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02] 헌법, 현대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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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

헌법재판소 앞에서 이어지던 기나긴 시위가 끝이 났다. 우여곡절 끝에 현직 대통령이 두 번째로 파면되고, 장미대선을 앞두고 있다. 친위 쿠데타를 무력화한 것은 주권자인 시민의 시위와 헌법이 규정한 국회의 비상계엄 무효투표,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이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대통령 파면은 국민 모두에게 기쁜 소식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열 명 중 일곱 명에게는 분명 기쁜 소식이었다. 이를 기쁜 소식으로 접한 이들은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서가 전하는 복음(福音)은 “너희는 이미 용서받았으니 당당하게 살아도 좋다”는 ‘기쁜 소식’이다. 계율을 잘 지킴으로써 스스로 당당할 수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에게 바울은 당당함의 근원이 ‘나의 올바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한편 근대의 천부인권 사상은 신의 사랑 없이도 인간이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 인권의 절대성을 처음으로 선언한 미국 헌법과 함께 인간중심 시대가 시작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여전히 성경을 끼고 살지만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개인의 재산권과 생명권, 자유를 보장하는 미합중국 헌법이다. 1500년 가까이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복음에 기대어 살았던 서구인들도 오늘날에는 천부인권을 천명한 헌법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문명국가는 국가의 질서를 경전이 아닌 헌법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이야말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현대판 복음이다. “가난한 이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정작 가난한 이를 구원하는 것은 인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헌법이다. 천부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종교적 의미의 자유와 정치적 의미의 자유가 다르지만, 정치적 의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종교적 의미의 자유란 현실도피적인 자유이기 십상이다. 부르카를 써야만 하는 여성이 종교적 의미의 구원을 얻었다 한들 여성인권이 헌법으로 보장되지 않는 한 그의 삶은 부르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경전의 원래 목적이 고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지배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면 현대에는 그 역할을 법전이 맡고 있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근본에서 달라지진 않았지만 오늘날 경전은 사회보다 개인의 내면 질서를 유지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주로 한다.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그 역할마저 심리 관련 교양서들이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경전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법정에서 증인 선서를 할 때 법전이 아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것처럼 개인의 양심과 관련해서는 법전보다 성경이 더 힘을 발휘한다. 선서를 한다고 위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므로 상징적 역할에 그치긴 하지만 그 행위는 법이 규율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말해준다. 

경전은 인류의 지혜를 담고 있지만 시대적 편견의 집적물이기도 하다. 시대가 바뀌어도 경전이 개정되지 않고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 것은 그 표현이 두루뭉실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얼마든지 해석을 달리 할 수 있다. 새로운 주해서가 나오고 주석이 바뀌는 것은 사실상 경전을 개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효과를 낳는다. 법률이 현실과 맞지 않을 때 새로운 판례를 통해 법률 개정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것과 같다. 법이 사회변화를 못 좇아가기 때문이다. 법이 굼뜨기 때문에 사회가 정체되기도 하지만, 정권의 변화에 사회가 휘둘리지 않게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경전의 시대에서 법전의 시대로


경전과 법전의 가장 큰 차이는 경전이 한번 만들어지면 일점일획도 달라지지 않는데 비해 법전은 끊임없이 개정된다는 점이다. 자유와 평등, 박애(형제애)라는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법률에 담아 1804년에 공포된 나폴레옹 민법전(Code Civil)은 1787년에 제정된 미국 헌법과 함께 근대 국가의 토대를 이루며 세상을 바꿔놓은 몇 안 되는 문서 중 하나다. 문장이 매우 간결 명료하여 스탕달이 문장 연습을 위해 매일 법전을 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건조한 법조문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읽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랬다면 법전이 경전처럼 읽힌 셈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경전에 비해 성문 법전은 체계적인 제정 과정을 거쳐 나름 완결성을 갖추고 있지만, 그 또한 역사적 산물이다. 나폴레옹 법전 이전의 프랑스 법체계는 체계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뒤죽박죽 상태로, 300여 개의 민법이 지역마다 다르게 적용되고 있었다. 사회 통합을 위해 나폴레옹은 집권 뒤 곧바로 민법전 편찬 작업에 착수해 5년 만에 새로운 법전을 공포했다. 소유권을 보장하고 계약의 자유와 과실책임주의에 기반한 나폴레옹 법전은 공화정과 자본주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나폴레옹 실각 후 봉건제를 되살리려는 귀족계급의 시도가 실패한 것도 민법전이 뿌리내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법도 시대가 변하면 현실과 맞지 않은 요소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는 법 위의 법인 헌법도 다르지 않다. 국가조직의 기본원칙을 정한 입헌주의적 의미의 헌법은 20세기에 들어 두 차례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근대적 헌법이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 따라 국민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자유권에 치중했다면, 그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생존권적 기본권을 우선하게 되었다. 헌법학자들은 이를 근대 헌법과 분리해 ‘현대 헌법’이라 일컫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전형적인 현대 헌법에 속한다.

현대 헌법은 20세기 말 인권 개념이 확장되면서 또 한 차례 커다란 변화를 겪는데, 기존 헌법을 고전 헌법, 새로운 헌법을 선진 헌법이라 부른다. 고전 헌법이 권력체계 기능에 치중한 반면 선진 헌법은 권리장전 기능이 강해 국민의 의무보다 국가의 의무를 먼저 규정한다. 인권지향적인 선진 헌법은 고전 헌법이 보장했던 기본권 외에 인간의 존엄성, 여성 인권, 환경권, 종교를 갖지 않을 권리와 징병 거부권, 심지어 망명권까지도 보장하고 있다. 이는 국가가 있고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있고 국가가 있다는 사상이 반영된 결과다.(선진 헌법에서는 권리의 주체로 ‘국민’ 대신 ‘인민’이란 표현을 쓴다.) 

법은 사회 안정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본질상 보수적이다. 일점일획도 개정을 용인하지 않는 경전은 한술 더 떠 수구적인 경향을 띨 수밖에 없다.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여 새롭게 해석한다 할지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20세기 이전에 생겨난 경전 중에 헌법처럼 여성 인권을 보장하는 경전은 없다.** 경전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은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다. 그만큼 사회 안정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지만, 기득권자들에게 유리한 것이 경전이다. 법전은 그나마 사회 변화를 좇아 변신하기라도 하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경전은 사회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넘어 정체시키기 십상이다. 삶을 개선하고 사회를 진보시키고자 한다면 경전을 공부하기보다 헌법을 공부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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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 헌법에 해당하는 Constitution은 ‘창설하다, 설치하다, 특정 형태나 질서를 갖추다’라는 뜻의 라틴어 constituere를 어원으로 한다. 국가의 형태와 질서를 규정하는 기본법이라는 뜻이다.

** 세계 종교 중 가장 최근에 생겨난 이슬람교의 경전이 남녀 차별이 가장 덜한 편이다. 코란은 “여성은 남성의 옷이고 남성은 여성의 옷”, “남녀 신앙인은 서로가 서로를 위한 보호자”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같은 남녀평등 사상 때문에 초기 이슬람교는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데 남녀 구분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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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병호_《민들레》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