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부터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들이 개발되어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알 수 없는 사람 속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온갖 인간유형론을 낳고 있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인간만큼이나 성격유형론이 나누는 성격이 다양하지 않은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개별성 못지않게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유형론은 인간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형론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이란 복잡한 존재를 특정 유형으로 분류하는 유형론이 갖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기질과 체질, 성격에 따라 인간의 유형을 나누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는데, ‘이론’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고 학문으로 연구되는 것은 ‘성격 5요인론’ 정도다. 5요인론은 다양성을 인정하되 그 다양한 현상을 꿰는 하나의 원리를 제시한다. 인간을 유형으로 나누지 않고 다섯 가지 경향성의 조합으로 설명하면서, 보편성에 기반해 개별성을 파악할 수 있게 돕는다.
4체액설, 4기질론, 사상체질론처럼 많은 이론들이 인간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눈다. 4는 너무 단순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수로, 다양한 현상을 범주화하기에 좋다. 현상적으로 볼 때 대칭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이원론으로 설명하기에 용이하지만 이는 너무 단순해서 다양한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주역은 8괘, 64괘로 세상의 온갖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좀 더 단순화해 네 가지로 압축하면 인식하기에 훨씬 용이하다.
기질론과 체질론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주장한 4원소설에 근거한 히포크라테스의 4체액설은 2천 년 가까이 서양 의료체계의 원리였다. 히포크라테스는 인체를 이루는 기본 성분인 혈액, 점액, 황담액, 흑담액 네 가지 체액의 불균형으로 질병이 생긴다고 보았다. 질병을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신체의 이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지만, 치료 효과 면에서 신뢰할 만한 이론은 아니었다. 열이 오르면 피를 빼는 사혈 요법을 주로 시술했는데, 열이 오르는 수백 가지 원인을 두고 한 가지 대증요법으로 만병을 치료하기는 힘들다. 무리한 사혈로 생명을 잃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세균과 바이러스가 발견되고 질병의 원인과 증상의 인과관계를 규명할 수 있게 되어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4체액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편 발도르프 교육에서 아이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이론인 슈타이너의 4기질론은 히포크라테스 4체액설의 변형판이다. 의료용에서 교육용 버전으로 변형된 것이다. 슈타이너는 사람마다 우세한 기질이 한두 가지 있어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성장 과정에서 그때그때 우세하게 나타나는 기질이 달라 기질이 바뀌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슈타이너 기질론은 아동발달론에 접목되어 독특한 발도르프 교육과정이 만들어졌다. 기질론과 발달론은 오늘날에도 발도르프 교사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슈타이너 4기질론과 비슷한 시기에 이 땅에 등장한 이제마의 사상체질론은 질병의 원인을 체액의 부조화가 아닌 장기의 부조화로 본다는 점에서 4체액설보다 과학적인 이론이다. 체질에 따라 치료를 달리해야 한다는 사상체질론은 주역의 원리를 인체에 적용해 비장, 신장, 위장, 폐와 관련된 장기의 실함과 약함을 기준으로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으로 구분한다. 이에 기반한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전통적인 중의학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이론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체질론이 과학적이지 못한 것은 한의사마다 체질을 다르게 판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방송에 출연한 4명의 한의사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체질을 저마다 다른 체질로 판정했다.)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한의사는 오링테스트로 사람들의 체질을 감별해 유사과학 논란이 일기도 했다.
자신의 체질을 알고 그에 맞는 양생법을 익혀 궁극적으로 음양의 균형이 잡힌 ‘음양화평지인’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은 사상의학은 실증적인 의학이라기보다 철학적 사유에 가깝다. 수비학(數祕學)처럼 4라는 숫자에 맞추어 도식화되어 있는 이제마의 사상은 성리학과 도교의 이념에 근거해 연역적으로 풀어낸 이론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반인들 사이에 사상체질론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이를 적용한 식이요법, 학습법 등 다양한 ‘썰’이 생겨나고 있다. 체질에 따른 학습법을 개발한 송재희의 사상체질학습법은 사람에 따라 효과적인 학습법이 다를 수 있다는 데 주목한 점에서 의미 있지만 체질론 자체가 혈액형 성격설처럼 비과학적인 만큼 학습이론으로서는 무리가 있다.
