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빚을 지는 일과 뿌리를 내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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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세상에 빚을 진 채 태어난다. 부모와 사회의 도움으로 생명을 얻게 되며, 수천 년에 걸쳐 선조들이 일군 유형무형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다시 말해 빚쟁이로 태어나는 것이다. 자산과 함께 빚도 물려받지만 자산이 압도적으로 많다. 선조들이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한다면 후손들에게 약간의 체면치레는 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세대 또한 후세대에 자산과 빚을 물려줄 것이다. 그렇게 에너지는 연결된다. 자신이 부모와 사회에 빚을 지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세상과 긴밀하게 엮이지 않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자기가 할 일을 찾게 된다.

빚을 진다는 것은 곧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무중력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려서 부모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에게 뭔가 보답을 하고자 노력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그만큼 끈끈해지고, 부모 말을 듣게 된다. 부모 말을 너무 잘 들어도 문제가 되긴 하지만, 먼저 가족 안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울타리가 확대되는 만큼 사회에서도 제 역할을 찾게 된다. 자신이 사회에 빚지고 있음을 자각하는 만큼 사회에서 역할이 생겨난다.

청소년기 진로교육과 경제교육의 기본은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아예 구직을 포기한 청년 백수인 니트족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한다. 무중력 상태에 놓인 청년들은 사회와 겉돌고 있다. 일본의 한 방송사에서 니트족을 취재하면서 “일을 왜 안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청년이 “일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해 일본 사회를 놀라게 만들었다. 일종의 정신승리법으로 분석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사회와의 관계가 잘못 설정된 것이다. 자신이 사회에 빚진 존재임을 모르고 사회를 이기려 든다.

가난하던 시절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는 누이나 다른 형제들에게 돌아갈 몫을 장남이 독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정된 자원을 ‘될 놈’에게 몰아주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특혜를 누린 덕분에 성공한 장남은 집안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자신의 특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성공해서도 형제들을 돌보지 않았지만, 부모형제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두고두고 빚을 갚았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그 빚은 아무리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이다.

최근 국민의힘 대선 캠프에 합류한 전 녹색당 대표 신지예는 자신이 빚을 졌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제 힘으로 큰 것이 아니라 진보 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힘을 실어준 덕분에 컸음에도 제가 잘 나서 큰 줄 알면 배신은 정해진 수순이다. 빚진 것을 아는 사람은 쉽게 배신하지 못한다. 엮여 있기 때문이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철새 정치인들은 어디에도 빚진 마음이 없는 것이다. 빚을 지고도 진 줄 모르고 가볍게 날아다니지만 언젠가 청구서가 날아오기 마련이다. 철새 정치인의 말로가 좋은 경우는 없다.

이념 또는 관념의 에너지로 사는 사람은 쉽게 변절한다. 에너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념이 민중이든 환경이든 ‘위하여’ 사는 삶은 쉽게 지친다. 차렷 자세로 오래 서 있기 힘든 것과 같다. 빚을 지고 사는 것은 ‘의하여’ 사는 것이며, 에너지 흐름에 올라타고 가는 것이다. 의하여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지만 위하여는 맞물려 있지 않다. 이념과 행위를 억지로 이어 놓은 것이어서 쉽게 분리되고 또 쉽게 다른 것으로 교체된다. 

에너지로 연결되면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걸음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앞선 걸음이 전해주는 에너지를 이어받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앞선 걸음이 전해주는 중력가속도와 반작용의 힘, 관성의 힘으로 걷는다. 모든 걸음은 앞선 걸음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걸음은 이어진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의 걸음들이다. 앞선 걸음이 전해주는 에너지를 이어받아 나의 한 걸음을 옮겨 다음 걸음으로 이어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