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13] 공부 이야기(4) _평생학습 시대, 양육자와 교육자에게 필요한 공부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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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c3f1a601ac2.png루이스 케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여왕의 나라에서는 제자리에 있으면 뒤로 밀려나버리고, 

그 자리에 멈춰 있으려면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기묘한 법칙이 존재한다.    

 

붉은여왕의 거울나라와 평생학습 시대 

 

근대화라는 과제를 두고 국가는 처음부터 딜레마 상황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산업화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보편교육을 확대하고 국민들을 계몽시켜 근대적 시민을 기르는 과업을 수행하는 한편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이 높아지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프로이센에서 학교 시스템을 볼케슐레와 레알슐레로 이원화한 것처럼, 보편교육을 지향한 대부분의 근대국가들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기득권 계층 중심의 소수에게만 제공함으로써-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계층에게는 비슷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부작위를 통해-학교를 계층재생산 기구로 만들었다. 20세기 말 신자유주의와 함께 부각되기 시작한 계층 양극화 현상은 필연적인 결과인 셈이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며 평생교육이 시대적 트렌드가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나고 있다. 평생교육 붐은 국가가 국민의 생존을 책임지지 못하는 시대, 기업이 평생고용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기술이 발전하고 노동시장이 유연화되면서 새로운 직장 또는 직업을 찾아야만 하는 이들이 나날이 늘고 있다. 게다가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후의 삶에 대한 걱정도 늘어난다. 공부 붐이 이는 것은 이런 사회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학습 시대는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여왕의 거울나라처럼 멈춰 있으면 어느새 뒤처져버리고, 제자리에 있기 위해서라도 쉴 새 없이 달려야만 하는 시대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면서 ‘어어’ 하다 보면 어느새 뒤처지고 말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들 공부 압박감을 느낀다. 진화생물학 이론에 의하면 모든 생명체는 주변 환경과 경쟁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함으로써 겨우 생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애시당초 이 세계 자체가 붉은여왕의 거울나라인 셈이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불기 시작한 평생교육 바람은 바람의 세기가 조금 강해져 모두가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따름인지도 모른다.

20세기 후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바람을 타고 전 세계에서 글로벌 인재를 조달할 수 있게 된 국가와 기업은 인적자원 양성에 덜 적극적이게 되었다. 그와 함께 계몽주의가 국가 수준에서 개인 수준으로 이행하고 있는 양상이 나타난다.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근대적 이념보다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 차원이긴 하지만 개인들의 학구열이 높아지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최근 선진국들에서 극우 정권이 대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깊이 있는 인문학적 공부보다 생존을 위한 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일까. 중산층이 극우 정부를 지지하는 배경에는 진보 정권이 닦아놓은 복지제도를 지키고자, 다시 말해 이민자나 난민에게 자기 몫의 파이가 돌아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들린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에서 빼앗은 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서구의 복지제도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한편으론 정체시킨 측면도 없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대두한 배경이다. 식민지였던 한국사회는 복지제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중산층이 안정되기 전에 혼란기를 맞았다. IMF의 충격으로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이들은 자기계발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고,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대학들은 인문학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대학 바깥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밥벌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 공부에 몰두하는 성인들, 뒤늦게 자연과학 공부에 재미들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평생학습 시대, 공부의 시대에 길을 잃지 않으려면 공부를 왜 하는지, 자신이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무작정 공부를 하기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감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공부의 방향과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상 모든 공부는 전체를 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달리 말하면 맥락을 읽는 일이다. 육아와 교육 또한 시대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 흐름을 읽는다면 시류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양육자와 교육자의 역할

 

육아와 교육에도 트렌드가 있다. 20세기 초 행동주의 심리학이 유행하면서 정해진 시간에 수유하는 과학적 육아법이 유행하던 시절, 시대를 앞서간다는 젊은 부모들은 애써 엄격한 부모가 되려고 애썼다.1) 전후 자유주의 기조와 함께 애착이론이 주목받으면서 관대한 육아법이 대세가 되자 행동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대세 육아법에 휘둘리지 않기란 어렵다. 21세기 들어 한국의 젊은 부모들 사이에서 대세가 된 공감 육아법이 육아를 지나치게 어렵게 만들고 부모가 아이에게 휘둘리게 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하면서 최근에는 다시금 전통육아가 떠오르고 있다.

양육과 마찬가지로 교육 또한 시대적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20세기 들어 아동중심 사상에 기초한 진보주의 교육이 등장한 이후 아이들을 풀었다 조였다 하며 냉온탕을 오가는 교육정책의 혼란이 1세기 이상 계속되었다.2) 아이들의 흥미를 끄는 활동 위주의 학습자중심 교육을 표방한 진보주의 교육이 20세기 전반기 미국을 중심으로 풍미하다 1957년 스푸트닉 쇼크로 학력 저하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두되면서 보수주의 교육으로 회귀하지만 중도탈락생이 급증하고 68혁명의 열기 속에서 1970년대 이후 다시 진보주의 교육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짧은 반동의 시기가 있었지만 서구적 관점에서 볼 때 지난 한 세기는 사실상 진보주의 교육이 주류로 떠오른 시대였다. 60-70년대의 반문화운동이 보수적인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젊은 세대의 저항이었다면 21세기 들어 젊은이들이 우경화하는 것은 어느덧 주류가 된 진보적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젊은 세대의 반항의 몸짓인지도 모른다. 10여 년 전 한국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한 일베 또한 ‘진보적 꼰대’들에 맞서는 젊은이들의 반문화운동의 한 축으로 볼 수도 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났다면 그 과정에서 교육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까?