실용적인 인간 이해, 에니어그램
성격을 9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에니어그램(Enneagram: 그리스어로 9를 뜻하는 ennea와 도형을 뜻하는 gram의 합성어)은 기원이 분명치 않은데,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공동체라 할지라도 같이 살기 힘든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므로 갈등을 해결하고자 고심한 결과가 에니어그램 같은 심리유형론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이를 현대에 전승한 대표적인 인물은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아르메니아 출신의 구르지예프다. 수피댄스와 에니어그램을 수행의 방편으로 활용한 구르지예프는 공동체에 같이 살기 힘든 사람 한 명을 일부러 고용해 말썽이 일어나게 해 제자들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 드러나게 했다고 한다.
에니어그램을 과학적인 성격이론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오늘날 실용적인 목적으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AT&T, 제록스, 삼성 같은 대기업에서 인사관리와 조직 운영에 활용하고 있으며 드라마와 영화, 만화 같은 스토리텔링 산업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을 설정하는 데 좋은 도구로 인정받고 있다. 인물 간의 성격이 뒤섞여 후반에 캐릭터가 비슷비슷해지거나 초반에는 결코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캐릭터가 붕괴되는 것을 막아준다. 헐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는 에니어그램이 필수 학습과정이라고 한다. 헐리우드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정형화되고 역할에 고착되는 것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교육과 대안교육을 막론하고 교사연수에서도 애니어그램은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상담심리 교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교사들도 아이들을 좀 더 잘 이해하고자 연수에 참여하곤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주목을 끈 신천지에서 애니어그램을 수단으로 포섭 대상에게 접근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일부 기독교계에서도 전도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일찍이 예수회 신부들 사이에서도 영성교육의 방편으로 활용되었는데, 교황청은 애니어그램을 뉴에이지 운동의 산물로 보고 이를 가톨릭 영성교육에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에니어그램은 성격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는데, 각 유형의 양 날개와의 상호작용에 따라 변화를 보이기도 하고, 세 유형을 짝짓는 다양한 분류법에 의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스텐퍼드대 등에서 에니어그램을 연구하고 있는 것도 그 속에 담긴 사상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또한 MBTI처럼 저작권을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보니 더 널리 활용되는 편이다. 90년대 이후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에니어그램은 2천년대 들어 심리학 열풍을 타고 빠르게 확산되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 출간된 관련 서적만도 150종이 넘는다는 사실이 그 인기를 말해준다.
MBTI가 이분법으로 성격을 나누는데 비해 에니어그램은 삼분법에 기초하고 있다.(에너지 성격에 따라 머리-가슴-장으로 나누는 전통적 분류법 외에 대인관계 유형에 따라 회피-의존-적대의 3가지 카테고리로 나누는 방법 등 몇 가지 분류법이 있다.) 유형을 파악하기 쉬울 뿐더러 각각의 유형에 대해 선입견이 배제된 숫자로 표시하는 것도 에니어그램의 장점이다. 강점에 주목하는 MBTI의 경우 각각의 성격이 불연속적인데 반해 에니어그램은 약점에 주목하면서 연속되어 있는 성격유형의 상호작용 속에서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다. 이분법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MBTI에 비해 에니어그램은 인간의 심층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종의 생존과 개체의 성격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환경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처럼 전염병이 쉽게 퍼지는 고온다습한 지역에서는 내향적인 성격이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 욕구가 많은 외향적인 사람이 전염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면, 코로나19로 인해 내향적인 사람들이 증가할 거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살아남기에 방콕족이 더 유리한 환경이 오래 지속되면 외향성이 점점 줄어들지도 모른다.
성격은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문어를 대상으로 성격 5요인 이론을 실험하기도 했는데 모험심이 강한 문어 잉키Inky는 뉴질랜드 국립수족관을 탈출해 바다로 가는 길을 찾은 반면, 수족관에 안전하게 머무는 쪽을 선택한 문어도 있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동물의 경우 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구성원과 위험을 회피하는 구성원을 다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일종의 스페어타이어 전략이다. 종의 차원에서 다양한 성격은 생존 전략의 하나일지 모른다.
