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04] 모두를 위한 교육, 인간을 위한 교육__로버트 오언, 페스탈로치, 프뢰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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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만남

 

사유재산제도는 인류 역사와 함께하는 유서 깊은 제도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 안에서 권력을 갖는 데 가장 확실한 토대가 재산이다.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한 권력 투쟁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천재지변과 전쟁 등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늙고 병들기 마련인 인간이 재산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가 세습제도이다. 세습에는 모계 혈통만 확인이 가능한 것보다 부계와 모계 혈통을 다 확인할 수 있는 부계사회가 더 유리하다. 농경이 발달해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대부분의 문명권에서는 부계 중심의 사유재산 세습제도가 자리잡게 된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교육은 유산계급의 자녀를 위한 것이었다. 신분을 세습하기 위한 장치가 교육이었던 셈이다. 노예들의 노동 덕분에 아테네의 자유민들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에는 농노들 덕분에 귀족과 성직자들이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서구 자유교양교육 7교과는 지배계급의 자녀를 너그러움과 공민적 정신을 지닌 리버럴(liberal)한 사람으로 기르고자 한 것이다. 유교 문화권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공자의 6예 또한 지배계급 자녀들의 심신수련을 위한 교육과정이었다. 평민의 자녀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과 함께 노동하며 사회화 과정을 거쳤다. 

서구에서는 근대에 접어들어 신흥 유산계급(부르주아)이 부상했지만, 재산을 지키고자 하는 점에서는 귀족계급과 이해관계가 맞았다. 서구 근대사는 왕권을 견제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권리를 확대해온 역사다. 자유주의 이념은 거기에 사상적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도 유산계급의 권리를 지키는 데 열심이었지만, 시대의 이단아 루소는 일찍이 사유재산제도가 인류를 타락시켰음을 지적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평등사상이 확산하면서 자유주의에 사회주의 요소가 가미된 ‘뉴 리버럴리즘’1)이 대두했다. 마침내 교육이 신분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사회주의가 등장한 배경에는 18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기의 열악한 노동 현실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3시간 이상 일을 해야 했다.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동은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일찍이 존 로크 같은 자유주의자도 평민의 아이는 다섯 살이면 노동을 해도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이들은 술도 마시지 않고 공장주의 말을 잘 들었으며, 작은 체구로 방적기계 틈새를 드나들며 어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냈다. 당시 질병과 전쟁 등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고아원이 곳곳에 설립되었는데, 수용된 아이들 중 운 좋게 살아남은 아이들은 네댓 살만 되면 단체로 공장 노동자로 보내지곤 했다. 고아원 원장과 공장주 사이의 노예 매매나 다름없었다. 

루소 이후 유산계급만이 아니라 무산계급의 아동들도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갖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스탈로치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활동한 로버트 오언은 자수성가한 공장주로서 자신의 공장에 고용된 고아들과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10살 미만 아동의 노동을 금했다. 흔히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불리는 오언은 교육사보다 경제사에서 더 주목받는 인물이지만 교육사적으로도 혁신적인 교육을 시도한 선구자였다.2)  그가 만든 뉴래너크 마을과 학교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델로 유럽 전역의 주목을 받으며 다양한 공동체운동과 유아학교가 확산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스위스 제네바 출신으로 루소의 영향을 누구보다 많이 받은 페스탈로치는 흔히 ‘(빈민)교육의 아버지’라 불리지만, 루소 못지않게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은 저술을 남긴 정치사상가이기도 했다. 말년에 ‘나의 정치의 시작과 끝은 교육’이라고 말할 만큼 그에게 교육활동은 정치철학의 연장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를 지켜보면서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이율배반성에 대한 탐구를 할 만큼 인간과 사회문제에 천착한 사상가였던 페스탈로치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고아들을 돌보고 가난한 농민의 아이들을 교육하면서 민중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학교가 유명세를 타면서 점점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되어가자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학교를 열 만큼 빈민을 위한 교육에 진심이었다. 

하지만 페스탈로치가 추구한 계급을 넘어선 민중교육과 지덕체의 조화를 도모한 전인교육은 초기만 해도 지나치게 급진적인 교육실험으로 간주되어 학교 문을 닫아야만 했는데, 프랑스혁명 이후 인식이 바뀌면서 유럽 각지에서 학생이 찾아오기에 이른다. 매질 등 폭력을 통한 전통적인 훈육 방식이 아니라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함으로써 변화로 이끈 페스탈로치의 교육 방법은 당시만 해도 ‘교육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일컬어질 만큼 파격적이었다.3) 고아나 빈민의 아이도 인간적인 교육을 통해 얼마든지 도덕적인 인간으로 자랄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놀이와 노작, 배움의 일치


 

