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문화와 권력

민들레
20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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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들레 118호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대중문화와 권력의지

최근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 1위를 한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는 한류바람이 국소적 또는 일시적 팬덤 현상이 아님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화는 곧 소통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노래와 춤은 통한다.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물꼬가 전방위적으로 열리고 있는 징후가 보인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미투운동이나 남북 간의 평화 바람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클래식이 계몽시대의 산물이라면 팝은 소통의 시대 음악이다. 엘리트들은 여전히 대중을 계몽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게 된 대중은 더 이상 지식권력의 계몽을 바라지 않는다. 문자혁명이 지식권력을 낳았다면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시작된 매스미디어혁명은 문화권력을 낳았다. 문화권력은 한때 몇몇 사람들에게 집중되었지만 이제는 대중이 문화권력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은 작동 방식이 비슷하다.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 권력이 생겨난다. 정치인이 연예인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둘 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내가나왔으면정말좋겠네병’, 줄여서 ‘안철수병’은 증상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정치인, 연예인들이 걸리는 질병이다.

  사실 이 병의 바이러스는 모든 사람에게 잠복해 있어 감기처럼 누구나 시시때때로 앓는다. 주위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 쓰게 하고, 주목 받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이 바이러스 덕분에 인간사회가 유지되는 건지도 모른다. 이 바이러스의 이름은 다름 아닌 ‘권력의지’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돈은 이 권력의지가 물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대중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면 대중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엘리트들은 대중문화를 하위문화로 폄하하려 들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기가 싫기 때문일 따름이다. 지식의 갑질은 역사가 오랜 일이어서 쉽사리 고쳐지지 않겠지만, 이제는 그 갑질이 통하지 않는 사회로 가고 있다. 보수와 진보 진영의 주류 언론이었던 ‘조중동’과 ‘한경오’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권력의 대중화 시대다. 인터넷과 SNS라는 새로운 소통수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소통의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학교는 여전히 계몽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오늘날 학교 문제의 핵심이다. 아이들은 이미 쌍방향 소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 교사들은 교단 위에서 아직도 계몽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자신들의 아이돌을 만들어내고 그들의 문화를 세계에 퍼트리면서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는 아이들을 교사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문자보다 이미지, 책보다 영상에 더 익숙한 신세대는 웬만한 정보들을 유튜브로 접하고 있다. 그런 현실을 반영해서인지 최근 공교육에 영화 과목을 신설하자는 움직임도 보인다. 영화관에 오는 아이들을 잡기 위해 학생주임이 극장에 잠복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건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영화 과목이 정규 교과가 되면 과연 문화강국의 길이 열릴까? 오히려 아이들이 영화와 멀어지지않을까.



갑질사회와 학교 밖 아이들

한국의 문화 역량이 눈에 띄게 자라고 있다. 한류도 촛불혁명도 하나의 큰 흐름 속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국인들의 단점으로 꼽혔던 ‘빨리빨리’가 IT기술과 만나면서 변화를 촉진하기도 한다. 학교는 죽을 쑤고 있지만, 비교적 구김살 없이 자란 신세대들이 국경의 벽이 없는 온라인 세상에서 만들어가는 소통의 문화가 세상을 바꿔놓고 있다.

  대안교육은 문화예술 분야에 강점이 있다. 이쪽에 재능과 적성을 타고난 아이들일수록 제도권 교육을 더 못 견뎌 다른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양성에 열린 태도를 갖고 있는 대안학교 문화에 젖다 보면 감수성이 더 예민해지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분야로 진출하는 아이들도 많은 편이다.

  문제는 문화예술계가 복마전 같은 곳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의 순수한 열정과 존경심을 악용하는 어른들이 적지 않다. 최근 미투운동이 문화예술계를 강타한 것은 그곳이 그만큼 음습한 사설 권력이 뿌리내리고 있는 곳임을 반증한다. ‘망나니 짓’도 예술가의 객기 정도로 미화된다. 인맥과 연줄로 얽힌 그 바닥은 권력자의 눈 밖에 나면 살아남기 힘든 구조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십대들에게는 위험한 세계이기도 하다.

  이십여 년 전 ‘학교 밖에도 길이 있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돌아보니 학교 밖에는 길도 있지만 함정도 많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에는 함정이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첫 책 『학교를 넘어서』를 펴내면서 “우리는 적을 만났다. 그 적은 바로 우리였다”라는 월트 켈리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 안의 함정에 대해 경계했지만, 그 함정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아이들은 약자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을의 위치에 있다. 학교를 나온 아이들은 을을 넘어 ‘병’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새끼 개구리들에게 학교가 우물 안처럼 안전한 함정이라면, 학교 바깥은 위험한 함정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곳이다. 아이들을 도우려는 좋은 어른들도 많지만, 길을 찾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간절한 마음과 성실성을 이용해 도제처럼 부리면서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도제 제도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악용될 소지가 많은 학습 시스템이다. 도제라는 명목으로 착취가 정당화되고 질 나쁜 마스터들이 학대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장인이라고 해서 인간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사회적 명성이 인간성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 홈스쿨러 가정이 최근 어떤 청소년 연극단체 대표를 고발한 사건은 그 일단을 보여준다. 극단 연출가는 열아홉 살 청소년을 배우 오디션에 합격시켜 놓고는 극단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게 했다. “카페를 안정시키는 것이 어려운 친구들이 연기할 수 있게 돕는 너의 사명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널 최고의 배우로 만들어주겠다”면서. 수시로 폭언과 폭행을 당하면서도 몇 년을 버티던 청년은 결국 심신이 피폐해져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 청년의 경우 다행히 부모가 늦게나마 사실을 인지하고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법적 대응과 국민청원 등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진실공방을 다투는 기나긴 과정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경우 교묘한 학대와 착취를 증명하기가 어려워 학대자는 엉성한 법망을 피해간다. 부모의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경우 그 거미줄에서 스스로 헤어나기는 더욱 어렵다. 사회적 감시와 검증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절실하다.



