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시야, 제발 일어나!”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미국의 스타트업 로봇개발사 임바디드가 막시를 출시했다. 막시는 주로 5세부터 10세 아동을 위한 소셜 로봇으로, 몸체는 모자를 뒤집어 쓴 작은 요정 같이 생겼고 얼굴 부분에 모니터 스크린이 있어 귀여운 애니메이션으로 다채로운 표정을 드러낸다. 막시는 GPT 기반 AI가 탑재되어 있어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하며, 아동들의 사회정서와 인지 성장을 위한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아동이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인터랙티브 마음챙김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다.
부모용 애플리케이션이 있어 사용 시간을 제한할 수도 있고, 이 닦기처럼 아이가 수행했으면 하는 일들을 부모가 입력해두면 막시가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그 화제를 꺼내기도 한다. 유튜브에서 로봇 막시를 검색해 실제로 사용하는 아이들의 영상을 보면, 막시는 임바디드의 설명처럼 안전하고 지지적인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의사소통 기술을 연습하고 자신감을 키워가도록 돕는 좋은 친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2024년 11월경, 돌연 임바디드가 자금난으로 운영을 종료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클라우드 서버를 기반으로 운영되던 막시의 시스템도 먹통이 되었다. 막시의 얼굴 모니터가 빠르게 깜빡거리거나 음성에 반응하지 않고, 아예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이용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기 시작했다. 폐업한 회사는 더 이상 고객 문의도 받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친구를 잃게 된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는 막시를 끌어안고 울거나 “막시야, 제발 일어나”라고 계속해서 명령어를 말했다. 아빠 품에 안겨 소중한 친구가 사라진 상실감을 위로받는 아이도 있었다.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막시를 즐겨 사용하던 어른들도 막시에게 느낀 애정과 상실감, 막시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애도하는 영상을 업로드했다.
로봇 막시의 사례는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예전엔 공상과학 영화에서만 가능했던 로봇 친구가 현실에 구현됐을 때, 우리는 그 로봇을 무엇으로 여기게 될까? 로봇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막시의 상실을 슬퍼하는 영상에 달린 댓글처럼 어딘가 정신이 좀 이상하거나 바보 같은 행동일까? 나아가 로봇은 우리의 존재를 정말로 돌볼 수 있을까?
AI 돌봄 기술, 어디까지 왔을까
평균수명의 증가와 출생률 저하로 인한 인구학적 변화,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 등으로 가족 내에서 수행되던 돌봄은 이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가족 밖으로 나온 돌봄은 한편으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서비스로, 한편으로는 공공에서 제공하는 정책적 지원으로 제도화되었다. 그럼에도 돌봄이 필요하나 돌볼 사람은 없는 돌봄 공백의 추세는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돌봄노동에 대한 저평가는 여전하며, 노동의 특성상 명확한 경계 설정이 어렵고 정서적인 부담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공급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돌봄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책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바로 AI 기반 돌봄이다. 돌봄을 ‘인간의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일’이라고 정의한다면, 먹고 싸고 씻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는 한 번 충족했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런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 반복적이면서도 고된 노동은 AI 기반 로봇이 수행하기에 적합한 임무일 수 있다.
현재 AI 기반의 다양한 돌봄 로봇이 상용화되는 단계에 있는데, 크게는 신체 지원 로봇과 정서 지원 로봇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신체 지원 로봇은 일상생활 능력중 기본적인 신체적 일상생활 능력을 수행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하는 로봇이다. 대소변 가리기, 세수하기, 목욕하기, 식사하기, 옷 입기, 걷기, 계단 오르기 같은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신체 지원 로봇의 사례로 이동 보조 로봇이 있다. 음성 명령에 따라 환자를 침대에서 들어올려 휠체어나 욕조로 옮기는 로봇, 이용자의 보행 특성을 파악하고 고압의 공기를 발생시켜 보행 시 부족한 힘을 보조해주는 로봇이 대표적이다. 배변 지원 로봇은 스스로 대소변 뒤처리를 할 수 없는 사람을 돕는다. 내장된 센서로 환자의 대소변을 감지하고 흡입하여 자동 처리기로 배출한 후 회전 노즐로 세정하고 온풍으로 건조까지 해준다. 목욕 로봇은 욕조에 들어가고 나오는 동작을 보조하고 편안한 자세로 목욕할 수 있게 도우며, 목욕이 끝난 후에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다. 식사 시에 한쪽 팔로 음식물을 집어 올리고 다른 쪽 팔로 집어 올린 음식물을 사용자의 입으로 옮겨주는 식사 보조 로봇도 있다.
