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16] 영유아의 모든 앎은 몸을 거친다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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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런던에 갔을 때다. 런던브리지 앞을 걷다가 유아차 안의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고, 화면에서 유튜브가 재생되고 있었다.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강바람이 뺨을 스치는데, 아이는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새가 발치에 내려앉아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엄마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둘 다 그 자리에 있었지만, 누구도 그 풍경 안에 있지는 않았다. 순간, 서울에서 본 장면이 겹쳐 떠올랐다. 카페에서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기의자에 앉은 두 살 아이가 손가락으로 쇼츠를 넘기고 있었다. 무표정하게. 이건 한국만의 풍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지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피아제가 제시한 인지발달의 네 단계 중 영유아기는 감각운동기(0~2세)와 전조작기(2~7세)에 해당한다. 이 두 단계가 공유하는 것이 있다. 세계를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몸으로 먼저 만나는 것이다. 생후 24개월까지 아이에게 세계는 개념이 아니라 사건이다. 빨고, 쥐고, 놓고, 두드리고, 입에 넣고, 떨어뜨리고, 다시 집어든다. 이 반복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를 인식하는 대상영속성이 생기고, 인과성이 생기고, 자기와 타자의 구분이 생긴다.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엄마가 주워주면 다시 떨어뜨리는 것을 반복하며 아이는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이 떨어진다는 것과 사라진 것이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배우고, 자기 행동이 세상에 닿는 자각을 얻는다. 피아제가 본 것은 인간 지능의 가장 밑돌이 놓이는 과정이었다.

아기들에게는 감각이 없으면 배움이 없다. 만지지 않으면 세계가 없다. 빨아보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영유아의 앎은 혀와 손끝과 발바닥에서 시작된다. 딱딱한 나무와 부드러운 헝겊의 차이는 손으로 쥐어봐야 안다. 뜨거움과 차가움은 설명으로 학습되지 않는다. 엄마 품이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은 안겨서 반복적으로 체험되어야 비로소 몸에 새겨진다. 영유아의 모든 앎은 예외 없이 몸을 거친다.

만 두 살을 지나 일곱 살까지의 전조작기 아이는 한 단계를 더 밟는다.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로 전용할 줄 알게 된다. 막대기는 칼이 되고 나뭇잎은 그릇이 된다. 상징놀이가 시작되는 시기다. 소꿉놀이를 하며 역할을 나누고 가상의 시나리오를 함께 짜면서, 아이는 언어를 배우고 사회적 규칙을 배우고 타인의 관점을 배우고 협상하는 법을 배운다. 이 시기의 사고는 아직 논리적이지 않다. 그래서 ‘전前조작’이다. 대신 아이의 머릿속에는 풍부한 상징과 직관과 상상력이 가득하다.

이 단계도 여전히 몸, 그리고 관계 위에 있다. 모래밭에서 친구와 밥 짓는 시늉을 하려면 모래의 까슬함을, 손으로 빚는 감각을, 친구의 표정과 말의 리듬을 함께 ‘겪어야’ 한다. 그림을 그리려면 크레용이나 붓이 종이에 닿는 느낌, 색이 번져가는 우연, 자기 손의 떨림을 직접 느껴야 한다. 전조작기의 상상력은 감각과 관계의 두께 위에 피어나는 꽃이다.

신경과학과 체화된 인지 연구도 같은 곳에 닿았다. 잭 숀코프와 데버러 필립스가 엮은 책 『뉴런에서 이웃으로From Neurons to Neighborhoods』는 만 다섯 살 이전에 뇌 구조 발달의 많은 부분이 완성되며, 정서가 동반된 반복적 실제 경험이 시냅스 연결을 만든다고 정리한다. 핵심은 자극이 아니라 참여다. 화면에서 쏟아지는 색과 소리 같은 자극은 아이의 몸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직접 손을 뻗고, 혀로 재질을 확인하고, 몸으로 실패하고, 엄마의 표정을 읽으며 다시 시도하는 그 과정이 곧 배움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스크린은 바로 이 두 단계, 가장 취약한 시기의 아이에게서 몸과 관계의 자리를 가장 먼저 빼앗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매끈한 유리 스크린이 들어선다. 유리는 빛난다. 그러나 맛도 냄새도 무게도 온도도 없다. 스마트폰 앞의 아이는 무엇인가를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겪지 않는다. 프리슈가 70년 전에 쓴 그대로다. 

