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01] 다시, 꽃들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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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세상 속으로 들어온 아이에게 이 세상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곳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인간의 성장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그림책 『꽃들에게 희망을』은 나비처럼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처럼 묘사하지만, 애벌레 시절은 나비가 경험할 수 없는 그 시절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노랑애벌레와의 만남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하지만 이 땅의 많은 애벌레들은 그 눈부신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애벌레들의 삶이 무의미한 경쟁으로 허비되는 것은 애벌레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애벌레 시절을 충분히 즐기며 살아야 제대로 고치를 만들고 나비도 될 수 있으련만, 그런 운 좋은 애벌레는 드물다. 사실상 이 땅에 태어난 아이들의 삶은 저 우화와 반대의 과정을 밟는다. 나비처럼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던 존재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어른이 되어 애벌레처럼 먹고사는 문제에 파묻혀 살다 늙어 죽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학교교육은 꽃밭처럼 다채로운 세상에서 날아다니는 나비 같은 아이를 현실이라는 회색지대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세상에 무사히 안착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조심스럽게 안내해야 하건만 실상은 경쟁의 아수라장 속에 밀어넣고서 서로를 밟고 기어오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좌절하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다. 지혜로운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할 어른들이 아이들을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다. 그들 또한 눈이 먼 상태이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이들이 교육운동에 뛰어들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도록 함께 어린이집을 만들고 대안학교를 설립해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나 소수의 아이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 뿐이다. 세상은 원래 위험한 곳이지만 오늘날의 환경은 아이들의 성장에 더욱 위험하다. 이런 세상에서는 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뛰어노는 친구 같은 어른 또는 파수꾼에 그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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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아동의 본질을 탄생성(natality)으로 본 한나 아렌트의 관점은 시대를 넘어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교육은 아이가 담지한 새로움을 보전해 낡은 세계에 소개하는 일이다. 교사는 (새로운 존재인) 아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아이로 인해 새로워질 가능성을 품고 있는 낡은) 이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부모나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한나 아렌트,『교육의 위기』, 257쪽) 마지막 구절은 근대적 계몽주의자에 가까운 발언이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부모나 교사는 마땅히 우리가 몸담고 있는 낡은 세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어른은 이 세계를 지키고 아이들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책임과 함께 미래 세대인 아이들에게 이 세계를 안내해야 하는 책임을 동시에 지고 있다. 긴장 관계에 있는 아이들과 세계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일은 시대를 불문하고 어렵다.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한탄이 수천 년 전 수메르 문명 시대 점토판에도 적혀 있듯이. 과거와 미래의 간극이 크지 않았던 시대에도 쉽지 않았던 그 일이 오늘날에는 한층 어려워졌다. 과거의 지식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전통이나 어른의 권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부모와 교사는 여전히 아이들을 이 세계로 안내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아동중심의 진보교육 사상이 아이들을 그들만의 세계에 남겨둠으로써 이 세계와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힘들다. 어른은 단지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도와주면서 아이 옆 또는 뒤에 무력하게 서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이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소홀히 하게 되면서 세대 간의 단절이 심화된 측면도 있다. 아이들 입장에서 보자면 가르침보다 배움이 중시되고 학습에서 흥미와 자발성이 강조되면서 스스로 알아서 배워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진보교육은 삶과 동떨어진 교육을 비판하며 ‘함으로써 배운다’는 실용주의 교육의 토대 위에 서 있다. 학습과 놀이의 경계를 허물고 일하면서 배우고 놀면서 배우는 것을 지향하지만, 아이들의 흥미에 기반한 학습은 아이가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체계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들을 놓치게 만든다. 배움이 선택과 협상의 대상이 되면서 마땅히 배워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어른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진실보다 진정성을 높이 사는 시대, 좋은 삶의 기준이 개개인에게로 옮겨간 시대에 부모와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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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아이들은 의식주는 풍족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나비의 꿈은 고사하고 애벌레의 삶조차 버거워한다. 나비가 사라진 세상은 꽃들도 사라지고 점점 어두운 잿빛으로 변해갈 것이다. 도시의 밤은 형형색색 네온사인 불빛으로 반짝이지만 그 화려함은 정신의 황폐함을 감추는 가면인지도 모른다. 꽃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세상, 나비가 꽃밭 사이를 날아다니는 세상은 애벌레들이 나비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자녀의 행복과 안정을 바라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가 나비가 되는 모험을 감행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부모 덕에 배부른 애벌레의 삶을 선택해 애벌레 시기에 고착되거나 마음 편히 고치 생활을 즐기는 것이 운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고치 속에서 영영 번데기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나비로 변태할 수 있는 힘은 불안 속에서 자라난다. 키르케고르가 말했듯 불안이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기본값이라면 불안을 기꺼이 떠안을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일 것이다. 

하지만 용기만으로 나비가 될 수는 없다. 스스로 고치를 지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치 속 삶을 견딜 체력도 필요하다. 그 힘을 길러주는 것이 양육과 교육을 맡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힘이 부치는 양육자에게 손길을 내미는 일이다. 교사는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양육자와 함께 아동의 성장을 돕는 사람이다. 부모와 교사 그리고 주변 어른들의 협동 속에서 아이들은 안심하고 고치를 지어 그 안에서 나비로 거듭날 수 있다. 고치 속 번데기들의 건투를 빈다. 부디 꽃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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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병호 _《민들레》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