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 출판인의 '셀프 디스'
신문과 방송이라는 매체는 그 특성상 사회를 타자화한다. 보도가 본질적인 기능이기에 그럴 것이다. 때문에 성찰과 자각에서 비롯되는 자기고백은 신문이나 방송 매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에 비해 출판은 저자 개인의 고민과 성찰을 전할 수 있는 통로다. 더욱이 교육매체는 ‘보도’가 아닌 ‘고백’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을 말하는 글에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죽은 글이 아닐까. 교육학 서가를 채우고 있는 숱한 전문서들이 쏟아내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교보문고 교육 분야 서가의 책들은 이삼십 년 전과 느낌이 그리 다르지 않다. 서점 인테리어가 세련될수록 교육 분야 책들은 더 후져 보인다. 교재가 많아서거나 디자인이 후진 때문만은 아니다. 내용이 부실한 책들도 적지 않다. 번역투 문장이거나 기본적인 교정교열도 안 된 책들이 부지기수다. 책을 대충 만들어도 팔리기 때문일까. 디자인에 투자하지 않는 것은 민들레출판사도 마찬가지이니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교육 분야 책이라면 교정교열만큼은 제대로 봐야 하지 않을까. 번역도 전문 번역가가 아닌 교수 또는 대학원생들이 해서인지 비문과 번역투 문장이 수두룩하다.
교육 분야 책이 후진 것과 교육이 후진 것은 닭과 달걀의 관계 같은 것일까. 근본적으로는 교육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20세기 이후 김교신, 함석헌을 잇는 교육사상가가 눈에 띄지 않는다. 서구의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다. 존 듀이 이후 그를 넘어서는 교육사상가가 등장하지 않았으니, 아직도 교육계는 듀이 사상을 우려먹고 있는 중이다. 듀이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되면서 2024년부터 듀이 저서들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번역이 조금 나아진 건 다행이지만 백 년 전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교육 이론을 21세기 한국에서 곱씹어야 하는 상황은 적이 당황스러운 일이다.(최근 한나 아렌트의 교육 사상을 소개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반가운 변화다.)
‘해보면서 배운다’는 존 듀이의 경험주의 교육철학이나 그를 잇는 진보주의 교육은 ‘삶이 곧 교육’이라는 교육관을 갖고 있다. 삶과 교육을 등치시키게 되면 사실상 인간사에서 교육 아닌 것이 없게 되고, 역설적으로 교육이 과연 무엇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경험주의에 기반한 교육관은 지식의 가치를 폄하하고 교육을 개인의 일로 여기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교육보다 배움을 강조하는 교육 문화, 학생 중심 또는 수요자 중심 교육 이론이 거기에 기름을 붓는다. 오늘날 개별화 교육이 강조되고 있지만, 보편교육을 추구하는 공교육은 개인을 위한 것이기 전에 사회를 위한 것이다.
표준화에 근거한 근대 학교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진보적 교육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교육을 추구한다. 이른바 학습자 중심의 맞춤식 교육이다. 하지만 이런 개별화 교육은 방법론이어야 하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보편성을 지향하면서 개별성을 배려해야 한다. 반대로 개인의 특성을 배려하고 살리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고 그것을 보편적인 교육과정으로 달성하려 드는 것은 마차를 말 앞에 매다는 격이다. 오늘날 혁신교육이 자칫 그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출판을 통한 교육운동을 지향해온 출판사로서 깊이 있는 교육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
공부가 우리에게 주는 것
2천년대 들어 교육계가 아닌 곳에서 주목할 만한 교육 담론이 나오고 새로운 교육 실험이 시도되었다.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교수는 ‘또하나의 문화’ 단체를 통해 다양한 사회 담론을 생산해냈을 뿐만 아니라 ‘하자센터’라는 청소년 교육기관을 설립해 교육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한 선생은 민들레의 오랜 독자이자 필자로서 교육운동의 방향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해외 필자들 중 우리 교육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이들이 있다. 미국의 알바니 프리스쿨 교사였던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와 일본의 키노쿠니학교 호리 교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자유와 교육이 만났다, 배움이 커졌다』 같은 책을 통해 많은 교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일본의 불문학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문학, 철학, 정치, 교육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백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통찰력이 번득이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우치다 선생의 책이 지난 10년 동안 40권 가까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것은 그의 사상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민들레에서 낸 책도 『교사를 춤추게 하라』, 『스승은 있다』를 비롯해 6권에 이른다. 우치다가 이야기하는 사회 현상이 일본에서는 정점을 지났다면 한국에서는 이제 막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우리에게 타산지석의 시사점을 던져주는 듯하다.