교육의 본질을 탄생성(natality)으로 본 아렌트의 관점은 시대를 넘어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교육은 아이가 담지한 새로움을 보전해 새로운 것으로서 낡은 세계에 소개하는 일이다. 교사는 (새로운 존재인) 아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아이로 인해 새로워질 가능성을 품고 있는 낡은) 이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부모나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3) 마지막 구절은 근대적 계몽주의자에 가까운 발언이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부모나 교사는 마땅히 우리가 몸담고 있는 낡은 이 세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어른은 이 세계를 지키고 아이들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책임과 함께 미래 세대인 아이들에게 이 세계를 안내해야 하는 책임을 동시에 지고 있다. 긴장 관계에 있는 아이들과 세계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일은 시대를 불문하고 어렵다.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한탄이 수천 년 전 수메르 문명 시대 점토판에도 적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좋은 삶의 길을 일러주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꼰대 아버지의 장광설이나 다름없다. 과거와 미래의 간극이 크지 않았던 시대에도 쉽지 않았던 그 일이 오늘날에는 한층 어려워졌다. 과거의 지식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전통이나 어른의 권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부모와 교사는 여전히 아이들을 이 세계로 안내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아동중심의 진보교육 사상이 아이들을 그들만의 세계에 남겨둠으로써 이 세계와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힘들다. 어른의 권위가 부정되고 어른은 단지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도와주면서 아이 옆 또는 뒤에 무력하게 서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이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소홀히 하게 되면서 세대 간의 단절이 심화된 측면도 있다. 아이들 입장에서 보자면 가르침보다 배움이 중시되고 학습에서 흥미와 자발성이 강조되면서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알아서 배워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진보주의 교육은 삶과 동떨어진 교육을 비판하며 ‘함으로써 배운다’는 기치를 내건 경험주의 또는 실용주의 교육의 토대 위에 서 있다. 학습과 놀이의 경계를 허물고 일하면서 배우고 놀면서 배우는 것을 지향하지만, 아이가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배워야 하는 과정을 소홀하게 만드는 경향이 없지 않다. 배움이 선택과 협상의 대상이 되면서 마땅히 배워야 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어른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확신도 없고, 좋은 삶의 기준이 개개인에게로 옮겨간 시대에 부모와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공부, 어떻게 해야 할까

 

공부하는 부모는 대충 세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아이의 성적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는 유형. 아이의 학교생활과 공부에 보탬이 되는 각종 정보를 습득하고 실제로 아이가 하는 학습 내용을 선행학습하면서까지 아이의 공부에 도움이 되고자 애쓴다. 둘째는 아이를 잘 키우고자, 다시 말해 좋은 부모가 되고자 육아서와 자녀교육서를 열심히 읽는 유형으로, 육아의 트렌드를 좇아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다. 셋째는 부모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공부하는 유형으로, 이들은 아이와 적절히 거리를 두고 스스로 배우는 자의 모드를 취한다. 

공부하는 교사도 크게 세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지식전달자로서의 교사 역할에 충실한 유형으로, 교과지도를 더 잘하기 위해 각종 학습지도서와 참고자료를 섭렵한다. 이들은 책보다 인터넷(i-scream.co.kr 등)에 올라오는 각종 수업자료를 더 열심히 본다. 두 번째 유형은 아이들을 이해하고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 하는 교사들로 교육 관련 책을 읽고 교사연수 등에 열심히 참여한다. 세 번째 유형은 교사로서의 전문성이나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한 노력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는 유형이다. 모든 분류가 그렇듯이 억지스러운 면이 있으나 어떤 경향성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교육이 교사들 간, 부모와 교사 간의 팀플레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어떤 유형이든 괜찮을 것이다. 문제는 팀플레이를 한다는 인식이 없거나 자신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육아서 읽기를 그만두고서 ‘좋은 부모’ 강박에서 자유로워졌다는 한 엄마의 고백처럼4) 자칫 공부는 우리를 얽매이게 만들기도 한다. 메타적 인식이 필요한 이유다. 자신을 알고 전체의 맥락을 읽는 공부가 필요하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10여 년 뒤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짐작하기 어려울 만치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변화의 방향은 분명하다. 정보와 상호작용의 총량이 높아지는 방향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기계 사이의 상호작용이 폭증하고 있다. 범람하는 정보와 메시지 속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가려내고 상호작용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리터러시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모든 분야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맥락을 읽고 소통할 줄 아는 능력은 사실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생존 능력이었다. 세상이 좀 더 복잡해지면서 안테나 감도를 더 높일 필요가 생겼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은 그런 능력을 길러줄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모든 학습과정에서 궁극적으로 배우는 것 또한 수신과 발신 능력이다. 맥락을 읽고 상호작용하는 법, 곧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프로젝트 학습, 토론회, 구기운동 모두 그 속에 깔린 교육 원리는 같다. 흐름과 맥락을 읽고 상호작용 역량을 키울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아이들은 다양한 활동 속에서 판이 돌아가는 것을 읽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전체 판 속에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읽는 눈을 기른다. 이는 곧 자신의 삶이 어떤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전개되는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어떤 맥락으로 움직이는지를 읽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공부는 세상을 읽고 자기를 읽는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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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머힐을 설립한 닐은 아이들을 파블로프의 개처럼 바라보는 행동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2) 데이비드 페레로(David J. Ferrero)는 20세기 교육을 “진보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 사이의 100년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3) 박은주, ‘후기 근대 시대, 가르침의 의미와 가치 재탐색_한나 아렌트의 ‘행위’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회, 2015.05.19.(rf_Hannah Arendt, The Crisis in Education, p257)

4) 유보라, 육아서를 버리고 육아가 가벼워졌다, 《민들레》 150호.


_현병호(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