예비자원이 없는 집단은 변화의 시기에 동원할 자원이 없어 위기대응이 힘들다. 안정기에는 하릴없이 백수건달로 지내다가도 비상시에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재난 영화에서 흔히 영웅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건달 부류인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안정기에 발휘되는 역량과 비상시에 필요한 역량은 다르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종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비상시를 대비하는 종의 생존 전략으로 이해하면 내 눈에 이상해 보이는 사람도 좀더 여유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주구장창 게임만 하고 있는 아이를 종의 차원에서 여유롭게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개인의 미래와 종의 미래 사이에는 커다란 갭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멀찍이 떨어져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조금은 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다. 위기에 처한 맹상군이 성 밖으로 탈출할 수 있게 도운 사람은 도둑과 닭 울음소리 흉내를 잘 내는 식객이었다. 평상시라면 밥만 축내는 식객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위기 상황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일개미 집단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집단의 20%는 놀고먹는다고 한다. 일본 홋카이도대학 연구진이 5개월 동안 일개미 집단을 관찰한 결과 열심히 일하는 개미가 20%, 보통으로 일하는 개미가 60%, 빈둥거리는 개미가 20%였는데, 근면한 일개미들만으로 집단을 구성해도 그중 20%는 또 빈둥거렸다. 인간의 조직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일개미 법칙’이라 부른다. 이 법칙은 근면성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속한 성격이라기보다 집단의 맥락 속에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특성임을 말해준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을 이해할 때 두 가지 측면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성격의 양극단보다 중간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 그리고 어떤 특성이 개인에게 속한 자질이나 성격이기보다 집단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개인에게 발현되는 특성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실성뿐만 아니라 외향성이나 친화성 같은 특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격유형론은 이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성격 5요인론이 놓치고 있는 지점은 두 번째 지점이다. 성격이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의해 발현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성격은 더욱 유동적이다.
아이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은 환경이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말해준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아이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아이를 바라볼 때 사물이 아닌 사건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까닭이다. 그릇을 빚는 찰흙은 흙의 보편적인 특성과 함께 저마다 고유한 성질도 갖고 있지만 물과 공기, 불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그때그때 조금씩 다른 성질을 띤다. 뛰어난 도공은 흙의 상태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읽으면서 적절히 대응할 줄 안다. 교사 또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의 토대 위에 개별적인 발달과정과 기질의 변수까지 헤아리는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양육과 교육은 상호작용이 빚어내는 시간의 예술이다.
* 이 글은 격월간 민들레 137호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옛날부터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들이 개발되어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알 수 없는 사람 속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온갖 인간유형론을 낳고 있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인간만큼이나 성격유형론이 나누는 성격이 다양하지 않은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개별성 못지않게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유형론은 인간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형론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이란 복잡한 존재를 특정 유형으로 분류하는 유형론이 갖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기질과 체질, 성격에 따라 인간의 유형을 나누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는데, ‘이론’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고 학문으로 연구되는 것은 ‘성격 5요인론’ 정도다. 5요인론은 다양성을 인정하되 그 다양한 현상을 꿰는 하나의 원리를 제시한다. 인간을 유형으로 나누지 않고 다섯 가지 경향성의 조합으로 설명하면서, 보편성에 기반해 개별성을 파악할 수 있게 돕는다.
4체액설, 4기질론, 사상체질론처럼 많은 이론들이 인간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눈다. 4는 너무 단순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수로, 다양한 현상을 범주화하기에 좋다. 현상적으로 볼 때 대칭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이원론으로 설명하기에 용이하지만 이는 너무 단순해서 다양한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주역은 8괘, 64괘로 세상의 온갖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좀 더 단순화해 네 가지로 압축하면 인식하기에 훨씬 용이하다.