페스탈로치가 당시 가장 사회적 약자였던 고아와 빈민들에게 눈을 돌렸다면 프뢰벨은 사각지대에 있던 유아교육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인물이다. 당시만 해도 유아 열 명 중 네댓 명이 사망했으며 어린아이들을 위한 교육은 귀족들이나 신경 쓰는 정도였다. 루소처럼 자녀를 고아원에 맡기는(버리는) 부모도 종종 있었는데, 위생이나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해 유아사망률이 높았고 갓난아이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18세기 프랑스 도시의 부모들은 신생아를 도시 근교의 유모에게 맡겼다가 네댓 살이 되어 살아남으면 데려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4) 

루소 이후 아동의 흥미와 본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강조되면서 놀이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프뢰벨은 놀이의 교육적 의미와 활용 방법에 처음으로 주목한 교육사상가였다. 그는 아동의 본성에 내재된 잠재력이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게 돕는 가장 좋은 방편이 놀이라고 보았다.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프뢰벨의 사상 속에서 놀이는 신성의 표현이자 신의 활동을 상징하는 것이다. 놀이에 대한 이러한 철학은 그가 고안한 교구(은물)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프뢰벨은 놀이 못지않게 노작교육을 강조했는데, 이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아이들 내면에 깃든 신의 창조성을 재현하는 일이기도 했다. 

프뢰벨의 은물 10종은 입체(공, 정육면체, 원기둥)에서 면, 선, 점으로 나아가는 분석적 과정에 따라 구성된 반면, 11종의 작업은 점(구멍 뚫기)에서 선, 면, 입체로 나아가는(바느질, 그림 그리기, 매트 짜기, 상자 만들기...) 종합적 과정으로 구성된다. 신성의 재현이라는 형이상학적 철학에 기반해 이러한 발달이론을 적용하자면 교사의 세밀한 지도와 개입이 요구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오히려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발달과 창조성이 방해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교사가 솜씨 좋은 정원사 역할을 할 때 아이들이 잘 자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내면의 신성(루소의 표현을 빌면 본성 또는 자연성)이 제대로 발현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프뢰벨의 놀이와 작업이 지나치게 구조화되어 있다고 비판받는 이유다. 

프뢰벨 교육에서 완구(은물)와 도구(바늘 등)를 교구로 쓰는 것은 놀이와 일, 배움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삶 속에서 하나가 되는 이상적인 교육환경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대안교육이 추구하는 ‘일하며 논다, 배운다’라는 삼위일체의 교육관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회적기업 ‘노리단’의 사례처럼 일에 치여 놀지도 배우지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5) 일은 단순반복 성격을 띠기 마련이고, 놀듯이 해서는 일의 완성도도 마무리도 기대하기 힘들다. 배움터에서 노작활동을 잘 조직하면 일과 놀이, 배움이 동시에 가능하기도 하지만 체계적인 학습은 쉽지 않다. 

프뢰벨의 은물과 작업처럼 체계적인 놀이·노작활동의 경우 아이들의 흥미와 충돌하기 마련이다. 체계적인 놀이나 학습에 흥미를 느끼는 아이는 드물다. 결국 교육에서 자발성과 체계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경험과 이성이 부딪히는 지점이다. 초기에는 흥미와 경험 위주로 접근하더라도 어느 단계에 이르면 경험보다 이론, 흥미보다 체계를 중시해야 하는 지점에 다다른다. 지금이 어떤 단계인지를 잘 가늠하고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교사의 역량일 것이다. 

‘삶이 곧 교육’이라는 페스탈로치의 교육관은 진보교육의 패러다임이기도 한데, 인생은 실전이어서 배움터처럼 연습이 허락되지 않는다. 시행착오의 경험만으로 배우기에는 리스크가 클뿐더러 시간이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구어만으로는 어휘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듯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경험과 이론의 콜라보가 중요하겠지만, 역할에 따라서는 이론이 더 중요한 경우도 있다. 전투 역량보다 전략 역량이 더 요구되는 직책에 있는 사람에게는 전투 경험보다 전략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더 필요할 것이다.6) 아이들의 흥미와 체험을 중시하는 교육이 유념해야 할 지점이다. 

 

보편교육의 시작

 

서구의 근대사는 왕과 귀족에게서 지주들, 상인들, 산업자본가들, 노동자들에게로 점차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어온 과정이다. 프랑스혁명과 2월혁명을 기폭제로 자유주의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진 프로이센7)이 처음 시도한 보편교육제도는 루소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부국강병을 위한 현실적인 방편이기도 했다. 19세기 유럽 대륙에서는 산업혁명과 자유주의 혁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고, 나폴레옹 전쟁과 혁명의 바람이 전 유럽을 휩쓸면서 근대국가의 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쓸 만한 노동자와 병사를 길러내야 하는 필요성이 보편교육을 시대적 흐름으로 만든 셈이다. 