스위스의 작가 막스 프리슈는 1957년 소설 『호모 파버』에서 이렇게 적었다. “기술이란 세계를 잘 정돈해둬서, 우리가 그것을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드는 재주다.” 당시 그가 말한 기술은 비행기와 자동차였다. 지금 우리에게 그것은 스마트폰이고, 알고리즘이고, 곧 휴머노이드가 될 것이다. 점점 매끄러워진 기술은 굳이 몸으로 겪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 삶을 재구성한다.

프리슈가 『호모 파버』를 통해 던진 경고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돌아오는 질문이다. 세계를 너무 잘 정돈해둔 나머지 더는 그것을 경험할 필요가 없게 된 시대에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일 수 있는가. 호모 파버의 후예인 우리가 지금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있는 것은 잘 정돈된 화면 너머의 세계, 직접 겪지 않아도 되는 세계, 그래서 사실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세계다.


이미 알려진 사실들


화면은 단순히 아이의 시간만 가져가는 게 아니다. 어른의 목소리와 주고받음의 리듬까지 가져간다. 영유아의 언어와 관계는 주고받음의 횟수에 비례해 자라는데, 그 주고받음이 화면 앞에서 멈추는 것이다. 

캐나다 캘거리대학의 매디건 연구팀은 2,441쌍의 엄마와 자녀를 추적했다. 24개월 때의 스크린 노출이 36개월의 발달검사 점수 저하와, 36개월 때의 노출이 60개월의 발달 저하와 유의하게 연결되었다. 반대 방향, 그러니까 발달이 지연된 아이가 더 많이 스크린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통계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스크린이 먼저였고 발달 지연이 뒤따랐다. 일본 도호쿠대학의 연구에서는 생후 12개월의 스크린 노출이 두 살, 네 살 영유아의 의사소통과 문제해결 지연으로 이어졌다. 하루 네 시간 이상 스크린에 노출된 아이는 한 시간 미만인 아이에 비해 두 살 시점에 의사소통 지연 위험이 약 4.78배 높았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호주의 텔레톤어린이연구소 연구팀의 결과다. 16시간 연속 음성녹음 장치로 220 가정의 12~36개월 아이와 부모의 실제 대화량을 측정했더니, 스크린 노출이 많을수록 아이가 듣는 어른 단어의 수, 아이의 발성, 부모와의 대화 순환 횟수가 줄었다. 36개월 시점에서는 스크린 노출이 1분 늘어나는 만큼 어른 단어 약 6.6개, 아이 발성 4.9개, 대화 순환 1.1회가 사라졌다. 하루 평균 2시간 52분 동안 스크린을 접한 세 살 아이는 그 때문에 하루에 어른 단어 1,139개, 옹알이 843번, 주고받는 대화 194번을 놓치고 있었다.

세계보건기구는 만 한 살 미만의 영아는 스크린을 보지 말 것을, 두 살에서 네 살까지의 유아는 하루 한 시간을 넘기지 말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3 어린이 미디어 이용 조사’를 보면, 한국 만 3~4세 아이의 하루 평균 미디어 이용 시간은 184.4분, 약 3시간으로 권고치의 세 배다. 스마트폰을 처음 접한 연령이 세 살 미만인 경우가 44%, 생후 24개월 이전에 텔레비전을 본 비율이 57.7%에 달한다. 만 3~4세 아이의 42.4%는 이미 유튜브 쇼츠나 틱톡, 인스타그램 릴스 같은 숏폼 콘텐츠를 본다. 60초짜리 짧은 영상이 60개월도 안 된 아이의 집중과 이완이 반복되는 주의 리듬을 먼저 만든다.

이 숫자가 던지는 질문은 ‘세 시간 동안 아이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 무엇인가’이다. 엄마 품에서 눈을 맞추는 일, 아빠의 목소리를 따라 옹알이로 응답하는 일, 베란다 창을 두드리며 햇살의 온도를 감각하는 일, 마당에서 개미 행렬을 들여다보는 일, 친구와 장난감을 두고 다투며 사회적 규칙을 몸으로 익히는 일. 영유아의 뇌가 기다려왔던 그 배움들이 매일 세 시간씩, 조용히 비워진다.