기질론과 체질론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주장한 4원소설에 근거한 히포크라테스의 4체액설은 2천 년 가까이 서양 의료체계의 원리였다. 히포크라테스는 인체를 이루는 기본 성분인 혈액, 점액, 황담액, 흑담액 네 가지 체액의 불균형으로 질병이 생긴다고 보았다. 질병을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신체의 이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지만, 치료 효과 면에서 신뢰할 만한 이론은 아니었다. 열이 오르면 피를 빼는 사혈 요법을 주로 시술했는데, 열이 오르는 수백 가지 원인을 두고 한 가지 대증요법으로 만병을 치료하기는 힘들다. 무리한 사혈로 생명을 잃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세균과 바이러스가 발견되고 질병의 원인과 증상의 인과관계를 규명할 수 있게 되어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4체액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편 발도르프 교육에서 아이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이론인 슈타이너의 4기질론은 히포크라테스 4체액설의 변형판이다. 의료용에서 교육용 버전으로 변형된 것이다. 슈타이너는 사람마다 우세한 기질이 한두 가지 있어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성장 과정에서 그때그때 우세하게 나타나는 기질이 달라 기질이 바뀌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슈타이너 기질론은 아동발달론에 접목되어 독특한 발도르프 교육과정이 만들어졌다. 기질론과 발달론은 오늘날에도 발도르프 교사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슈타이너 4기질론과 비슷한 시기에 이 땅에 등장한 이제마의 사상체질론은 질병의 원인을 체액의 부조화가 아닌 장기의 부조화로 본다는 점에서 4체액설보다 과학적인 이론이다. 체질에 따라 치료를 달리해야 한다는 사상체질론은 주역의 원리를 인체에 적용해 비장, 신장, 위장, 폐와 관련된 장기의 실함과 약함을 기준으로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으로 구분한다. 이에 기반한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전통적인 중의학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이론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체질론이 과학적이지 못한 것은 한의사마다 체질을 다르게 판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방송에 출연한 4명의 한의사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체질을 저마다 다른 체질로 판정했다.)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한의사는 오링테스트로 사람들의 체질을 감별해 유사과학 논란이 일기도 했다.
자신의 체질을 알고 그에 맞는 양생법을 익혀 궁극적으로 음양의 균형이 잡힌 ‘음양화평지인’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은 사상의학은 실증적인 의학이라기보다 철학적 사유에 가깝다. 수비학(數祕學)처럼 4라는 숫자에 맞추어 도식화되어 있는 이제마의 사상은 성리학과 도교의 이념에 근거해 연역적으로 풀어낸 이론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반인들 사이에 사상체질론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이를 적용한 식이요법, 학습법 등 다양한 ‘썰’이 생겨나고 있다. 체질에 따른 학습법을 개발한 송재희의 사상체질학습법은 사람에 따라 효과적인 학습법이 다를 수 있다는 데 주목한 점에서 의미 있지만 체질론 자체가 혈액형 성격설처럼 비과학적인 만큼 학습이론으로서는 무리가 있다.
실용적인 인간 이해, 에니어그램
성격을 9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에니어그램(Enneagram: 그리스어로 9를 뜻하는 ennea와 도형을 뜻하는 gram의 합성어)은 기원이 분명치 않은데,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공동체라 할지라도 같이 살기 힘든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므로 갈등을 해결하고자 고심한 결과가 에니어그램 같은 심리유형론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이를 현대에 전승한 대표적인 인물은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아르메니아 출신의 구르지예프다. 수피댄스와 에니어그램을 수행의 방편으로 활용한 구르지예프는 공동체에 같이 살기 힘든 사람 한 명을 일부러 고용해 말썽이 일어나게 해 제자들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 드러나게 했다고 한다.
에니어그램을 과학적인 성격이론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오늘날 실용적인 목적으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AT&T, 제록스, 삼성 같은 대기업에서 인사관리와 조직 운영에 활용하고 있으며 드라마와 영화, 만화 같은 스토리텔링 산업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을 설정하는 데 좋은 도구로 인정받고 있다. 인물 간의 성격이 뒤섞여 후반에 캐릭터가 비슷비슷해지거나 초반에는 결코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캐릭터가 붕괴되는 것을 막아준다. 헐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는 에니어그램이 필수 학습과정이라고 한다. 헐리우드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정형화되고 역할에 고착되는 것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교육과 대안교육을 막론하고 교사연수에서도 애니어그램은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상담심리 교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교사들도 아이들을 좀 더 잘 이해하고자 연수에 참여하곤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주목을 끈 신천지에서 애니어그램을 수단으로 포섭 대상에게 접근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일부 기독교계에서도 전도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일찍이 예수회 신부들 사이에서도 영성교육의 방편으로 활용되었는데, 교황청은 애니어그램을 뉴에이지 운동의 산물로 보고 이를 가톨릭 영성교육에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에니어그램은 성격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는데, 각 유형의 양 날개와의 상호작용에 따라 변화를 보이기도 하고, 세 유형을 짝짓는 다양한 분류법에 의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스텐퍼드대 등에서 에니어그램을 연구하고 있는 것도 그 속에 담긴 사상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또한 MBTI처럼 저작권을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보니 더 널리 활용되는 편이다. 90년대 이후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에니어그램은 2천년대 들어 심리학 열풍을 타고 빠르게 확산되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 출간된 관련 서적만도 150종이 넘는다는 사실이 그 인기를 말해준다.