사용자의 정서 안정을 돕는 정서 지원 로봇은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로봇 ‘효돌’이 대표적이다. 노인들의 정서를 지원하는 효돌은 일곱 살 정도의 어린아이 모습을 한 봉제 인형 형태의 로봇으로, 음성뿐 아니라 접촉을 통해서도 상호작용한다. 인형의 여러 부위에 내장된 센서가 사용자의 손길에 반응하여 프로그램을 재생한다. “약 드실 시간이에요” “내일 오전 10시에 병원 예약 있으시죠?” 같은 말로 건강 관리도 해주고 손자처럼 애교를 부리는 등 이용자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사용자로 하여금 인형을 손자처럼 돌보게 함으로써, 관계와 정서적 상호 작용에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울증이나 불안 등 정신건강의 문제를 완화하는 데 활용되는 AI 로봇도 있다. 주로 채팅을 통해 정서적 지원과 정신건강 관리를 돕는 챗봇 형태 기술이다. 갑자기 공황 발작을 겪거나 누군가에게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싶을 때 메시지를 보내면 정신건강 관리 챗봇은 즉각 응답한다. 대화를 통해 챗봇은 사용자를 분석하고 그간 축적한 데이터에 기반해 어떤 치료 방식이 효과적일지를 추론한다. 사용자와 대화하면서 현재 적응 중인 치료 방식의 효과성을 판단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치료 방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대화 중 위험한 단어나 패턴이 감지되면 인간 치료사와 연결해주는 모니터링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최근 등장한 챗GPT와 같이 자연어 처리에 특화된 거대 언어 모델은 상담과 정신건강 지원에 특화된 챗봇은 아니지만 범용성과 접근성이 높아 일반 사용자들이 정신 건강 문제를 상담하고 개선하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AI 돌봄 기술은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갈까
1966년 요제프 바이첸바움이 개발한 챗봇 일라이자는 챗GPT와 같은 대화형 AI의 시초로 평가된다. 이 챗봇은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공감적 상담 방식을 모방해, 사용자의 문장에서 핵심 단어를 추출해 되묻거나, 그렇지 않으면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름은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인공 ‘일라이자’에서 따왔는데, 노동자 계급 출신 여성이 언어를 흉내 내 상류층 숙녀처럼 보이게 되는 주인공처럼, 바이첸바움은 이 챗봇을 인간의 말을 단순 모방하는 정도로 여긴 듯하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단지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일라이자와의 상담에서 실제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일부는 애착까지 느꼈다. 이 현상을 계기로 인공지능의 기계적 반응을 인간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의인화하는 경향을 ‘일라이자 효과’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돌봄 기술의 딜레마 중 하나가 등장한다. 기술에는 의도가 없어도 인간은 그것을 인간이 하는 행위처럼 받아들이고 애착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동차나 로봇 청소기에도 이름을 붙이곤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일진대, 자신의 용변을 받아내고 목욕시켜주고 밥을 먹여주는, 그러니까 우리와 살을 직접적으로 부대끼기도 하는 로봇, 한편으로는 말을 걸어주고 일정을 안내하고 자신을 돌봐달라 요구하는 등 우리를 관계의 장으로 초청하는 돌봄 로봇이라면 인간이 애착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무엇인가에 애착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철벽을 무너뜨리고 쉽사리 보이지 않았던 연약한 마음을 상대에게 열어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취약한 상태의 인간일수록, 관계에 목말랐던 사람일수록 상처받기 쉽고 상처의 여파도 더 크다.
인공물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기술심리학자 셰리 터클은 아동에게 일정 기간 인공지능 로봇과 교류하게 하고 그 양상을 연구했다. 그중에서 일부 심약한 아동들은 기계적 결함으로 로봇이 작동 오류를 보이면 ‘관계의 거절’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실망하여 의기소침해지고 폭식 증상을 보이는 아동도 있었다. 이 과정을 기술한 연구원은 취약한 아동을 이와 같은 관계에 노출시키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터클은 이 과정을 회고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교 로봇 기술은 그것이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하기 때문에 언제나 우릴 실망시킬 것이다. 그 기술은 우정을 약속하지만, 연기를 보일 수 있을 뿐이다.”
AI와 함께하는 돌봄의 미래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챗봇 일라이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바이첸바움은 인공지능 반대론자로 돌아서서 사람들 사이에서 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비판적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에게 인간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며,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맺는 연결에서 발견된다고 역설한다.