기계는 몸을 얻고, 아이는 몸을 잃는다


이 지점에서 묘한 풍경 하나가 보인다. 인공지능 산업 자체가 지금 ‘몸’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2025년 1월 라스베이거스의 IT 전시회에서 엔비디아 CEO인 젠슨 황은 인공지능의 다음 단계를 ‘피지컬 AI’로 못 박았다. 텍스트만 다루던 AI가 로봇과 자율주행차와 휴머노이드의 몸을 입고, 현실의 물리 법칙 안에서 움직이는 지능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엔비디아가 현실 세계를 시뮬레이션하는 ‘코스모스Cosmos 플랫폼’을 내놓은 것도, 글로벌 자동차와 로봇 기업들이 휴머노이드 사업으로 몰려가는 것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왜 지금 AI가 이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언어만으로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고리의 재질과 그것을 잡는 힘, 물체의 무게와 바닥의 마찰, 계단의 높이와 신발 밑창의 접촉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수천억 개의 텍스트로 훈련된 거대언어모델조차, 물 한 잔을 쏟지 않고 건네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70년 전 피아제가 영유아를 들여다보며 도달한 결론과 같은 자리다. 지능은 몸을 거쳐 만들어진다. 기계조차 이제 그것을 배우려 한다.

여기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인공지능이 몸을 갖게 하는 데 수십조 원을 쏟아붓는 이때 우리 아이들은 몸으로 세계를 겪을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기계가 시뮬레이션 공간에서 수만 번 넘어졌다 일어나며 감각운동기를 모방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이 그 감각운동기를 건너뛰고 있다. 기계는 몸을 갖는데, 인간은 몸을 버린다. 이 시대의 뒤집힌 풍경이다.

피지컬 AI 시대를 살아갈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화면 속 AI와 친해지는 법이 아니다. 몸으로 세계를 겪어내는 능력, 감각과 운동과 판단이 한 덩어리로 통합된 지능이다. 기계가 가장 따라 하기 어려워하는 능력이고, 영유아기에만 그 토대가 놓이는 능력이다. AI와 함께 사는 시대에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함이 있다면, 정보를 더 빨리 처리하는 능력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낸 감각의 두께일 것이다. 그 두께는 0세부터 쌓아야 만들어진다.

또한, 영유아기에 스크린과 AI에 노출되는 정도는 가정의 경제적・문화적 자본과 반비례한다. 부모가 시간적 여유가 있는 가정일수록 아이가 미디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짧고, 돌봄 자원이 부족한 가정일수록 더 일찍부터 더 오래 노출된다. 맞벌이 부모가 야근하는 사이에, 아이를 돌보던 조부모가 지친 저녁에, 한부모 가정의 분주한 아침에 스마트폰은 가장 값싸고 즉각적인 돌봄 대체재가 된다. 여기에 어린이집과 유치원, 공공과 민간,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기관별 격차가 포개진다. 어떤 아이는 매일 숲에서 흙을 만지고 놀고, 어떤 아이는 좁은 교실에서 태블릿으로 영어 동요를 듣는다.

경험의 격차는 소득 격차보다 먼저, 영유아기에 이미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하루에 스크린을 몇 시간 봤는지, 숲에서 몇 번 넘어졌는지, 엄마 얼굴을 몇 번 올려다 보았는지, 그런 것들은 통계로 잡히지 않는다. 그 보이지 않는 격차가 쌓여 초등학교 입학 무렵 언어와 사회성, 자기조절 능력의 격차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교육부가 추진하는 유보통합이 단순한 기관 일원화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모든 아이에게 감각과 관계의 경험을 동등하게 보장하는 장치로 다시 짜여야 한다. 제도의 이름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제도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경험의 질을 보장하는 일이 유보통합의 핵심이다.


영유아 교육이 지켜야 할 것


피지컬 AI 시대에 영유아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AI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AI가 아직 갖지 못한 감각의 경험을 길러주는 일. 그것이 지금 영유아 교육의 방향이어야 한다.

우선, 영유아 기관의 일과부터 다시 짜야 한다. 하루 일과 가운데 일정 시간 이상은 스크린이 개입하지 않는 놀이와 바깥 활동, 촉각 탐색의 시간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흙과 물, 모래와 나무 같은 자연물과의 접촉 시간이 최소 기준으로 명시되어야 한다. 지금은 많은 것이 교사 개인의 판단에 맡겨져 있어서 같은 유보통합 체제 안에서도 현장에 따라 아이들의 감각 경험 편차가 너무 크다.

