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06] 학부모와 교사, 파트너가 될 수 있을까

202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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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엄마를 불러오겠습니다”


가끔 우스갯소리처럼 들리는 말이 현실일 때가 있다. 대학생 엄마가 성적 문제로 교수에게 항의를 한다거나 신입 직원의 아빠가 상사를 찾아간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공부란 무엇인가』의 저자 김영민 교수는 언젠가 맞닥뜨릴지 모르는 상황에 자신만의 대비책을 마련한다. “성적이 안 좋다고 여러분들 엄마가 연구실에 찾아와서 저를 괴롭히면, 저도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저도 엄마를 불러올 수밖에.”
그의 위트에 한참을 웃다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설마’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과연 나는 그런 엄마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자식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분별력은 잠시 내려놓고 행동해도 된다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는 건 아닌가. 내 자식만 잘 키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나는 알고 있는가.
얼마 전, 5학년 큰아이의 학부모 공개수업에 갔을 때다. 수업이 끝난 후 부모들이 모인 자리에 담임 선생님이 아닌 교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요즘 우리 학년 선생님들이 잘 웃질 않으십니다.”
교감 선생님은 안경을 고쳐 쓰며 근엄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업무 과다로 선생님들이 피로하신가, 아니면 아이들이 말을 안 듣나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다. 자신의 자녀가 원하는 선택 과목을 듣지 못했다는 학부모의 민원부터 크고 작은 학교폭력 문제까지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고 했다. 교감 선생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학부모의 과한 개입과 이기적인 태도가 교사들을 지치게 만든다고 했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교사들이 교실에서 해야 할 교육을 방해한다고 말이다.
“어머님들은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만나러 교실에 들어갈 때 어떤 표정과 마음이길 바라십니까?”
교감 선생님은 부모들에게 이런 질문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셨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설문조사(2023)에 따르면 66.1%의 교사가 가장 스트레스를 느끼는 요인으로 ‘학부모’를 꼽았다. 민원 스트레스 정도는 97.9%가 ‘심각한 수준’으로 나왔다. 수업 그리고 아이들과의 소통에 힘써야 할 교사들은 자신을 감정노동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악성 민원은 소수가 벌이는 일이지만 그 파장은 모든 학생과 교사의 일상을 흔들고, 중요한 동력을 잃게 만든다. 소소한 요구사항이나 불평이 보편화될수록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바로 우리 아이들일 것이다.
학부모들이 잠시 잊은 건 아닐까. 학교는 아이가 자기 등보다 큰 가방을 메고 가도 부모가 그 가방을 대신 들어줄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이곳은 구청 민원처리실이 아니라는 것을. 전인적인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모두가 애쓰는 곳이라는 것을. 마냥 내 아이가 손 들고 발표하는 재롱을 보고픈 마음으로 공개수업에 참석했던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되짚어보며, 아이들 앞에서 웃지 않는 선생님을 상상하며.

 

지금 학교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 휴대폰 번호를 모른다.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공개수업과 학기 초 15분간의 개인 면담, 두 번이다. 연락이 필요한 상황에는 ‘하이클래스’라는 앱으로 선생님께 메시지를 남기거나 통화할 수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나의 어린 시절처럼 휘황찬란하게 날리던 학부모의 치맛바람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누구 엄마가 반 아이들에게 간식을 돌리거나 화분을 사오거나 선생님께 봉투를 건네는 일도 상상하기 어렵다. 스승의 날에 꽃 한 송이 사가는 것도 어색한 일이 되었다.

10년 전, 나는 한 사립 고등학교의 교사였다. 아이들의 얼굴에 걱정이 스치면 교정을 한 바퀴 같이 돌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쌍둥이 동생의 가출로 걱정하던 아이, 좌절감 때문에 자꾸 게임을 하게 된다는 아이, 성적 때문에 부모님과 갈등을 겪던 아이.... 아이들은 내 앞에서 부모님에게 보이지 못하는 속내를 꺼내기도 했다.
그 시절 학부모님들은 모든 것이 어설펐을 신입 교사를 지하고 믿어주셨다. 나에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정중히 통화 가능한 시간을 물었다. 문제행동을 보이는 아이의 부모님은 아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가정환경을 이야기해주었고,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친 학생의 부모님은 아이를 호되게 혼내 주십사 부탁했다.
사람은 말투와 눈빛, 목소리로도 상대를 향한 태도를 느낄 수 있기에 나는 존중받는 한 교사로 그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아이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부모님에게서 들었고, 부모님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아이들로부터 들었다. 그렇게 나는 한 아이, 한 아이의 퍼즐을 맞추어나갔다. 부모님들과 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조심스럽게 대하면서도 온전히 아이들을 중심에 두고 소통하는 일만은 적극적으로 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학부모님과의 소통은 아이들을 섬세하게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 교육에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시절, 나는 40여 명의 반 아이들과 마음껏 웃고 울 수 있었다.