MBTI가 이분법으로 성격을 나누는데 비해 에니어그램은 삼분법에 기초하고 있다.(에너지 성격에 따라 머리-가슴-장으로 나누는 전통적 분류법 외에 대인관계 유형에 따라 회피-의존-적대의 3가지 카테고리로 나누는 방법 등 몇 가지 분류법이 있다.) 유형을 파악하기 쉬울 뿐더러 각각의 유형에 대해 선입견이 배제된 숫자로 표시하는 것도 에니어그램의 장점이다. 강점에 주목하는 MBTI의 경우 각각의 성격이 불연속적인데 반해 에니어그램은 약점에 주목하면서 연속되어 있는 성격유형의 상호작용 속에서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다. 이분법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MBTI에 비해 에니어그램은 인간의 심층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종의 생존과 개체의 성격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환경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처럼 전염병이 쉽게 퍼지는 고온다습한 지역에서는 내향적인 성격이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 욕구가 많은 외향적인 사람이 전염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면, 코로나19로 인해 내향적인 사람들이 증가할 거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살아남기에 방콕족이 더 유리한 환경이 오래 지속되면 외향성이 점점 줄어들지도 모른다.
성격은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문어를 대상으로 성격 5요인 이론을 실험하기도 했는데 모험심이 강한 문어 잉키Inky는 뉴질랜드 국립수족관을 탈출해 바다로 가는 길을 찾은 반면, 수족관에 안전하게 머무는 쪽을 선택한 문어도 있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동물의 경우 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구성원과 위험을 회피하는 구성원을 다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일종의 스페어타이어 전략이다. 종의 차원에서 다양한 성격은 생존 전략의 하나일지 모른다.
예비자원이 없는 집단은 변화의 시기에 동원할 자원이 없어 위기대응이 힘들다. 안정기에는 하릴없이 백수건달로 지내다가도 비상시에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재난 영화에서 흔히 영웅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건달 부류인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안정기에 발휘되는 역량과 비상시에 필요한 역량은 다르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종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비상시를 대비하는 종의 생존 전략으로 이해하면 내 눈에 이상해 보이는 사람도 좀더 여유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주구장창 게임만 하고 있는 아이를 종의 차원에서 여유롭게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개인의 미래와 종의 미래 사이에는 커다란 갭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멀찍이 떨어져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조금은 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다. 위기에 처한 맹상군이 성 밖으로 탈출할 수 있게 도운 사람은 도둑과 닭 울음소리 흉내를 잘 내는 식객이었다. 평상시라면 밥만 축내는 식객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위기 상황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일개미 집단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집단의 20%는 놀고먹는다고 한다. 일본 홋카이도대학 연구진이 5개월 동안 일개미 집단을 관찰한 결과 열심히 일하는 개미가 20%, 보통으로 일하는 개미가 60%, 빈둥거리는 개미가 20%였는데, 근면한 일개미들만으로 집단을 구성해도 그중 20%는 또 빈둥거렸다. 인간의 조직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일개미 법칙’이라 부른다. 이 법칙은 근면성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속한 성격이라기보다 집단의 맥락 속에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특성임을 말해준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을 이해할 때 두 가지 측면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성격의 양극단보다 중간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 그리고 어떤 특성이 개인에게 속한 자질이나 성격이기보다 집단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개인에게 발현되는 특성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실성뿐만 아니라 외향성이나 친화성 같은 특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격유형론은 이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성격 5요인론이 놓치고 있는 지점은 두 번째 지점이다. 성격이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의해 발현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성격은 더욱 유동적이다.
아이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은 환경이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말해준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아이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아이를 바라볼 때 사물이 아닌 사건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까닭이다. 그릇을 빚는 찰흙은 흙의 보편적인 특성과 함께 저마다 고유한 성질도 갖고 있지만 물과 공기, 불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그때그때 조금씩 다른 성질을 띤다. 뛰어난 도공은 흙의 상태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읽으면서 적절히 대응할 줄 안다. 교사 또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의 토대 위에 개별적인 발달과정과 기질의 변수까지 헤아리는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양육과 교육은 상호작용이 빚어내는 시간의 예술이다.
* 이 글은 격월간 민들레 137호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