민들레에서 펴낸 우치다의 저서 중 가장 주목받은 책은 『하류지향』이다.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공부와 일에서 달아나고 있는 일본의 신세대들에게 주목한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개성을 강조하는 교육’의 이면을 들춰보게 하고, ‘자기 찾기’라는 이데올로기 속에 숨어 있는 함정을 들여다보게 하는 이 책은 국가주의, 집단주의 교육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 진보 교육이 개인을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일깨운다.
근대 국가주의에 반기를 들며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다양한 대안운동이 싹텄다. 대안교육운동도 그 지류로 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표준화와 획일화를 혼동하고 교육과 배움을 이원화하는 오류를 범했다. 나의 과오가 모두의 과오는 아니겠지만, 탈근대의 흐름 속에서 한 시대의 언어에 많은 이들이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다양성을 예찬하면서 보편성을 간과하기도 하고, 국가주도 교육을 비판하면서 국가수준의 교육에 대한 고민을 방기하기도 했다.
뒤늦게 공부를 다시 하면서 좀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더 좋은 책을 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몇 해 전부터 부모와 교사들이 함께 공부하기에 좋은 글들을 엮어 <민들레 선집>을 시리즈로 펴내고 있는데, 앞으로 공부에 도움되는 책을 엄선해 단행본을 꾸준히 출간할 계획이다. 지난날에는 출판을 교육운동의 수단으로 여겼다면 이제 출판에 조금 더 진심이 되었다.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공부에 늦은 나이란 없다고 믿는다.
공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걸음을 내딛는 일이다. 단순히 지식의 총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이 바뀌고 혼동했던 개념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 현상 너머의 세계를 엿보게 되면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보인다. 자신의 좌표에 매이지 않고 낯선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편집자들의 경우 독자 모드로 전환이 어려워 자칫 책과 멀어지기 쉽지만, 마음을 비우고 배우는 자세로 다가서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모드를 전환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공부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교육 출판인의 '셀프 디스'
신문과 방송이라는 매체는 그 특성상 사회를 타자화한다. 보도가 본질적인 기능이기에 그럴 것이다. 때문에 성찰과 자각에서 비롯되는 자기고백은 신문이나 방송 매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에 비해 출판은 저자 개인의 고민과 성찰을 전할 수 있는 통로다. 더욱이 교육매체는 ‘보도’가 아닌 ‘고백’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을 말하는 글에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죽은 글이 아닐까. 교육학 서가를 채우고 있는 숱한 전문서들이 쏟아내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교보문고 교육 분야 서가의 책들은 이삼십 년 전과 느낌이 그리 다르지 않다. 서점 인테리어가 세련될수록 교육 분야 책들은 더 후져 보인다. 교재가 많아서거나 디자인이 후진 때문만은 아니다. 내용이 부실한 책들도 적지 않다. 번역투 문장이거나 기본적인 교정교열도 안 된 책들이 부지기수다. 책을 대충 만들어도 팔리기 때문일까. 디자인에 투자하지 않는 것은 민들레출판사도 마찬가지이니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교육 분야 책이라면 교정교열만큼은 제대로 봐야 하지 않을까. 번역도 전문 번역가가 아닌 교수 또는 대학원생들이 해서인지 비문과 번역투 문장이 수두룩하다.
교육 분야 책이 후진 것과 교육이 후진 것은 닭과 달걀의 관계 같은 것일까. 근본적으로는 교육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20세기 이후 김교신, 함석헌을 잇는 교육사상가가 눈에 띄지 않는다. 서구의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다. 존 듀이 이후 그를 넘어서는 교육사상가가 등장하지 않았으니, 아직도 교육계는 듀이 사상을 우려먹고 있는 중이다. 듀이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되면서 2024년부터 듀이 저서들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번역이 조금 나아진 건 다행이지만 백 년 전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교육 이론을 21세기 한국에서 곱씹어야 하는 상황은 적이 당황스러운 일이다.(최근 한나 아렌트의 교육 사상을 소개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반가운 변화다.)
