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쓸모없음의 가치

민들레
20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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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대에 나의 꿈은 ‘삼류’ 기타리스트였다. 일류 기타리스트는 꿈도 꿀 수 없으니 삼류 정도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음악에 소질은 없지만 좋은 소리에 대한 욕심은 있어 수제 기타를 장만해 틈틈이 연습했다. 하지만 마음은 저만치 앞서 있고 손은 따라주지 않으니 금세 지쳤다. ‘틈틈이’의 틈이 점점 벌어지다 아주 멀어지기를 몇 차례 되풀이하다 보니 십여 년이 흘렀다. 그런데 이런 게으른 기타 애호가들 덕분에 기타 제작업체도 살고 기타 연주자의 저변이 넓어진다.

삼류 기타리스트를 꿈꾸는 어중이들이 많아질 때 군계일학 같은 아티스트가 등장하는 법이다. 골목마다 피아노교습소가 들어서고 웬만한 아이들은 다들 체르니 정도는 칠 줄 알게 되면서 조성진 같은 피아니스트도 등장하게 된다. 수많은 씨앗들 속에서 몇 개의 씨앗이 싹을 틔우듯이, 거품이 일면 그 속에서 혜성처럼 누군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마을마다 내로라하는 기타리스트가 있을 때 로드리고 같은 연주자가 태어나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같은 명곡이 탄생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대중문화는 함께 자란다. 피아노교습소가 골목마다 생겨나지 않았으면 피아노 음악은 아직도 클래식의 골방에 갇혀 호사가들의 후원을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권력과 재력, 인기는 거의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이기에 점점 그 순환이 빨라지는 방향으로 세상이 바뀌어왔다. 권력도 돈도 유행도 돌고 도는 것이 현대 사회의 모습이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근대화는 표준화를 통해 유동성을 높인다. 유동성이 높아지면 균일화가 진척되고 그 결과 유동성이 떨어져 사회가 정체될 조짐이 보이면 또 새로운 유행이 등장하여 에너지 낙차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는 신상품으로, 대중문화는 새로운 장르로, 민주주의는 새로운 권력으로 끊임없이 에너지 낙차를 만들어냄으로써 유동성을 다시 높인다. 현대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돌고 도는 원리다.

유동성이 높아지는 것이 반드시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근대화의 피치 못할 결과이므로 거부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고립된 삶을 자초하는 길이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이 대다수 인간들에게 더 힘든 삶을 안겨주었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너지 낙차가 없는 평등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는 아니다. 사회가 정체되면 퇴행하기 마련이다. 아미시 공동체처럼 근친상간이 예사로운 일이 된다. 근대화라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이상 부작용을 줄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근대 이후 소수의 엘리트가 과학기술 영역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을 선도하고 있지만, 그들이 두각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것은 절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이다. 눈에 띄는 엘리트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언뜻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쓸모 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쓸모 있는 것만 취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을 놓치게 된다. 모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습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효율성을 추구한다며 당장 필요한 것만 습득하려는 자세는 정작 원하는 그것도 놓치게 만든다. 연결지점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수학의 개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제곱근 개념은 무리수, 함수, 집합 개념으로 이어진다. 시험에 대비해 문제만 죽어라 푸는 학생보다 전체의 맥락 속에서 여러 개념들을 연결 지으며 생각할 줄 아는 학생이 진짜 수학을 잘하는 것이다.

코로나 패데믹이 가르쳐주었듯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의 쓸모는 연결의 맥락에 따라 있음과 없음이 바뀐다. 죽을 뻔한 맹상군을 살린 것은 도둑과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공부를 못하는 아이도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공부를 잘한다고 뽐낼 일도, 못한다고 주눅들 일도 아니다. 교육은 모든 아이들이 자존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돕는 일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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