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인들의 자아 비대
불편함은 한 인간의 생존뿐 아니라 사회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석기에서 청동기, 다시 철기로의 발전은 모두 기존의 도구에 대한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도구를 개발한 데서 시작되었다. 작은 주먹도끼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부서져 버리는 돌의 강도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인류는 새로운 도구, 새로운 물질을 찾아 헤매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테고 그대로 정체되었을 것이다.
민주주의 발전 역시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불편함에서 시작되었다. 봉건제라는 사회제도, 착취적인 경제구조, 차별적인 대우에 불편함을 표현한 이들에 의해 인류는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제도와 문화를 만들 수 있었다. 최근 코미디 프로에서 재현된 1990년대 직장 생활에는 담배 연기 자욱한 사무실, 노골적인 성차별과 성희롱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 그려졌다. 이런 모습이 30여 년 만에 자취를 감춘 것도, 윗세대의 관습에 불편함을 느낀 후세대들이 문제점을 하나씩 바꾸어나간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할 때, 이는 개인과 사회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최근 ‘프로 불편러’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불편을 토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시끄러우니까 출동할 때 소방차 사이렌을 끄라고 민원을 넣는 시민, 경비원이 경비실에서 계속 에어컨을 트는 게 불편하다는 아파트 주민, 자녀의 담임교사가 SNS를 하는 게 못마땅하다는 학부모 등 불편함의 사유는 점점 사소해지고, 수위는 점점 높아져가는 듯하다.
사람들은 흔히 자아존중감이 낮은 사람들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인지 왜곡을 많이 겪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커져버린 자아를 가진 사람 또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 ‘스스로에 대한 판단이 지나치게 높은’ 자아 비대 상태의 사람은 낮은 자아존중감을 지닌 사람과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자신을 가장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에 어딜 가나 최고의 대접을 받기를 원하고, 그 기대보다 조금이라도 낮은 대우를 받았을 때 크게 분노한다. 자아존중감이 낮은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에 비해, 비대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분노의 방향이 타인에게로 향한다. 비대한 자아가 더 파괴적인 이유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때론 우리 사회가 자아를 지나치게 부풀리도록 부추긴다는 생각이 든다. 베스트셀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바로 ‘나’다. ‘나를 사랑하자’, ‘내가 진정 원하는 것’ 등등 ‘나’에 대한 다양한 메시지는 삭막한 세상에서 위로가 되지만 가끔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에 집중된 메시지들이 자칫 지나친 자기중심성을 부추기고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는 것 같아서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동심리 분야 교수가 부모의 잘못된 ‘마음 읽어주기’ 양육이 아이들을 망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훈육이 필요한 상황에서 마음만 읽어주고 그치게 되면 아이는 ‘내 마음이 이러니깐 이렇게 행동해도 돼’라고 합리화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나에게만 집중할 때 자아는 비대해지고 저울은 망가진다. 나와 타인, 나와 사회, 나와 도덕 사이에 망가진 저울은 항상 한쪽으로만 기울어진다.
자아 비대와 권리 중독이 만나
매사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은 바로 ‘권리’라는 단어이다. 나도 권리 투쟁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숙제였던 헌법 필사는 나에게 권리라는 개념을 깨우쳐준 중요한 계기였다. 고문일 줄 알았던 필사 숙제는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중 가장 오랜 여운을 남긴 질문은 ‘학생도 대한민국 국민인데 우리는 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까?’였다. 그리고 경기도 학생들이 모여 ‘학생인권조례’를 추진했을 때 나 역시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참여했다. 그때만 해도 학교 안에서 교사의 강력한 권위가 살아 있던 때였다.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체벌이란 이름의 폭력과 머리띠 하나도 내 마음대로 착용할 수 없었던 이해할 수 없는 통제 등에서 자유로워지고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사수하겠다는 강력한 사명감이 있었다.
그 후 10여 년이 흐른 지금, 그토록 강력하고 전제적이던 교사들의 권위가 이토록 추락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 변화를 주도했던 당찬 90년대생 중 교사가 된 이들은 교권이 추락한 교육 현장에서 이 역풍을 그대로 맞고 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걸까? 인권이란 건 시소와 같아서 학생의 인권이 신장하면 교사의 가르칠 권리는 추락하는 구조였던 걸까? 학교라는 공간에서 모두 정당한 권리를 누리며 공생하는 것은 그저 유토피아적 발상이었던 것일까?
