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08] 대안교육운동과 기독교 대안학교

202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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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서울 소재 한 기독교 계열 대안교육기관의 학기말 발표회 모습. 초등 1, 2학년들이 붉은색 스카프를 두른 유니폼을 입고 군복 차림 교관의 지휘에 따라 포복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기관은 「대안교육기관에 관한 법률」에 따라 등록된 현장으로 서울시교육청의 지원금을 받고 있다.(교회 유튜브 캡처)

  

민립학교의 역사적 흐름

 

구한말, 나라가 풍전등화 같던 시절 방방곡곡에 '학교' 또는 '학당'이라는 낯선 배움터들이 생겨났다. 교육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1908년 경성 시내에만 백여 개의 사립학교가 있었으며, 전국적으로는 5천여 개, 20만 명 가까운 학생들이 있었다. 서당의 수도 만(萬)을 헤아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사립학교령 반포 이후인 1910년 5월에는 1973개 교로, 1915년 5월에는 1154개 교로 급속히 줄어들었다.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다면 자생적인 근대화가 더 빨리 시작되었을 것이다. 

20세기 초 전국 각지에 들어선 근대학교의 설립 주체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배재학당 등을 만든 미국 선교사들, 오산학교 등을 만든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육영공원 등 관립학교를 만든 정부다.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들은 대체로 고등교육기관으로 이후 대학으로 이어진 반면, 민족주의자들이 사재를 털어 만든 학교는 중고등 과정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선교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서는 나이가 좀 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소학교는 관립학교가 대부분이었다. 

근대학교들은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대안학교보다 더 혁신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신분과 성별 차이를 넘어서는 근대적 가치와 신지식을 가르치는 곳이자,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실력을 기르는 곳이었다. 수천 년 묵은 신분제도와 성차별을 극복하고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교육을 통해 나타났다. 근대학교는 신문명의 전초기지이자 국권 회복의 희망이었다. 

근대학교들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측면이 크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미국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들의 경우 친미적 성향을 부추겼고, 종교 면에서도 개신교 중심의 배타적인 신앙관을 퍼트렸다. 한편 식민지 시절의 관립학교들은 일본제국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었던 만큼 친일 성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친미와 친일, 두 경향성은 한국 근대학교 속에 배태된 뿌리 깊은 경향성이라 할 수 있다. 

순수 민립학교라 할 수 있는 대성학교, 오산학교를 비롯한 민족 지향의 학교들은 친미나 친일 성향은 없었지만 국가와 민족 중심의 근대적 가치관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근대의 한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20세기 초에 설립된 근대적 학교들은 국가(그것이 대한제국이든 일본제국이든)에 대한 충성심을 바탕에 깔고 표준화된 근대적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봉건사회를 극복하는 대안이었던 셈이다. 역사적 발전 단계를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도 이러한 학교체제는 그대로 이어졌다. 학교는 표준화된 인적자원을 양성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민립학교든 관립학교든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립학교는 법적으로 사립학교가 되었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는 준 공립학교에 가까웠다. 종립학교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국가주도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남다른 교육열은 국가주도 교육에 편승하여 획일적인 입시교육으로 치달았다. 부모와 국가가 손을 맞잡고 아이들을 몰아부친 셈이다. 

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쳐 산업화가 일단락되던 20세기 말 학교붕괴 현상과 더불어 새로운 교육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모와 교사들이 입시위주의 국가주도 교육에 반기를 들고 아이들을 중심에 둔 교육을 하고자 했다. 대안교육운동이라 일컬어지는 이 흐름은 민간이 주도하는 교육운동으로, 백 년 전의 민립학교운동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흐름은 근대화 과정을 거친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항문화운동과 결부된 움직임이기도 했다.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서구의 프리스쿨운동과 한국의 대안학교운동은 국가주도 교육에 대항하여 일어난 운동인 반면, 19세기 중반의 덴마크 자유학교와 그 영향을 받아 생겨난 20세기 초의 오산학교 등은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었던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민간이 주체가 되어 시민의 힘을 기르는 교육운동이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민립학교운동은 근대를 만들어낸 시민운동이면서 동시에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민운동인 셈이다. 

 

21세기 민립학교와 기독교 대안학교

 

20세기 초 이 땅을 휩쓸었던 민립학교 설립 붐이 21세기에 또다시 일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새롭게 문을 연 대안학교가 5백여 개에 이른다. 오늘날의 대안학교 설립 붐과 백여 년 전의 흐름이 닮은 점은 기독교계가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비기독교 학교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는 데 반해, 개신교계가 ‘1교회 1학교’ 운동을 벌이면서 기독대안학교들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대형교회와 연계된 학교들의 경우 사실상 대안학교라기보다 종립 사립학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국가로부터 재정결함보조금 지원을 받지 않는 순수 사립학교인 셈이다. 미국의 사립학교와 비슷한 양태로 볼 수도 있다. 

