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03] 서비스를 제공할수록 교육의 질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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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친절한 ‘키즈노트’

 

“오늘이 부부의 날이래.”

친구가 말했다.

그런 것도 챙기냐고 하니, 자긴 몰랐는데 아들의 어린이집에서 챙겨주더란다. 무려 선생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레몬주스까지 보니 그야말로 정성이 느껴졌다. 부부의 날을 축하하는 어린이집의 안내장은 ‘학부모님, 사랑합니다!’라는 멘트로 끝이 났다.

나는 그 정성스러운 이벤트가 어쩐지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어린이집의 역할은 아이들을 보육하는 것이다. 도대체 부부의 날을 왜 어린이집 교사가 챙긴단 말인가. 그건 부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어린이집 교사는 학부모를 사랑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가끔 지인들을 통해 보던 어린이집 ‘키즈노트’도 이제야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매일같이 빽빽하게 날아온다는 키즈노트는 언제나 전해야 할 메시지 그 자체보다 요란했다. 키즈노트 속 아이는 그냥 버스가 아니라 ‘병아리처럼 샛노란’ 버스를 탔고, 그냥 딸기가 아니라 ‘주렁주렁 열린’ 딸기를 땄다. 그 딸기는 ‘새콤달콤’했고, 아이는 그걸 ‘냠냠’ 먹었다. 미끄럼틀에는 ‘영차 영차’ 올라가지 그냥 올라가는 법이 없었고, 그 모든 문장의 끝엔 알록달록한 이모티콘이 덧붙었다.

아이가 아니라 학부모가 읽는, 그러니까 독자가 ‘어른’인 이 글은 왜 그렇게까지 구구절절하고 친절하며 알록달록한가. 키즈노트의 목적은 기관에서의 아이 생활을 알려주는 것인데, 낮잠을 몇 시간 잤고, 밥은 어느 정도 먹었으며, 배변 상태는 어떠하고, 오늘은 어떤 활동을 했다는 담백한 알림만으론 모자란 걸까. 키즈노트에 이모티콘이 없으면, 딸기를 ‘냠냠’ 먹지 않고 그냥 먹었다고 쓰면 아이의 발달과 돌봄에 문제가 생기는가? 화려하게 꾸민 그 문장들은 과연 어디까지 솔직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상투적인 표현일까.

선생님들의 역할은 아이와 눈을 맞추고 생활하는 것이지, 키즈노트를 길고 예쁘게 적는 게 아니다. 스무 줄을 채우려고 고민하느라 쉬는 시간을 반납한 선생님의 손에 자녀가 맡겨진다는 걸 안다면, 학부모는 키즈노트의 길이를 두고 볼멘소리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부모라면 선생님들이 키즈노트에 쏟을 에너지를 아이와의 시간에 쏟길 바랄 거다. 그걸 필요 이상으로 길게 쓸 시간에 차라리 휴식을 취하시고, 아이들이 낮잠에서 깼을 때 더 신나게 놀아주길 바랄 거다.

학부모 안내장 속 사랑한다는 말이나 키즈노트의 장황한 미사여구가 일종의 ‘립서비스’인 것을 안다. 이런 서비스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는 원아를 직접 유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출산으로 원생이 급감하다 보니 경쟁은 더욱 심해지고, 우수한 보육기관임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가 힘드니 엉뚱하게도 각종 전시성 행사와 학부모 서비스가 중요해진다. 길고 긴 키즈노트는 처음엔 원아를 유치하기 위한 몇몇 어린이집의 ‘셀링 포인트’였겠지만, 어쩌다 보니 모든 기관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서비스’가 되었다. 이처럼 생존을 위한 보육기관의 서비스가 과도해지면서, 부모들은 점차 보육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난 서비스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보육기관을 거치며 소비자로서의 자아를 탄탄히 확립한 학부모들은, 완벽한 ‘고객님’이 되어 공교육 현장에 데뷔한다.