나는 이 현상이 학생 인권과 교권의 대립이 아니라 ‘권리에 중독된 사람들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권리 신장 속도는 경제성장 속도와 마찬가지로 매우 빨랐다. 200여 년 전 권리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던 서구사회와 불과 몇십 년 전부터 권리를 이해하기 시작한 지금 대한민국의 권리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빠른 경제성장이 다양한 사회문제를 초래하듯, 빠른 권리의식 성장도 속도를 이기지 못해 다양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과 관련된 많은 일을 ‘권리’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소비자는 “내 돈 냈으니깐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어”라고 말하고, 자영업자는 “내 가게니까 내 마음대로 운영할 권리가 있어”라며 노(NO) 키즈, 노 학생, 노 노인, 심지어 노 슬리퍼, 노 운동복까지 선언하며 자기 기준에서 영업을 방해하지 않을 이들만 손님으로 받으려 한다. 공무원에 대한 인식은 더 이상 ‘나랏일 하는 사람’이 아닌 ‘내 세금으로 월급 받는 사람’으로 굳어졌다. ‘공무원’이 아니라 ‘공노비’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초등학생들이 담임 선생님에게 “우리 부모님이 낸 세금으로 월급 받잖아요” 말하는 것도 어른들의 이런 인식이 그대로 전해진 결과일 것이다.
자아가 비대해진 현실과 더불어 사람들은 ‘권리’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세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 저마다 그럴 ‘권리’가 있다면서 자유롭고 행복할 권리가 있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 기분 상해죄’를 저지른 사람은 철저히 단죄해야 한다. 배달 음식을 시킬 때 서비스 요청을 마치 당연한 것을 요구하듯 써두고 서비스가 오지 않으면 ‘별점 테러’로 응징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행태로 피해를 본 자영업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권리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을 의미한다. 나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서비스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감정과 권리를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사라지고 권리 요구에만 중독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내 권리 지키기, 타인의 권리를 지켜주기
얼마 전 누군가에게 “내가 낸 세금이 무상급식에 쓰이는 게 아깝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 마음이 답답했다. 아이가 없는 입장에서 무상급식이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직접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정책에 세금이 쓰인다는 게 억울할 수도 있다. 국민으로서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 의견을 가질 권리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의 혜택을 입으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의료 시스템의 보호를 받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 국가가 고용한 선생님들로부터 무상 의무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도서관과 공원을 이용하고, 경찰과 소방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사회가 공동으로 지탱하는 시스템 덕분이다. 오늘 내가 낸 세금이 남을 위해 쓰인다고 해서 억울해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도 그 혜택을 받아왔고, 미래에는 또 다른 형태로 그 혜택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권리는 개인이 보장받아야 할 소중한 가치이지만, 그것이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 될 때 위험해진다. ‘돈 냈으니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 혹은 ‘내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무원이니까 다 맞춰줘야 한다’는 식으로 권리라는 개념이 ‘나의 기분을 지켜줄 의무’로 둔갑하며 사회적 관계는 점점 더 삭막해지고 있다.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즉각적인 해소과 감정적 보상을 요구하는 태도, 개인의 감정적 불편함을 ‘권리 침해’로 확대 해석하는 태도가 만연해지면, 결국 모두가 불편한 사회가 된다.
유명한 예능 PD가 유튜브에서 가볍게 던진 한마디가 이러한 점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요즘 유행하는 ‘탕수육 부먹, 찍먹’ 논쟁에 대해 그는 반문했다. “그런 게 뭐가 그리 중요한지 모르겠다. 누가 소스를 부으면 부먹으로 먹고 아니면 찍먹으로 먹으면 되지. 그게 그렇게 어렵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여러 사람이 함께 탕수육을 먹을 때, 누군가 말도 없이 소스를 부어버린다면 불편한 감정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불편함을 해소하겠다고 이 문제에 권리 의식을 대입한다면 ‘부먹파와 찍먹파의 대립’, ‘찍먹파의 보이콧 선언’ 그리고 어쩌면 ‘관계의 단절’이라는 파국적인 결말에 이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잃는 것이 더 많은 선택이다.
권리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끝없는 요구가 아니라 균형 감각인 것 같다. 불편함을 무조건 참아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줄 아는 태도, 사회 전체의 균형을 고민하는 자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_하나라(13년 차 아동 분야 종사자이자 다음 세대에게 조금 더 건강한 사회를 물려주고 싶은 사회인이다.)