0세부터 5세까지 스크린과 AI 노출에 관한 국가 가이드라인도 시급하다. 교육부와 복지부가 초·중등 AI 디지털교과서 논의는 활발하게 이어가면서도 0~5세에 대한 공적 지침은 사실상 비워두고 있다. WHO 권고를 기초로 한 한국형 가이드라인이 나와야 하고, (대화형 AI 인형, 학습용 태블릿 같은) 영유아용 AI 제품에 대한 사전영향평가 제도도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영국의 연령 맞춤 설계 규약Age Appropriate Design Code, EU의 「디지털서비스법」에서 참고할 점이 많다. 영국의 규약은 18세 미만 아동이 이용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온라인 서비스가 아동의 최선의 이익을 기본 설계 원칙으로 삼도록 의무화하고, EU의 디지털서비스법은 미성년자에게 맞춤형 광고를 금지하며 알고리즘 노출에 대한 투명성과 위험 평가를 사업자에게 요구한다. 두 제도 모두 ‘아동을 시장의 사용자가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권리주체로 본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모든 노력들도 부모의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 빠지면 다 공허하다. 육아휴직과 근로시간 단축, 공공돌봄이 부족한 사회에서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말라”는 말은 부모에게 죄책감만 안긴다. 아이의 감각경험은 어른의 여유에서 흘러나온다. 돌봄의 시간이 곧 감각의 시간이다. 어른의 노동시간을 줄이지 않고서 아이의 스크린 시간을 줄일 수는 없다.

영유아 교사 양성과 현직 연수도 손봐야 한다. 영유아의 체화된 인지와 디지털 과노출에 대한 발달학적 이해가 정규 과목에 들어가야 한다. 교사가 배워야 할 것은 디지털 도구를 잘 쓰는 방법만이 아니다. 아이의 몸과 감각을 지키는 방법이 먼저다. 요즘 영유아 교사 양성 과정에 AI 리터러시와 디지털 교수법이 빠르게 추가되고 있는데, 정작 디지털 이전의 감각경험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훈련은 그만큼 따라가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교육과정 자체를 다시 봐야 한다. 누리과정과 표준보육과정에 감각과 운동 경험이 핵심 요소로 재배치되어야 한다. 자연체험과 몸놀이, 촉각탐색의 비중이 국가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숲과 자연을 가까이하는 북유럽의 야외 보육,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아이들의 배움을 돕는 이탈리아의 레지오 에밀리아 교육은 오래전부터 ‘감각’을 교육과정의 변두리가 아니라 한가운데 두는 방식을 택해왔다. 우리에게도 그 길은 열려 있다.


많은 것을 잃어도 슬퍼하지 않게 된 인간


생태학자 로버트 마이클 파일은 일찍이 ‘경험의 멸종’이란 표현을 썼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굴뚝새를 보지 못한 아이에게 콘도르(초대형 독수리)의 멸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연이 사라지는 것보다, 아이들이 자연을 겪어본 적 없는 인간으로 자라는 것이 더 두렵다는 말이었다. 많은 것을 잃어도 슬퍼하지 않게 된 인간 말이다. 반세기 뒤, 문화비평가 크리스틴 로젠이 같은 표현으로 책을 썼다. 파일이 흙과 바람을 잃은 인간을 걱정했다면, 로젠은 『경험의 멸종』이란 책에서 스크린 안에 갇혀 얼굴을, 손글씨를, 길 잃는 당혹감을, 기다림을 잃은 인간을 걱정한다.

피지컬 AI가 몸을 얻어가는 시대에, 우리 아이들은 몸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계가 세계를 감각하는 법을 배우는 동안 아이가 세계를 감각하는 법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경험의 멸종’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가장 빠른 디지털기기를 쥐여주는 일이 시대를 준비시키는 일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정작 피지컬 AI 시대가 묻는 것은 정반대다. 당신의 아이는 몸으로 세계를 겪어본 적이 있는가?

2년 전 런던브리지 앞에서 만난 그 아이가 고개를 들어 강바람을 느끼고 새소리를 듣고 엄마의 눈을 한 번이라도 더 올려다볼 수 있기를, 아이의 작은 손이 화면 대신 누군가의 손을 먼저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입으로 가져가고, 손으로 두들기고, 발로 딛어보는 그 서툰 배움의 자리가 부디 사라지지 않기를. 오늘날 영유아들에게 감각은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인공지능 시대, 그것이 영유아 교육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_박창현(육아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이자 교육부 정책자문위원회의 국가책임 교육·돌봄 분과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