 

수요자의 만족과 즐거움

 

아이의 학교생활이 궁금하니 활동 사진을 업로드해 달라는 요구, 자녀의 선호에 따라 수업 방식을 조정해 달라는 요구, 본인 자녀만 특별히 대우해 달라는 요구는 너무 흔해서 이제 화제가 되지도 않는다. 수업에 충실하느라 아이들의 사진을 찍지 못하는 교사, 학교 규칙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하는 교사, 아이들과 생활하느라 학부모 문자에 빠르게 답장하지 못하는 교사는 곧잘 원망의 대상이 되곤 한다. 교육의 과정을 낱낱이 보고하고, 아이돌 춤을 추든 뭘 하든 일단 아이를 즐겁게 해주는 게 마치 교사의 진정한 사명인 듯 여기는 것이 시대 정신이 되어간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학교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학부모 심리의 기저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품을 떠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니 현미경을 대고서라도 보고 싶을 것이다. 교사가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사랑해주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으니 서운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아이의 모든 삶을 장악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안, 내 자녀가 성장 과정에서 받는 상처를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사랑이 버무려져 소비자의 정체성으로 발현된다. 교사가 내 불안을 해소해주길, 훈육의 이유를 부모에게 하나하나 납득시켜주길, 아이의 모든 순간을 공유해주고 무한히 사랑만 쏟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국가에서 갖춰놓은 시스템도 교육의 서비스화를 부추긴다. 교육에 ‘백년지대계’라는 허울 좋은 수식어를 붙여놓고서 교육감은 투표로 선출하는 아이러니가 대표적이다. 유권자 대다수인 학부모의 요구를 얼마나 잽싸게 눈치채고 수용하는지가 당선의 열쇠가 되다 보니, 뭔가를 더 해주겠다는 선심성 공약이 남발한다. 표를 많이 받는 사람이 교육 수장이 되는 구조에서는 질 높은 교육정책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당장 이번 선거에서 승리해야 하는데, 대체 어느 누가 백 년씩이나 내다보며 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한단 말인가.

이런 흐름은 학교에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수요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거다. 학교에서는 교육활동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만족도를 주기적으로 조사한다. 학부모들은 교육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채 교육활동을 평가하고, 학생들은 흥미 위주의 활동을 선호할 수밖에 없으니, 교육과정 평가라는 허울만 뒤집어썼을 뿐 교육적 효과나 의미는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현장’에서 ‘체험’하며 ‘학습’하는 게 취지였던 현장체험학습은 아이들의 흥미를 고려하여 놀이동산으로 가는 일이 많아졌다. 그게 가장 높은 만족도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든 좋은 서비스를 받는 건 기쁜 일이다. 즐거움이 수반되는 교육은 어떤 측면에선 바람직하다. 모든 순간은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 아이의 즐거움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모든 활동이 최선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재밌는 학교생활은 가치가 있으나, 그것이 교육의 본질을 방해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수요자의 만족과 즐거움은 명백히 둘째 문제임에도 자꾸만 가장 중요한 것처럼 머리를 들이민다.

 

말할 수 없는 진실

 

특히 ‘기분상해죄’나 다름없어진 아동학대 기준은 교사가 신념에 따라 교육하는 걸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게 죄가 되는 세상, 아이를 향해 웃어주지 않은 게 학대가 되는 세상에서 학교는 학생의 성장이 아닌 수요자의 만족을 향해 조금씩 방향을 틀고, 교사와 관리자는 웬만한 맷집을 장착하지 않은 이상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헐값에 팔아넘긴다. 일을 더 키우지 않으려는 계산은 정신 건강을 지킨다는 측면에선 몹시 합리적이지만, 교육계 전반을 ‘권리 지옥’으로 만든다. 한땐 멀쩡했을 어떤 사람은 누군가의 호의를 먹고 괴물로 자란다.

소비자의 정체성을 확립한 학부모와 그에 발맞추는 사회가 결합하면 정상적인 교육은 파행으로 이어진다.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위해 원칙은 금세 수정되고, 그러다가 무너진다. 이제 아무도 기분 상하지 않고, 아무도 울지 않고 다치지 않는 것이 학교의 지상과제가 됐다. 부상 위험이 있는 체육활동은 이론 수업으로 대체되고, 아이가 수치심을 느낀다는 말에 발표 수업은 줄어들고, 활동사진을 올려 달라는 요구에 교사는 학생을 곁에서 돕는 대신 카메라를 든다. 그런 식으로 학교는 삐걱삐걱 굴러간다.