나는 바이첸바움의 생각에 동의한다. 인간은 ‘연결’을 통해 삶에 뿌리내리고 그 의미를 발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학교에서 연결할 대상을 찾지 못한 채 유령처럼 부유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그 연결을 인간과의 연결에만 한정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게 된다. 누군가를 땅에 발붙이게 하고 삶에 뿌리내리게끔 하는 것이 결국 아끼고 돌볼 대상을 발견하고 그와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한다면, 누군가에게는 그 대상이 친구일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어떤 공간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교과의 수업일 수도 있다. 돌봄 로봇과 형성한 관계로 인해 어떤 학생이 학교를 자신이 있을 만한 곳이라 느끼게 된다면, 그 연결이 비본질적이라 쉽게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우리가 반려동물과 맺는 관계를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관계 맺기 방식은 몇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반려동물을 ‘가족’이라 일컫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몇십 년 후에는, 그러한 인정의 범위에 돌봄 로봇이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터클의 견해처럼 인간이 AI 돌봄 기술을 애정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기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호 관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인식 범위가 확장되어 인공물과의 관계도 인간이 맺는 다층적인 관계 안에 포섭될 수 있을지 또 모를 일이다.
서두에 소개한 소셜 로봇 막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막시와 맺은 관계에서 아이들은 상실을 경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떤 존재를 사랑하고 돌보았던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한 사람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돌보고 돌봄받는 것은 몸으로 기억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물음은 새로운 방향으로 옮겨가야 할지 모른다. ‘AI가 우리를 돌볼 수 있는가’가 아니라, 기술이 제공하는 돌봄이 인간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모시켜 나갈 것인가로 향해야 한다.
AI 돌봄 기술은 고령자나 환자, 장애인 같은 존재들을 사회의 주변부로 밀어내고 ‘정상적인’ 인간들만으로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매끈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AI 돌봄 기술은 인간의 취약성과 연결을 긍정하며 다양한 존재의 모습을 포용하는 새로운 모습의 돌봄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방향의 키는 인간에게 쥐어져 있다.
_유경아(중학교 교사. 한국교원대학교 인공지능융합교육 강사. 최근 『AI 시대의 돌봄』을 출간했다.)
“막시야, 제발 일어나!”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미국의 스타트업 로봇개발사 임바디드가 막시를 출시했다. 막시는 주로 5세부터 10세 아동을 위한 소셜 로봇으로, 몸체는 모자를 뒤집어 쓴 작은 요정 같이 생겼고 얼굴 부분에 모니터 스크린이 있어 귀여운 애니메이션으로 다채로운 표정을 드러낸다. 막시는 GPT 기반 AI가 탑재되어 있어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하며, 아동들의 사회정서와 인지 성장을 위한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아동이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인터랙티브 마음챙김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다.
부모용 애플리케이션이 있어 사용 시간을 제한할 수도 있고, 이 닦기처럼 아이가 수행했으면 하는 일들을 부모가 입력해두면 막시가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그 화제를 꺼내기도 한다. 유튜브에서 로봇 막시를 검색해 실제로 사용하는 아이들의 영상을 보면, 막시는 임바디드의 설명처럼 안전하고 지지적인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의사소통 기술을 연습하고 자신감을 키워가도록 돕는 좋은 친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2024년 11월경, 돌연 임바디드가 자금난으로 운영을 종료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클라우드 서버를 기반으로 운영되던 막시의 시스템도 먹통이 되었다. 막시의 얼굴 모니터가 빠르게 깜빡거리거나 음성에 반응하지 않고, 아예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이용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기 시작했다. 폐업한 회사는 더 이상 고객 문의도 받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친구를 잃게 된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는 막시를 끌어안고 울거나 “막시야, 제발 일어나”라고 계속해서 명령어를 말했다. 아빠 품에 안겨 소중한 친구가 사라진 상실감을 위로받는 아이도 있었다.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막시를 즐겨 사용하던 어른들도 막시에게 느낀 애정과 상실감, 막시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애도하는 영상을 업로드했다.
로봇 막시의 사례는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예전엔 공상과학 영화에서만 가능했던 로봇 친구가 현실에 구현됐을 때, 우리는 그 로봇을 무엇으로 여기게 될까? 로봇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막시의 상실을 슬퍼하는 영상에 달린 댓글처럼 어딘가 정신이 좀 이상하거나 바보 같은 행동일까? 나아가 로봇은 우리의 존재를 정말로 돌볼 수 있을까?