‘해보면서 배운다’는 존 듀이의 경험주의 교육철학이나 그를 잇는 진보주의 교육은 ‘삶이 곧 교육’이라는 교육관을 갖고 있다. 삶과 교육을 등치시키게 되면 사실상 인간사에서 교육 아닌 것이 없게 되고, 역설적으로 교육이 과연 무엇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경험주의에 기반한 교육관은 지식의 가치를 폄하하고 교육을 개인의 일로 여기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교육보다 배움을 강조하는 교육 문화, 학생 중심 또는 수요자 중심 교육 이론이 거기에 기름을 붓는다. 오늘날 개별화 교육이 강조되고 있지만, 보편교육을 추구하는 공교육은 개인을 위한 것이기 전에 사회를 위한 것이다.
표준화에 근거한 근대 학교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진보적 교육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교육을 추구한다. 이른바 학습자 중심의 맞춤식 교육이다. 하지만 이런 개별화 교육은 방법론이어야 하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보편성을 지향하면서 개별성을 배려해야 한다. 반대로 개인의 특성을 배려하고 살리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고 그것을 보편적인 교육과정으로 달성하려 드는 것은 마차를 말 앞에 매다는 격이다. 오늘날 혁신교육이 자칫 그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출판을 통한 교육운동을 지향해온 출판사로서 깊이 있는 교육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
공부가 우리에게 주는 것
2천년대 들어 교육계가 아닌 곳에서 주목할 만한 교육 담론이 나오고 새로운 교육 실험이 시도되었다.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교수는 ‘또하나의 문화’ 단체를 통해 다양한 사회 담론을 생산해냈을 뿐만 아니라 ‘하자센터’라는 청소년 교육기관을 설립해 교육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한 선생은 민들레의 오랜 독자이자 필자로서 교육운동의 방향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해외 필자들 중 우리 교육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이들이 있다. 미국의 알바니 프리스쿨 교사였던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와 일본의 키노쿠니학교 호리 교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자유와 교육이 만났다, 배움이 커졌다』 같은 책을 통해 많은 교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일본의 불문학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문학, 철학, 정치, 교육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백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통찰력이 번득이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우치다 선생의 책이 지난 10년 동안 40권 가까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것은 그의 사상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민들레에서 낸 책도 『교사를 춤추게 하라』, 『스승은 있다』를 비롯해 6권에 이른다. 우치다가 이야기하는 사회 현상이 일본에서는 정점을 지났다면 한국에서는 이제 막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우리에게 타산지석의 시사점을 던져주는 듯하다.
민들레에서 펴낸 우치다의 저서 중 가장 주목받은 책은 『하류지향』이다.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공부와 일에서 달아나고 있는 일본의 신세대들에게 주목한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개성을 강조하는 교육’의 이면을 들춰보게 하고, ‘자기 찾기’라는 이데올로기 속에 숨어 있는 함정을 들여다보게 하는 이 책은 국가주의, 집단주의 교육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 진보 교육이 개인을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일깨운다.
근대 국가주의에 반기를 들며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다양한 대안운동이 싹텄다. 대안교육운동도 그 지류로 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표준화와 획일화를 혼동하고 교육과 배움을 이원화하는 오류를 범했다. 나의 과오가 모두의 과오는 아니겠지만, 탈근대의 흐름 속에서 한 시대의 언어에 많은 이들이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다양성을 예찬하면서 보편성을 간과하기도 하고, 국가주도 교육을 비판하면서 국가수준의 교육에 대한 고민을 방기하기도 했다.
뒤늦게 공부를 다시 하면서 좀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더 좋은 책을 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몇 해 전부터 부모와 교사들이 함께 공부하기에 좋은 글들을 엮어 <민들레 선집>을 시리즈로 펴내고 있는데, 앞으로 공부에 도움되는 책을 엄선해 단행본을 꾸준히 출간할 계획이다. 지난날에는 출판을 교육운동의 수단으로 여겼다면 이제 출판에 조금 더 진심이 되었다.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공부에 늦은 나이란 없다고 믿는다.
공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걸음을 내딛는 일이다. 단순히 지식의 총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이 바뀌고 혼동했던 개념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 현상 너머의 세계를 엿보게 되면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보인다. 자신의 좌표에 매이지 않고 낯선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편집자들의 경우 독자 모드로 전환이 어려워 자칫 책과 멀어지기 쉽지만, 마음을 비우고 배우는 자세로 다가서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모드를 전환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공부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