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10대’들의 ‘극우화’가 문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극우’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부상했다. 군대를 동원한 계엄령을 옹호하고, 부정선거 음모론을 설파하는 윤석열 지지자들의 모습, 특히 2025년 1월 일어난 서울 서부지방법원 폭동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전부터 극우세력은 꾸준히 존재해왔고 그들의 영향력도 작지 않았다. ‘반국가세력 척결’을 내건 대통령의 비상계엄 시도와 부정선거 주장 등으로 그들에게 대중의 이목이 끌리며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청소년-청년 극우화 담론 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그 요지는 10~20대 집단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극우 성향이 강하고, 특히 남성 집단이 그러하며, 이는 이질적이거나 특별히 문제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여러 조사에서 ‘청소년-청년 남성 집단이 더 극우적/보수적’이라고 나타나고 있다는 점, 남성 청소년들 사이에서 여성 혐오, 안티 페미니즘, 소수자 혐오, 혐중 음모론, 독재 옹호 등의 문화가 표출되고 있다는 점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담론, 이 문제가 이야기되는 방식은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청소년을 문제집단으로 타자화하는 진부한 구도가 반복되고 있고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이 우경화되면서 청소년들도 우경화되고 있는 것이 진짜 문제이고, ‘극우 성향의 증가’는 그 결과로 나타난 표면적 현상이라고 파악하면 무엇이 문제인지가 달라진다. ‘(한국 사회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왜 점점 더 우경화하고 있는가? 왜 젊은 남성 집단은 그에 더 큰 영향을 받는가? 어떤 요소가 작용했는가?’와 같은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을 타자화하는 담론은 이제 학교가 이들을 교육/치료해야 한다는 해결책과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국회의원이 2025년 8월에 발의한 ‘교실 극우화 방지 3법’은 △ 교원의 정치 기본권 보장, △ 디지털 미디어 문해력 교육 강화, △ 가짜뉴스 및 명예훼손 대응을 위한 정보통신망법 개정 등이다. 이처럼 학생들에게 무슨 교육을 해서 어떤 능력을 길러 주면 극우화가 방지될 거라는 생각은 개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기도 하고, 지나친 교육만능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청소년-청년 극우화 담론이 향하는 기존 사회 체제의 문제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극우화되는 남성 청소년들을 교정, 보호, 구원해야 한다는 정책이라면 너무나 부적절하지 않은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들
내가 10대 청소년이었을 때,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부터 학교생활에 여러 불만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답답함과 분노가 정당하다는 확신이 없었다. 세상에 대한 의문이나 삶에 대한 고민 등 학교 수업(정확히는 시험 공부)과 상관없는 질문들은 허락되지 못했다. 학교는 자유롭고 평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 강요, 획일적 제복과 외모 단속, 통제와 처벌 위주의 규칙, 군사주의적 질서, 극심한 경쟁과 능력주의 옹호 등 학교 생활의 모든 것이 반민주주의적, 극우적 문화의 형태였다.
학생을 평가하고, 벌 주고, 겁을 주는 문화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하는 체념도 일상화되었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의 교육이라지만, 학교 안에는 여전히 반민주주의적인 요소들이 주류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었다. 교육 과정에도 민주주의와 인권이나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긴 했지만, 실제 학교생활은 그와는 정반대의 사회였다. 민주주의는 실제 현실, 지금 우리 삶의 문제라기보다는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질 뿐이었다. 어른들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친구와 경쟁해서 이겨야 했다.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들 했지만 “쟤는 좀 맞아야 해”라며 어떤 폭력은 정당화되기도 했다. 학교가 실제로 가르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능력주의와 경쟁의 논리였다. 입시와 성적 이외의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었고, 학생들은 불안과 자기혐오를 내면화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억울하면 성공(출세)해라”라는 말이 통용되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넘어 극소수를 위한 ‘그들만의 리그’로만 존재하는 게 지금의 교육 체제다. 이런 현실에서 이뤄지는 대안적인 시도나 교육과정에 무작정 새 주제를 추가하자는 식의 해법은 공허하고 때로는 기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저항할 힘을 모으는 것도, 바뀔 수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학교에서부터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겪으며 세상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냉소가 강화되며 미래에 대한 전망을 그려 나가기도 힘들어지고 있다.