수요자를 만족시키려는 노력은 정상적인 평가를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몇 년 전엔 교사들 사이에 희한한 주제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성취 수준이 낮은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어떤 용어로 전달할 것이냐 하는 거였다. ‘노력 요함’이라는 용어가 조심스럽다,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이 없냐, 노력이 필요해서 필요하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냐, 민원을 부를 수 있는 용어다, 이런 흐름으로 대화는 빠르게 이어졌다. 나는 ‘당연한 진실을 에둘러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골몰한 그 대화 자체가 촌극이라고 생각했다. 학생의 상태를 정확히 인지해야 부족한 점을 보완할 텐데, 학생과 학부모가 받을 충격을 고려하여 이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해져버린 거다.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교사가 작성하는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교사는 단점을 단점이라 말할 수 없는 21세기 홍길동이기에, 마뜩잖아도 아이의 단점을 장점화하여 적는다. 자기주장을 좀체 굽히지 않으며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막서는 아이에겐 ‘자신만의 신념이 확고하다’며 묘하게 긴 듯 아닌 듯 적는다. 그럼에도 양심이 쿡쿡 쑤실 때는, 단점을 언급하되 ‘~한다면 더 큰 발전이 기대됨’이란 표현을 붙여 모든 것을 해결한다. ‘수업 시간에 좀 더 집중하고 자기 할 일을 챙겨서 한다면 앞으로 더 큰 발전이 기대됨’이란 문구는 지금은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좋은 말인 듯한데 뒤통수를 후려치는, 모스부호보다 더 은밀한 이 메시지를 학부모가 알아들어도 문제, 못 알아들어도 문제다. 이러니 맘카페에선 좋은 말밖에 없을 것이 분명한 생활통지표를 앞다투어 자랑하고, 학부모들끼리 머리를 맞댄 채 그 속에 담긴 진의를 탐구하기도 한다. 


깊어지는 정신적 당뇨


좋은 대우만 받고 싶고, 좋은 얘기만 듣고 싶어 하는 학부모들을 대할 때면 그들이 내 앞에 손을 턱 내밀고 서 있는 느낌이다. 나는 스무 명이 넘는 학생에게만 쏟기에도 버거운 심력의 얼마쯤을 뚝 떼어 그 손에 쥐어준다. 조용히 책을 읽으라며 학생들의 입을 막은 후에, 이모티콘을 가득 담아 문자 메시지를 꾸미기에 여념이 없다. 정작 그 시간에 아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을 만지는 선생님의 정수리만 쳐다봐야 한다.

교칙을 어긴 자녀를 혼내지 말라는 요구에, 나는 배덕감을 느끼면서도 가끔 그 요구를 수용한다. 학부모는 그런 서비스를 원하고, 나는 그걸 매번 거부할 만큼 용감하거나 도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교사로서의 책임을 만홀히 했지만 맘카페에선 제법 좋은 선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녀가 받는 교육이 아니라 자신이 받는 서비스로 교육의 질을 오판하는 학부모가 늘어갈수록, 학교는 화내는 학부모에게 떡 하나 더 주는 방앗간이 된다. 입맛에 맞는 것만 쏙쏙 골라 입에 넣어주니 학생과 학부모의 정신적 당뇨는 깊어진다. 이쯤에서 나는 학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학교가 단지 아이의 즐거움과 부모의 편의를 위한 곳이라면, 그러니까 교육이라는 본질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곳이라면, 이 기관에서 수 년을 보내는 것이 왜 굳이 헌법상의 의무가 되어야 하는가. 이렇게 애매하게 힘들고 애매하게 불만족스러울 거라면, 차라리 화려한 키즈카페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학교는 서비스가 아니라 교육을 위해 존재한다. 교사는 아이에게 사랑만 퍼붓는 존재가 아니다. 필요한 것을 가르쳐야 하고, 그 과정은 마냥 즐겁고 행복할 수 없다. 

한 아이의 키즈노트를 길게 쓰는 데는 단지 몇 분 정도의 노력이 더 들 뿐이지만, 그런 식으로 요구되는 서비스가 하나둘 늘어날수록 소요되는 시간도, 에너지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교사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그걸 간과하고 학부모를 만족시키기에만 골몰하는 사이 정작 교육은 ‘학생을 가르치는’ 목적에서 점점 멀어진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학부모는 아이의 가능성과 교사의 전문성을 믿고 한 걸음 물러서서 인내할 때이다.


* 이 글의 전문은 계간《민들레》155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_이세이 (10년 차 초등교사. 교육에 대한 단상을 글로 기록한다.『어린이라는 사회』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