AI 돌봄 기술, 어디까지 왔을까
평균수명의 증가와 출생률 저하로 인한 인구학적 변화,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 등으로 가족 내에서 수행되던 돌봄은 이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가족 밖으로 나온 돌봄은 한편으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서비스로, 한편으로는 공공에서 제공하는 정책적 지원으로 제도화되었다. 그럼에도 돌봄이 필요하나 돌볼 사람은 없는 돌봄 공백의 추세는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돌봄노동에 대한 저평가는 여전하며, 노동의 특성상 명확한 경계 설정이 어렵고 정서적인 부담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공급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돌봄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책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바로 AI 기반 돌봄이다. 돌봄을 ‘인간의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일’이라고 정의한다면, 먹고 싸고 씻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는 한 번 충족했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런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 반복적이면서도 고된 노동은 AI 기반 로봇이 수행하기에 적합한 임무일 수 있다.
현재 AI 기반의 다양한 돌봄 로봇이 상용화되는 단계에 있는데, 크게는 신체 지원 로봇과 정서 지원 로봇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신체 지원 로봇은 일상생활 능력중 기본적인 신체적 일상생활 능력을 수행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하는 로봇이다. 대소변 가리기, 세수하기, 목욕하기, 식사하기, 옷 입기, 걷기, 계단 오르기 같은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신체 지원 로봇의 사례로 이동 보조 로봇이 있다. 음성 명령에 따라 환자를 침대에서 들어올려 휠체어나 욕조로 옮기는 로봇, 이용자의 보행 특성을 파악하고 고압의 공기를 발생시켜 보행 시 부족한 힘을 보조해주는 로봇이 대표적이다. 배변 지원 로봇은 스스로 대소변 뒤처리를 할 수 없는 사람을 돕는다. 내장된 센서로 환자의 대소변을 감지하고 흡입하여 자동 처리기로 배출한 후 회전 노즐로 세정하고 온풍으로 건조까지 해준다. 목욕 로봇은 욕조에 들어가고 나오는 동작을 보조하고 편안한 자세로 목욕할 수 있게 도우며, 목욕이 끝난 후에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다. 식사 시에 한쪽 팔로 음식물을 집어 올리고 다른 쪽 팔로 집어 올린 음식물을 사용자의 입으로 옮겨주는 식사 보조 로봇도 있다.
사용자의 정서 안정을 돕는 정서 지원 로봇은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로봇 ‘효돌’이 대표적이다. 노인들의 정서를 지원하는 효돌은 일곱 살 정도의 어린아이 모습을 한 봉제 인형 형태의 로봇으로, 음성뿐 아니라 접촉을 통해서도 상호작용한다. 인형의 여러 부위에 내장된 센서가 사용자의 손길에 반응하여 프로그램을 재생한다. “약 드실 시간이에요” “내일 오전 10시에 병원 예약 있으시죠?” 같은 말로 건강 관리도 해주고 손자처럼 애교를 부리는 등 이용자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사용자로 하여금 인형을 손자처럼 돌보게 함으로써, 관계와 정서적 상호 작용에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울증이나 불안 등 정신건강의 문제를 완화하는 데 활용되는 AI 로봇도 있다. 주로 채팅을 통해 정서적 지원과 정신건강 관리를 돕는 챗봇 형태 기술이다. 갑자기 공황 발작을 겪거나 누군가에게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싶을 때 메시지를 보내면 정신건강 관리 챗봇은 즉각 응답한다. 대화를 통해 챗봇은 사용자를 분석하고 그간 축적한 데이터에 기반해 어떤 치료 방식이 효과적일지를 추론한다. 사용자와 대화하면서 현재 적응 중인 치료 방식의 효과성을 판단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치료 방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대화 중 위험한 단어나 패턴이 감지되면 인간 치료사와 연결해주는 모니터링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최근 등장한 챗GPT와 같이 자연어 처리에 특화된 거대 언어 모델은 상담과 정신건강 지원에 특화된 챗봇은 아니지만 범용성과 접근성이 높아 일반 사용자들이 정신 건강 문제를 상담하고 개선하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AI 돌봄 기술은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갈까
1966년 요제프 바이첸바움이 개발한 챗봇 일라이자는 챗GPT와 같은 대화형 AI의 시초로 평가된다. 이 챗봇은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공감적 상담 방식을 모방해, 사용자의 문장에서 핵심 단어를 추출해 되묻거나, 그렇지 않으면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름은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인공 ‘일라이자’에서 따왔는데, 노동자 계급 출신 여성이 언어를 흉내 내 상류층 숙녀처럼 보이게 되는 주인공처럼, 바이첸바움은 이 챗봇을 인간의 말을 단순 모방하는 정도로 여긴 듯하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단지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일라이자와의 상담에서 실제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일부는 애착까지 느꼈다. 이 현상을 계기로 인공지능의 기계적 반응을 인간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의인화하는 경향을 ‘일라이자 효과’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돌봄 기술의 딜레마 중 하나가 등장한다. 