권력과 모럴 해러스먼트

우리가 아름다운 동화로만 알고 있는 『어린왕자』 이야기가 사실은 모럴 해러스먼트1를 당한 왕자가 스스로 세상을 떠난 슬픈 이야기라고 말하는 야스토미 선생의 해석은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2 장미와 왕자의 관계는 결코 아름답지 않으며,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엉터리 상담사일 뿐이라는 냉철한 시각은 삶의 또 다른 진면목을 드러내준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두루뭉술한 여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장미의 매력에 사로잡힌 왕자는 장미의 비위를 맞추느라 우울증에 걸릴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자기 별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 왕자는 지구별의 사막에서 여우를 만나 길들임에 대한 조언을 듣고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결국 스스로 뱀에 물리고 만다. 교묘하게 학대를 당하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는 ‘이중구속’ 상태에 빠지는 모럴해러스먼트는 연인, 부모 자식, 상사와 부하 등 어떤 관계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자신이 학대를 당하는 줄도 모르고 교묘한 폭력에 시달리면서 우울증을 앓다 제 발로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정서적 폭력이 눈에 보이는 폭력보다 더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왕자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상당수는 사실상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죽음도 그럴 수 있다.

학교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 자책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모럴 해러스먼트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왕따 같은 학대를 당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학교 시스템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학대당하면서 자신을 탓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이들은 사실상 학교 시스템에 타살당한 거라고 봐야 한다. 확실한 자기편을 찾지 못하면 그렇게 된다. 부모마저 아이편이 아닐 때 아이는 기댈 곳이 없어진다.

  사회화 과정이란 피아 구분을 하고 자기편을 늘려가는 과정이다. 학교가 아이들에게 해줘야 하는 일이지만 제대로 하고 있진 못하다. 학교 밖으로 나와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부모의 지지를 받는 아이들은 그나마 버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의 경우 사회를 적으로 돌리는 비행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아이들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주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는 없다. 옷도 갈아입히고 먹을 것도 주고 기운을 차리도록 도와줘야 한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사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사람을 살리려면 끝까지 살려야 하는 법이다. 같은 편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약자를 오히려 물에 빠트리는 짓을 예사로 하는 이들이 있다. 갑질이 몸에 밴 인간들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권력도 기어이 행사하고자 한다. 소인배들일수록 그렇다. 군대 경험이 있는 이들은 몸으로 겪어서 안다. 짬밥 수가 늘어나면 저절로 갑의 위치에 서게 되는 군대 시스템은 졸병 시절 당한 만큼 자신도 갑질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조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에 는 군대 문화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갑을 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본질이 권력 관계다. 연인 사이에서는 흔히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가 된다. 연인 사이의 ‘밀당’은 일종의 권력 다툼이라 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면 밀당은 성립하지 않는다(하지만 약자가 강자의 약점을 잡고 있으면 가능하다. 최근 북미 관계처럼 힘의 절대적 우위에 있는 미국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지점을 확보하고 있으면 약자도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

  권력이 작동하는 갑을 관계는 본질상 비대칭 관계이지만 그 비대칭이 심한 경우는 사회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갑질 문화는 갑을 관계가 뒤바뀐다고 해서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갑질의 폭력이 유난히 심한 사회에서 갑이 개과천선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 갑들이 갑질을 못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갑의 권력을 견제하는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문화의 본질은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데 있고, 우리는 지금 그 귀를 열어가는 중이다.

공동체는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 아기를 돌보는 가정처럼, 힘을 합쳐 약자를 돌보는 가운데 공동체는 결속력을 얻는다. 동굴에 갇힌 13명의 태국 아이들을 온 세계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서 구함으로써 인류는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 아이들이 세상을 구한 것이다. 약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인류애와 공동체성이 살아난다. 위험에 처한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다.

  아이들, 성소수자, 난민들을 타자로 여기는 사회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내심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약자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하고 저도 모르게 방어 모드가 된다. 그렇게 공동체의 약한 고리를 방치하는 사회는 결국 제 무덤을 파는 것이다. 문화는 공동체의 약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꽃을 피운다.

제3지대, 낮은 곳에 있는 소외된 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다양성을 토대로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산업의 시대가 저물고 문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일찍이 백범 선생이 꿈꾼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은 문화예술인들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이다.


현병호 ·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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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oral harassment. 친밀한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신적, 정서적 폭력.

2 야스토미 아유미,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 민들레,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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