현대인들의 자아 비대
불편함은 한 인간의 생존뿐 아니라 사회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석기에서 청동기, 다시 철기로의 발전은 모두 기존의 도구에 대한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도구를 개발한 데서 시작되었다. 작은 주먹도끼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부서져 버리는 돌의 강도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인류는 새로운 도구, 새로운 물질을 찾아 헤매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테고 그대로 정체되었을 것이다.
민주주의 발전 역시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불편함에서 시작되었다. 봉건제라는 사회제도, 착취적인 경제구조, 차별적인 대우에 불편함을 표현한 이들에 의해 인류는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제도와 문화를 만들 수 있었다. 최근 코미디 프로에서 재현된 1990년대 직장 생활에는 담배 연기 자욱한 사무실, 노골적인 성차별과 성희롱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 그려졌다. 이런 모습이 30여 년 만에 자취를 감춘 것도, 윗세대의 관습에 불편함을 느낀 후세대들이 문제점을 하나씩 바꾸어나간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할 때, 이는 개인과 사회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최근 ‘프로 불편러’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불편을 토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시끄러우니까 출동할 때 소방차 사이렌을 끄라고 민원을 넣는 시민, 경비원이 경비실에서 계속 에어컨을 트는 게 불편하다는 아파트 주민, 자녀의 담임교사가 SNS를 하는 게 못마땅하다는 학부모 등 불편함의 사유는 점점 사소해지고, 수위는 점점 높아져가는 듯하다.
사람들은 흔히 자아존중감이 낮은 사람들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인지 왜곡을 많이 겪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커져버린 자아를 가진 사람 또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 ‘스스로에 대한 판단이 지나치게 높은’ 자아 비대 상태의 사람은 낮은 자아존중감을 지닌 사람과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자신을 가장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에 어딜 가나 최고의 대접을 받기를 원하고, 그 기대보다 조금이라도 낮은 대우를 받았을 때 크게 분노한다. 자아존중감이 낮은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에 비해, 비대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분노의 방향이 타인에게로 향한다. 비대한 자아가 더 파괴적인 이유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때론 우리 사회가 자아를 지나치게 부풀리도록 부추긴다는 생각이 든다. 베스트셀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바로 ‘나’다. ‘나를 사랑하자’, ‘내가 진정 원하는 것’ 등등 ‘나’에 대한 다양한 메시지는 삭막한 세상에서 위로가 되지만 가끔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에 집중된 메시지들이 자칫 지나친 자기중심성을 부추기고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는 것 같아서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동심리 분야 교수가 부모의 잘못된 ‘마음 읽어주기’ 양육이 아이들을 망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훈육이 필요한 상황에서 마음만 읽어주고 그치게 되면 아이는 ‘내 마음이 이러니깐 이렇게 행동해도 돼’라고 합리화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나에게만 집중할 때 자아는 비대해지고 저울은 망가진다. 나와 타인, 나와 사회, 나와 도덕 사이에 망가진 저울은 항상 한쪽으로만 기울어진다.
자아 비대와 권리 중독이 만나
매사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은 바로 ‘권리’라는 단어이다. 나도 권리 투쟁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숙제였던 헌법 필사는 나에게 권리라는 개념을 깨우쳐준 중요한 계기였다. 고문일 줄 알았던 필사 숙제는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중 가장 오랜 여운을 남긴 질문은 ‘학생도 대한민국 국민인데 우리는 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까?’였다. 그리고 경기도 학생들이 모여 ‘학생인권조례’를 추진했을 때 나 역시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참여했다. 그때만 해도 학교 안에서 교사의 강력한 권위가 살아 있던 때였다.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체벌이란 이름의 폭력과 머리띠 하나도 내 마음대로 착용할 수 없었던 이해할 수 없는 통제 등에서 자유로워지고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사수하겠다는 강력한 사명감이 있었다.
그 후 10여 년이 흐른 지금, 그토록 강력하고 전제적이던 교사들의 권위가 이토록 추락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 변화를 주도했던 당찬 90년대생 중 교사가 된 이들은 교권이 추락한 교육 현장에서 이 역풍을 그대로 맞고 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걸까? 인권이란 건 시소와 같아서 학생의 인권이 신장하면 교사의 가르칠 권리는 추락하는 구조였던 걸까? 학교라는 공간에서 모두 정당한 권리를 누리며 공생하는 것은 그저 유토피아적 발상이었던 것일까?