젊은 시절 페스탈로치와 2년을 함께 일하면서 배웠던 프뢰벨은 독일에서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1833년 51세 때 고아원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유아교육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된다. 그는 1836년 최초의 교구(은물)를 만들고 유치원을 열어 체계적인 유아교육을 시도한 선구적인 교육자였다. 1839년에 설립한 ‘놀이와 활동의 집’(현재 프뢰벨 박물관)을 1840년 ‘킨더가르텐’이라 명명하고 1846년에 일반 유치원으로 정식 개원했다. 2년 뒤 유치원은 50곳이 넘을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나이와 성별, 계급을 불문하고 전 아동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사상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8) 

계몽군주로서 루소를 후원하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대제 이후 프로이센은 국가주도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1826년 세계 최초로 의무교육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영향으로 일어난 3월혁명이 실패한 뒤 귀족 중심의 프로이센 정부는 자유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반동적인 정책을 펼친다. 1851년 정부는 유치원이 무신론과 사회주의 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폐쇄 명령을 내렸다. 누구보다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프뢰벨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겠지만, 자유주의 혁명이 유럽을 휩쓸고 사회주의까지 등장하자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서는 귀족들의 저항 또한 만만찮았다.9) 그러나 반동의 움직임이 시대정신을 거스르긴 힘들다. 프로이센은 비스마르크 총리를 중심으로 국가주도의 개혁을 밀고 나가 마침내 독일 통일을 이루고 보불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럽의 강국으로 떠올랐다. 그와 함께 독일의 학교제도와 유치원이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 등 세계 각지로 확산된다.

당시 독일의 교육제도에 세계가 주목한 것은 보불전쟁에서의 승리가 독일 교사들의 승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기 때문이다. 보편교육의 이념에 주목한 것이라기보다 전통적인 유럽의 강자 프랑스를 굴복시킨 독일처럼 부강해지고 싶어서였다. “열강들이 고려하는 것은 이상적인 고귀한 가치 추구나 헌법의 진보성이 아니라 국력 즉 경제력과 군사력”이라고 비스마르크가 말한 그대로다. 그가 1862년 총리 취임 연설에서 한 말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물리력임을 말해준다. “프로이센의 지위는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닌 프로이센의 힘에 의해 결정될 것이오. (중략) 오늘날 당면한 문제는 1848년에 범했던 실수인 연설과 다수결이 아니라 철과 피로써만 가능할 것이오.”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19세기 유럽 지식인들 가운데 사회주의 가치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재산권이 위협받기에 이른 자유주의자들은 혁명의 동지였던 노동자 계층에 등을 돌리고 보수화되기 시작한다. 1848년 혁명이 실패한 이유다. 보통 사람들은 이념보다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다. 사회 또한 이념으로 바뀌진 않는다. 19세기 후반 보편교육이 확산된 것은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본적인 문해력을 갖춘 노동자 수요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개별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진보교육이 주목을 받게 된 것 또한 표준화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굴뚝산업이 저물고 IT산업이 발달하면서다. 

교육이 경제의 종속변수라는 현실적 한계를 감안하면서 개혁이든 운동을 추진해야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줄일 수 있다. 로버트 오언이 술에 절어 살던 노동자들을 위해 숙소를 개량하는 등 의식주 환경을 개선하고 공장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면서 그들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든 것처럼, 이념으로 시대정신의 등불을 밝히며 한걸음 한걸음 물리적 환경을 바꾸어가는 전략이 현실적인 개혁의 길일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대하면 사람이 되고, 짐승으로 대하면 짐승이 된다”는 오언의 신념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함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는 페스탈로치의 교육 이념과 다르지 않다. 


1) 19세기 말에 홉하우스 등이 제창한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는 20세기 말에 대두한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와는 성격이 다르다. neo의 어원은 ‘부활한’ ‘후기의’ 뜻을 갖고 있는 그리스어 neos다. neo liberalism은 new liberalism에서 사회주의 요소(new)를 제거한 것으로, 고전 자유주의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다.(자유주의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자유주의의 역사』(노명식) 참조)

2) G.D.H 콜, 『로버트 오언』, 홍기빈 옮김,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2017.

3) 페스탈로치의 교육 방법을 이론으로 체계화한 이가 오늘날 ‘교육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헤르바르트다. 윤리학에 기초해 교육목표를 정하고 심리학에 기초해 교육과정을 설계하여 교육학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된다.

4)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만들어진 모성』, 심성은 옮김, 동녘, 2009.

5) 김종휘, 『일하며 논다, 배운다』, 민들레, 2007.

6)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만든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한 장교가 “폐하처럼 훌륭한 전략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묻자 대왕은 전쟁사를 열심히 연구하라고 대답했다. 장교가 “이론보다 실전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다시 묻자 대왕이 이렇게 말했다. “전투를 60번 넘게 치른 노새가 있지만 여전히 노새라네.”

7) 프로이센의 영어식 표기는 ‘프러시아’, 일어식 표기는 보로서(普魯西)다. 보불전쟁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일본식 표기다.

8) 1907년에 문을 연 첫 몬테소리 유치원인 ‘어린이의 집’도 노동자 자녀를 위한 곳이었고, 1919년에 문을 연 최초의 발도르프학교는 담배공장 노동자 자녀를 위한 학교였다.

9) 폐쇄를 철회시키기 위해 애쓰다 이듬해 1852년 프뢰벨이 70세로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1860년에야 폐쇄 명령은 철회되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