비교와 경쟁에 익숙해진 삶 속에서 차별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불안감을 부른다. “인정받으려면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믿음이 내면화된 결과는 일베와 같은 극우적 사상이 활발해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오늘날 청소년·청년의 극우화는 한국 사회와 교육의 오랜 극우적 체제가 마침내 꽃을 피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꽃을 피운 지도 오래되었으나, 별거 아닌 일처럼 취급해왔기에 뒤늦게 발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극우적 가치와 문화가 가장 익숙하게 재생산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체제를 비판하고 극복하려 해온 운동의 약화, 민주주의적 가치의 헤게모니 상실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요즘 10대들의 극우화’를 걱정하며 ‘이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하는 식의 진단은 그래서 어불성설이다. 구조적 맥락을 삭제한 채 개인의 문제로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어떻게 함께 바꿀 것인가’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른들’이 10대들을 나쁘고 위험한 것으로부터 지켜줘야 한다는 보호주의적 통념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저항하는 10대들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극우적 세계관에 끄덕이는 10대들도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다.
약함을 혐오하며 강함을 숭배하게 만드는 세상, 손해 보는 것도 싫고 민폐 끼치는 것도 싫은 마음, ‘무임승차’에 대한 반감과 ‘어쩔 수가 없다’는 체념 모두 극우 사회의 뿌리고, 극우적 체제를 옹호하는 세계관이 극우화의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뿌리를 건드리기 위해서는 극우적인 학교의 모습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며, ‘양극화와 불평등을 부추기는 능력주의’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 필요하다.
글쓴이 난다 _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완벽한 능력과 자격을 갖추어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어설프고 취약하면서도 서로 돌볼 수 있는 삶을 꿈꾸며 청소년인권운동에 함께하고 있다.
* 이 글은 지난 10월 25일 개최한 <제12회 청소년활동가마당> ‘극우화의 경계 사이, 청소년은 어디에’에서 발표한 원고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전문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walgy.campaignus.me
‘요즘 10대’들의 ‘극우화’가 문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극우’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부상했다. 군대를 동원한 계엄령을 옹호하고, 부정선거 음모론을 설파하는 윤석열 지지자들의 모습, 특히 2025년 1월 일어난 서울 서부지방법원 폭동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전부터 극우세력은 꾸준히 존재해왔고 그들의 영향력도 작지 않았다. ‘반국가세력 척결’을 내건 대통령의 비상계엄 시도와 부정선거 주장 등으로 그들에게 대중의 이목이 끌리며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청소년-청년 극우화 담론 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그 요지는 10~20대 집단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극우 성향이 강하고, 특히 남성 집단이 그러하며, 이는 이질적이거나 특별히 문제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여러 조사에서 ‘청소년-청년 남성 집단이 더 극우적/보수적’이라고 나타나고 있다는 점, 남성 청소년들 사이에서 여성 혐오, 안티 페미니즘, 소수자 혐오, 혐중 음모론, 독재 옹호 등의 문화가 표출되고 있다는 점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담론, 이 문제가 이야기되는 방식은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청소년을 문제집단으로 타자화하는 진부한 구도가 반복되고 있고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이 우경화되면서 청소년들도 우경화되고 있는 것이 진짜 문제이고, ‘극우 성향의 증가’는 그 결과로 나타난 표면적 현상이라고 파악하면 무엇이 문제인지가 달라진다. ‘(한국 사회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왜 점점 더 우경화하고 있는가? 왜 젊은 남성 집단은 그에 더 큰 영향을 받는가? 어떤 요소가 작용했는가?’와 같은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을 타자화하는 담론은 이제 학교가 이들을 교육/치료해야 한다는 해결책과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국회의원이 2025년 8월에 발의한 ‘교실 극우화 방지 3법’은 △ 교원의 정치 기본권 보장, △ 디지털 미디어 문해력 교육 강화, △ 가짜뉴스 및 명예훼손 대응을 위한 정보통신망법 개정 등이다. 이처럼 학생들에게 무슨 교육을 해서 어떤 능력을 길러 주면 극우화가 방지될 거라는 생각은 개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기도 하고, 지나친 교육만능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청소년-청년 극우화 담론이 향하는 기존 사회 체제의 문제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극우화되는 남성 청소년들을 교정, 보호, 구원해야 한다는 정책이라면 너무나 부적절하지 않은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들
내가 10대 청소년이었을 때,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부터 학교생활에 여러 불만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답답함과 분노가 정당하다는 확신이 없었다. 세상에 대한 의문이나 삶에 대한 고민 등 학교 수업(정확히는 시험 공부)과 상관없는 질문들은 허락되지 못했다. 학교는 자유롭고 평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 강요, 획일적 제복과 외모 단속, 통제와 처벌 위주의 규칙, 군사주의적 질서, 극심한 경쟁과 능력주의 옹호 등 학교 생활의 모든 것이 반민주주의적, 극우적 문화의 형태였다.