학교는 빠르게 변했고, 학생과 학부모의 목소리가 커졌고, 그들이 교사에게 꺼내는 말들은 달라졌다. 무너진 교사의 권위, 축소된 사회로서의 역할을 잃어가는 학교는 교육에 대한 무력감에 빠졌다. 10년 전쯤 타지로 이사를 하면서 육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둔 후, 가끔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만나면 그들은 내가 부럽다고 했다. 복직하면 스트레스로 몸 상하고 월급보다 병원비가 더 들 수도 있으니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그렇게들 말했다.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 강남 지역 고등학교의 전 교장 선생님이 출연한 것을 보았다. 그는 오랜만에 돌아간 학교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학생들이 마음 놓고 엎드려 자는 곳, 수업 시간에 학원 숙제를 하는 곳, 내 새끼에게 조그마한 불이익이라도 있으면 학부모들이 거칠게 항의하는 곳이더라고. 그는 꼴찌도 행복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세심하게 그들의 자존감과 마음을 챙기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마음을 담아 학부모들에게 편지도 보냈다.
‘여기는 사람을 교육하는 학교이지 성적으로 먹고사는 학원이 아닙니다. 명문대 몇 명 갔는지 궁금해 마시고 내 아이가 무얼 할 때 행복한지 살펴봐 주십시오.’
그의 편지는 학교라는 장소가 아이들에게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교사와 학부모 사이

 

얼마 전, 초등 저학년인 둘째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전화로 상담을 했다. 시간은 15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서로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선생님은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자신이 알아야 할 점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구체적인 요청에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1시간을 얘기할 것만 같은 아줌마처럼 굴고 싶진 않았지만 다른 얘기는 하면 안 될 것 같아 긴장이 되었다. 아이의 교우관계와 학습 태도가 어떤지 물었고, 집에서 숙제를 성실히 안 한다고 살짝 아이 험담을 했다. 10분이 지나자 마음이 약간 급해졌다. 통화가 끝나기 전에, 얼굴도 보지 못한 선생님의 말을 끊다시피 하면서도 꼭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선생님, 어려운 시기에 고생이 많으시죠. 그래도 저는 아이들이 커가는 중요한 시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분이 선생님이라 생각합니다. 힘내시면 좋겠어요.”
“네, 어머니. 말씀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인사일까 했는데 선생님은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가끔 아이들이 제게 이빨 빠진 걸 가져올 때가 있는데요. 저는 아이들의 이 빠지는 시기를 함께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AI처럼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마지막 몇 분 동안 인간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만남이란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내 아이, 남의 아이, 아이의 선생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두루 살필 때 부모와 교사는 참된 파트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도와주는 든든한 파트너가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은 신바람 나게 아이들의 성장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이가 흔들리는 그 시간을 함께하는 우리. 나는 선생님의 그 마음을 지켜주고 싶다. 교실이라는 ‘아이와 선생님의 세계’에 함부로 침범하지 않고, 선생님을 한 사람으로 존중하며.
나도 부모인지라, 아이가 전하는 학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최대한 객관적이 되려고 노력하다가도 뭔가 아이가 불이익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 때면 발끈하기도 한다. 학기 초,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담임 선생님이 너무 엄격하고 단호하시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중간놀이 후 교실에 1분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호되게 혼나고, 자신은 규칙을 잘 지켰는데 다른 친구 때문에 반 전체가 하교를 늦게 했다며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친구들이 자신을 놀린다거나, 친구들의 놀이에서 소외되었다고 말하는 날도 허다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더 나누어보면 서로 좋아하는 놀이가 달랐던 건데 아이 혼자서 소외되었다고 느꼈다거나, 친구만 놀린 게 아니라 자기도 놀리면서 같이 장난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이에게 잠시 선생님으로 변신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몇 분 지나고 나니 아이는 자기들이 말을 안 들어 선생님도 힘드시겠다는 말을 했다. 씩씩거리던 아이의 마음이 가라앉을 즈음을 틈타 나는 말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친구들이 함께 지내는 교실에서 시간과 규칙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구구단을 외우는 일보다 친구와 선생님을 존중하는 일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아이의 말만 듣고 선생님께 바로 전화하지 않는 것. 잠시 멈추어 아이와 함께 상황을 판단하고 분별해보는 것. 아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먼저 살피게 하는 것. 아이의 성장을 돕기 위해 부모로서 그것부터 노력해보려 한다. 선생님도 인간이니 실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 아이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을 위해 애써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선생님을 믿고 아이의 성장을 위해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말했다.

“엄마, 오늘 선생님이 많이 웃으셨어.”
말을 전하는 아이도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선생님들이 잘 웃지를 않습니다”라던 교감 선생님 말씀이 내내 마음에 남아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선생님들이 마음 편히 교실에서 아이들과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어린이는 멀리 간다』(창비, 2025)에서 저자 김지은은 이런 말을 한다. “내 아이만 뚫어지게 보는 사람들은 눈을 떴더라도 눈을 질끈 감고 사는 것과 다름 없다”고. 모든 학부모가 내 아이만을 뚫어지게 보는 돋보기를 내려놓고, 협력과 존중의 태도로 선생님을 마주한다면 선생님의 엄마가 학교에 오는 일은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_김세인(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 교사로 일했던 날들을 자주 추억한다.)


* 이 글의 전문은 민들레 157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