. 사람을 보지 않고 그의 생년월일과 혈액형을 따지는 문화는 반지성주의가 뿌리내리기 쉬운 토양이다.
최근에는 뉴에이지 바람을 타고 들어온 점성술이 혈액형 성격설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황도 12궁 별자리는 전통적인 12지신 띠와 숫자가 같다 보니 왠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여겨지는 듯하다. 신세대들은 전통적인 사주 궁합보다 별자리 궁합을 더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양자리는 자기중심적이고 물고기자리는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다는 식의 별자리 성격설 또한 혈액형 성격설처럼 근거 없는 ‘썰’이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뭔가 좀더 로맨틱하고 과학적인(?) 이론 같은 인상을 준다.
별자리 애호가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심리학자 찰스 레이카트가 미국의 종합사회조사(GSS) 데이터를 토대로 확인한 결과 별자리와 성격이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치적 진보성(표본집단 40,637명)과 이타성(표본집단 3,004명) 등을 묻는 질문에 모든 별자리들이 비슷한 비율로 응답한 것이다. 그럼에도 태곳적부터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인간의 운명을 연결지어온 유구한 습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점성술과 연금술의 시대가 지난 지 오래지만, 인간 이해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그 수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