학생을 평가하고, 벌 주고, 겁을 주는 문화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하는 체념도 일상화되었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의 교육이라지만, 학교 안에는 여전히 반민주주의적인 요소들이 주류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었다. 교육 과정에도 민주주의와 인권이나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긴 했지만, 실제 학교생활은 그와는 정반대의 사회였다. 민주주의는 실제 현실, 지금 우리 삶의 문제라기보다는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질 뿐이었다. 어른들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친구와 경쟁해서 이겨야 했다.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들 했지만 “쟤는 좀 맞아야 해”라며 어떤 폭력은 정당화되기도 했다. 학교가 실제로 가르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능력주의와 경쟁의 논리였다. 입시와 성적 이외의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었고, 학생들은 불안과 자기혐오를 내면화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억울하면 성공(출세)해라”라는 말이 통용되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넘어 극소수를 위한 ‘그들만의 리그’로만 존재하는 게 지금의 교육 체제다. 이런 현실에서 이뤄지는 대안적인 시도나 교육과정에 무작정 새 주제를 추가하자는 식의 해법은 공허하고 때로는 기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저항할 힘을 모으는 것도, 바뀔 수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학교에서부터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겪으며 세상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냉소가 강화되며 미래에 대한 전망을 그려 나가기도 힘들어지고 있다.
비교와 경쟁에 익숙해진 삶 속에서 차별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불안감을 부른다. “인정받으려면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믿음이 내면화된 결과는 일베와 같은 극우적 사상이 활발해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오늘날 청소년·청년의 극우화는 한국 사회와 교육의 오랜 극우적 체제가 마침내 꽃을 피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꽃을 피운 지도 오래되었으나, 별거 아닌 일처럼 취급해왔기에 뒤늦게 발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극우적 가치와 문화가 가장 익숙하게 재생산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체제를 비판하고 극복하려 해온 운동의 약화, 민주주의적 가치의 헤게모니 상실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요즘 10대들의 극우화’를 걱정하며 ‘이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하는 식의 진단은 그래서 어불성설이다. 구조적 맥락을 삭제한 채 개인의 문제로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어떻게 함께 바꿀 것인가’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른들’이 10대들을 나쁘고 위험한 것으로부터 지켜줘야 한다는 보호주의적 통념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저항하는 10대들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극우적 세계관에 끄덕이는 10대들도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다.
약함을 혐오하며 강함을 숭배하게 만드는 세상, 손해 보는 것도 싫고 민폐 끼치는 것도 싫은 마음, ‘무임승차’에 대한 반감과 ‘어쩔 수가 없다’는 체념 모두 극우 사회의 뿌리고, 극우적 체제를 옹호하는 세계관이 극우화의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뿌리를 건드리기 위해서는 극우적인 학교의 모습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며, ‘양극화와 불평등을 부추기는 능력주의’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 필요하다.
글쓴이 난다 _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완벽한 능력과 자격을 갖추어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어설프고 취약하면서도 서로 돌볼 수 있는 삶을 꿈꾸며 청소년인권운동에 함께하고 있다.
* 이 글은 지난 10월 25일 개최한 <제12회 청소년활동가마당> ‘극우화의 경계 사이, 청소년은 어디에’에서 발표한 원고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전문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walgy.campaignus.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