기술에는 의도가 없어도 인간은 그것을 인간이 하는 행위처럼 받아들이고 애착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동차나 로봇 청소기에도 이름을 붙이곤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일진대, 자신의 용변을 받아내고 목욕시켜주고 밥을 먹여주는, 그러니까 우리와 살을 직접적으로 부대끼기도 하는 로봇, 한편으로는 말을 걸어주고 일정을 안내하고 자신을 돌봐달라 요구하는 등 우리를 관계의 장으로 초청하는 돌봄 로봇이라면 인간이 애착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무엇인가에 애착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철벽을 무너뜨리고 쉽사리 보이지 않았던 연약한 마음을 상대에게 열어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취약한 상태의 인간일수록, 관계에 목말랐던 사람일수록 상처받기 쉽고 상처의 여파도 더 크다.
인공물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기술심리학자 셰리 터클은 아동에게 일정 기간 인공지능 로봇과 교류하게 하고 그 양상을 연구했다. 그중에서 일부 심약한 아동들은 기계적 결함으로 로봇이 작동 오류를 보이면 ‘관계의 거절’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실망하여 의기소침해지고 폭식 증상을 보이는 아동도 있었다. 이 과정을 기술한 연구원은 취약한 아동을 이와 같은 관계에 노출시키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터클은 이 과정을 회고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교 로봇 기술은 그것이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하기 때문에 언제나 우릴 실망시킬 것이다. 그 기술은 우정을 약속하지만, 연기를 보일 수 있을 뿐이다.”
AI와 함께하는 돌봄의 미래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챗봇 일라이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바이첸바움은 인공지능 반대론자로 돌아서서 사람들 사이에서 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비판적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에게 인간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며,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맺는 연결에서 발견된다고 역설한다.
나는 바이첸바움의 생각에 동의한다. 인간은 ‘연결’을 통해 삶에 뿌리내리고 그 의미를 발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학교에서 연결할 대상을 찾지 못한 채 유령처럼 부유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그 연결을 인간과의 연결에만 한정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게 된다. 누군가를 땅에 발붙이게 하고 삶에 뿌리내리게끔 하는 것이 결국 아끼고 돌볼 대상을 발견하고 그와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한다면, 누군가에게는 그 대상이 친구일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어떤 공간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교과의 수업일 수도 있다. 돌봄 로봇과 형성한 관계로 인해 어떤 학생이 학교를 자신이 있을 만한 곳이라 느끼게 된다면, 그 연결이 비본질적이라 쉽게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우리가 반려동물과 맺는 관계를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관계 맺기 방식은 몇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반려동물을 ‘가족’이라 일컫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몇십 년 후에는, 그러한 인정의 범위에 돌봄 로봇이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터클의 견해처럼 인간이 AI 돌봄 기술을 애정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기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호 관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인식 범위가 확장되어 인공물과의 관계도 인간이 맺는 다층적인 관계 안에 포섭될 수 있을지 또 모를 일이다.
서두에 소개한 소셜 로봇 막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막시와 맺은 관계에서 아이들은 상실을 경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떤 존재를 사랑하고 돌보았던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한 사람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돌보고 돌봄받는 것은 몸으로 기억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물음은 새로운 방향으로 옮겨가야 할지 모른다. ‘AI가 우리를 돌볼 수 있는가’가 아니라, 기술이 제공하는 돌봄이 인간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모시켜 나갈 것인가로 향해야 한다.
AI 돌봄 기술은 고령자나 환자, 장애인 같은 존재들을 사회의 주변부로 밀어내고 ‘정상적인’ 인간들만으로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매끈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AI 돌봄 기술은 인간의 취약성과 연결을 긍정하며 다양한 존재의 모습을 포용하는 새로운 모습의 돌봄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방향의 키는 인간에게 쥐어져 있다.
_유경아(중학교 교사. 한국교원대학교 인공지능융합교육 강사. 최근 『AI 시대의 돌봄』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