나는 이 현상이 학생 인권과 교권의 대립이 아니라 ‘권리에 중독된 사람들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권리 신장 속도는 경제성장 속도와 마찬가지로 매우 빨랐다. 200여 년 전 권리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던 서구사회와 불과 몇십 년 전부터 권리를 이해하기 시작한 지금 대한민국의 권리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빠른 경제성장이 다양한 사회문제를 초래하듯, 빠른 권리의식 성장도 속도를 이기지 못해 다양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과 관련된 많은 일을 ‘권리’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소비자는 “내 돈 냈으니깐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어”라고 말하고, 자영업자는 “내 가게니까 내 마음대로 운영할 권리가 있어”라며 노(NO) 키즈, 노 학생, 노 노인, 심지어 노 슬리퍼, 노 운동복까지 선언하며 자기 기준에서 영업을 방해하지 않을 이들만 손님으로 받으려 한다. 공무원에 대한 인식은 더 이상 ‘나랏일 하는 사람’이 아닌 ‘내 세금으로 월급 받는 사람’으로 굳어졌다. ‘공무원’이 아니라 ‘공노비’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초등학생들이 담임 선생님에게 “우리 부모님이 낸 세금으로 월급 받잖아요” 말하는 것도 어른들의 이런 인식이 그대로 전해진 결과일 것이다.
자아가 비대해진 현실과 더불어 사람들은 ‘권리’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세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 저마다 그럴 ‘권리’가 있다면서 자유롭고 행복할 권리가 있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 기분 상해죄’를 저지른 사람은 철저히 단죄해야 한다. 배달 음식을 시킬 때 서비스 요청을 마치 당연한 것을 요구하듯 써두고 서비스가 오지 않으면 ‘별점 테러’로 응징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행태로 피해를 본 자영업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권리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을 의미한다. 나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서비스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감정과 권리를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사라지고 권리 요구에만 중독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내 권리 지키기, 타인의 권리를 지켜주기
얼마 전 누군가에게 “내가 낸 세금이 무상급식에 쓰이는 게 아깝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 마음이 답답했다. 아이가 없는 입장에서 무상급식이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직접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정책에 세금이 쓰인다는 게 억울할 수도 있다. 국민으로서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 의견을 가질 권리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의 혜택을 입으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의료 시스템의 보호를 받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 국가가 고용한 선생님들로부터 무상 의무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도서관과 공원을 이용하고, 경찰과 소방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사회가 공동으로 지탱하는 시스템 덕분이다. 오늘 내가 낸 세금이 남을 위해 쓰인다고 해서 억울해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도 그 혜택을 받아왔고, 미래에는 또 다른 형태로 그 혜택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권리는 개인이 보장받아야 할 소중한 가치이지만, 그것이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 될 때 위험해진다. ‘돈 냈으니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 혹은 ‘내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무원이니까 다 맞춰줘야 한다’는 식으로 권리라는 개념이 ‘나의 기분을 지켜줄 의무’로 둔갑하며 사회적 관계는 점점 더 삭막해지고 있다.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즉각적인 해소과 감정적 보상을 요구하는 태도, 개인의 감정적 불편함을 ‘권리 침해’로 확대 해석하는 태도가 만연해지면, 결국 모두가 불편한 사회가 된다.
유명한 예능 PD가 유튜브에서 가볍게 던진 한마디가 이러한 점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요즘 유행하는 ‘탕수육 부먹, 찍먹’ 논쟁에 대해 그는 반문했다. “그런 게 뭐가 그리 중요한지 모르겠다. 누가 소스를 부으면 부먹으로 먹고 아니면 찍먹으로 먹으면 되지. 그게 그렇게 어렵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여러 사람이 함께 탕수육을 먹을 때, 누군가 말도 없이 소스를 부어버린다면 불편한 감정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불편함을 해소하겠다고 이 문제에 권리 의식을 대입한다면 ‘부먹파와 찍먹파의 대립’, ‘찍먹파의 보이콧 선언’ 그리고 어쩌면 ‘관계의 단절’이라는 파국적인 결말에 이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잃는 것이 더 많은 선택이다.
권리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끝없는 요구가 아니라 균형 감각인 것 같다. 불편함을 무조건 참아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줄 아는 태도, 사회 전체의 균형을 고민하는 자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_하나라(13년 차 아동 분야 종사자이자 다음 세대에게 조금 더 건강한 사회를 물려주고 싶은 사회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