대안교육이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공동체성을 북돋는 교육이라고 한다면, 민립학교라 해서 모두 대안학교로 보기는 어렵다. 자칭, 타칭 대안학교라 불리지만 공통분모라고는 ‘비인가’라는 점 말고는 별로 없을 만큼 대안학교의 스펙트럼은 넓다. 서구에서 대안교육이란 말 대신 자유교육, 민주교육이란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는 것도 ‘대안alternative(또하나의, 선택가능한)’이란 말의 탈맥락적 성격 때문이다. 설립 운영 주체가 누구든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공동체 정신에 근거한 교육 내용을 갖추고 있는 곳을 대안학교로 본다면, 그 수는 훨씬 적을 것이다.

한국기독교대안학교연맹에 소속된 76개 대안학교들은 상당히 폭넓은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미국 명문대 유학을 목표로 국제학교를 표방하는 학교도 있고, 사회적 소외계층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있다. 학생 수가 30명 미만인 현장도 있는 반면 3백 명이 넘는 현장도 적지 않다. 연맹은 나름 엄격한 회원 기준에 따라 교육현장의 건강성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편이어서, 기독대안학교를 표방하는 학교들 가운데는 연맹에 소속되지 않은 현장이 훨씬 많은 실정이다.(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4백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수적인 기독교 대안학교들은 공교육 내용 중 거부감이 큰 성교육과 진화론, 근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해주겠다며 신도 부모들을 공략한다. 극우 정치집단과 보수 기독교계는 이념적으로 반공과 반동성애, 자유시장주의를 공통분모로 하며 반공을 국시로 내걸었던 장로 출신 대통령 이승만을 우상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부산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인 세계로교회는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기독교아카데미라는 대안학교를 설립해 올해 188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세계로교회가 주도하는 단체인 ‘세이브코리아’는 윤석열 탄핵 이후 국가비상기도회를 매주 여의도에서 열고 있다. 일종의 ‘구국’ 집회인 셈이다. 구국의 논리는 “민주당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구호에 잘 드러난다.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한다. 국민의힘당이 부르짖고 싶어 하는 것을 대신 외쳐주는 스피커 역할을 하는 셈이다. 손현보 목사가 주도하는 세계로교회와 함께 보수 기독교계의 쌍두마차 격인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사랑제일교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이가 좋지 않다. 12.3 쿠데타 이후 집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보인다. 전광훈 목사가 수년째 광화문 집회를 주도하고 자유통일당을 창당하는 등 정치활동에 주력하는 데 반해 세계로교회는 교육활동에 힘을 쏟는 점이 다르다. 세이브코리아가 주최하는 여의도 집회에는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3월1일 서울 여의대로에서 열린 세이브코리아 국가비상기도회에 참가한 청소년과 청년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정치와 종교 그리고 교육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와 정치의 유착은 오래되었다. 해방 직후,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지주 계급이었던 장로교인들이 공산당과 갈등을 빚으면서 월남했고, 이들이 반공주의의 선봉에 서면서 미군정이 지원하던 우파 정권과 유착 관계를 맺게 된다. 북한의 공산화와 분단 상황이 남한 사회와 기독교의 보수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셈이다. 미군정 시절,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미군은 한국 사정을 잘 아는 선교사의 자녀와 기독교인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면서 당시 인구의 3%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이 정부의 정책 결정에 대거 참여하게 된다. 

역사학자 배덕만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정치와 분리된 적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국가체계를 잡는 과정에서 정부가 개신교에 특혜를 주면서 개신교 또한 정부에 적극 협조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런 유착 관계는 감리교 장로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서 더욱 강화된다. 개신교는 이승만 정권을 적극 지지하면서 대다수 한국 교회는 4.19혁명에 동참하지 않았다. 또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시도할 때도 보수 교회는 이를 지지했고, 군 선교인 ‘전군 신자화 운동’과 1974년부터 벌어진 대규모 선교대회를 유신정권이 지원하면서 한국 교회가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재 정권 시기가 한국 기독교의 부흥기였던 셈이다.1)

해방 이후 개신교의 정교유착 역사를 감안하면 윤석열 정권에 보수 기독교계가 환호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리박스쿨’의 등장 또한 놀랄 일이 아니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성 ‘이(리)’와 ‘박’을 딴 리박스쿨은 “자유를 지키고 싶다면 이승만과 박정희를 배우라”는 이념을 내건 단체로 역사교육을 주 활동으로 내세우지만 지난 대선 때 불법 댓글 공작팀을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지원하고 있는 이 단체는 교육부의 묵인 속에 늘봄학교 강사를 대거 배출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정치와 종교, 교육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종교와 정치는 수천 년 동안 밀착해왔고, 교육 또한 그 영향권 속에 있었다. 유학자들은 제사장이자 교사였으며, 루소와 페스탈로치, 듀이 등 서구의 교육사상가들은 정치사상가이기도 했다. 근대 이후 정치와 종교, 교육을 분리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완전한 분리는 본질상 가능하지 않다.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편향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길이 최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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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덕만,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 대장간, 2010.


글쓴이 현병호 _ 계간 《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