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 현장의 위기와 사회정서교육의 필요성
최근 학교에서 사회정서교육SEL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학생들의 마음건강 위기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사회적 고립과 학습 결손, 관계 단절, 디지털 매체에 대한 과도한 의존, 가정 내 갈등이 누적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학생들의 정서적 어려움도 한층 뚜렷해졌다. 이에 따라 학생의 정서 문제를 더 이상 가정이나 의료기관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인식이 커졌다. 학생이 긴 시간을 보내는 학교가 학생들의 마음건강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예방하며,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하는 생활 중심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199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사회정서교육은 학생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조절하도록 돕는 교육이다. 또한 타인의 관점과 감정을 헤아리고, 서로 지지하는 관계를 맺으며, 책임 있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목적이 있다. 당시 미국은 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와 학교폭력, 학업 중단, 약물 사용, 관계 갈등이 학교 안팎의 심각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후 인지 능력뿐 아니라 사회적·정서적 역량도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등장하며 사회정서교육은 세계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국제기구들도 이러한 흐름에 주목해왔다. OECD는 사회정서역량을 학생의 학습과 건강, 삶의 만족도, 시민적 참여는 물론 노동시장에서의 성과와도 연결되는 역량으로 보고 국제 조사와 비교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유네스코 역시 사회정서학습을 평화와 포용, 지속가능성, 세계시민교육과 연계하여 다루고 있다. 이렇듯 사회정서교육은 학생의 삶과 학습, 관계와 시민성을 함께 다루는 미래교육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교육부는 사회정서교육을 ‘사회정서 역량을 강화하는 학교 기반의 보편적 마음건강 교육’으로 규정하고 2025년 시범 도입을 거쳐 2026년부터는 모든 학교가 교육과정 전반에서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사회정서교육은 독립 교과로 운영되기보다 교과 수업과 창의적 체험활동, 상담, 생활지도, 인성교육과 학교문화 전반에 통합되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제도 마련과 확대에 주력하고 있어서 사회정서교육이 학교에 의미 있게 정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듯 확산 초기에 사회정서교육의 목적과 방식, 평가와 학교문화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회정서교육은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이 물음은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서 제기된 ‘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종합적인 능력과 품성, 곧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덕이 전문 기술처럼 일정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전수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 논쟁은 사회정서교육이 단순한 기술 훈련을 넘어 인격과 시민적 덕을 기르는 교육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덕교육에 관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논쟁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논쟁은 젊은 히포크라테스가 유명한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에게 배우고 싶어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히포크라테스에게 묻는다. 의사에게 배우면 의술을 익히고, 조각가에게 배우면 조각술을 익힌다. 그렇다면 프로타고라스에게서는 무엇을 배우려 하는가? 히포크라테스가 이에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찾아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 묻는다.
프로타고라스는 가정의 일을 현명하게 처리하고, 나라의 일에서도 말과 행동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법을 가르치겠노라고 답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일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책임 있게 수행하는 훌륭한 시민을 길러내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시민적 능력, 곧 정치적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근거를 들어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아테네인들은 건축이나 조선처럼 전문 지식이 필요한 문제에서는 전문가의 의견만 듣지만, 나라의 일을 논의할 때에는 직업이나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발언을 허용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관행을 근거로, 아테네인들이 정치적 덕을 특정한 교사에게 배워 습득하는 전문 기술로 여기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둘째, 정치적 덕이 다른 기술처럼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면, 뛰어난 정치가는 먼저 자신의 자녀에게 그것을 전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와 같은 훌륭한 정치가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근거로 정치적 덕이 전문 기술처럼 일정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전수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이에 프로타고라스는 정치적 덕이 건축이나 조선술 같은 기술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반박한다. 전문 기술은 소수의 전문가만 지녀도 되지만, 염치와 정의로 이루어진 시민적 덕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필요하다. 정치 문제에서 모든 시민에게 발언을 허용하는 것 또한 누구나 시민적 덕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양육자가, 학교에서는 교사가, 공동체에서는 법과 관습이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덕을 가르치지만, 그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난 교사가 있을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이 바로 그러한 교사라고 주장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의문에 피리 연주를 예로 들어 답한다. 모든 시민이 피리 연주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도시가 있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서로에게 피리 연주법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교육을 받더라도 타고난 소질과 배움의 정도에 따라 실력은 달라진다. 뛰어난 연주자의 자녀가 반드시 뛰어난 연주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덕을 배우더라도 같은 수준에 이르는 것은 아니며, 훌륭한 정치가의 자녀가 아버지만큼 훌륭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덕을 가르칠 수 없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논쟁이 이어지면서 질문은 ‘덕을 가르칠 수 있는가’에서 ‘덕이란 무엇인가’로 옮겨간다. 정의와 절제, 경건, 용기, 지혜는 서로 다른 덕인가, 아니면 하나의 덕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 것인가? 용기는 지식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사람은 옳은 것을 알면서도 욕망과 쾌락에 이끌려 그릇된 행동을 할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덕과 지식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논증한다. 덕이 지식이라면 덕도 교육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다. 여기서 역설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덕교육의 가능성을 의심했던 소크라테스가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는 쪽에 가까워지고,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했던 프로타고라스는 덕이 지식이라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는 덕을 가르칠 수 없다고 단정하지도, 일반적인 기술처럼 손쉽게 전수할 수 있다고 결론짓지도 않는다. 오히려 덕교육의 가능성을 논하려면 먼저 덕이 무엇이며, 그것이 지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또한 덕은 한 사람의 가르침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학교, 법과 관습을 아우르는 공동체 전체의 교육을 통해 길러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사회정서교육이 개별적인 기술의 습득에 머물지 않고, 판단과 행동, 인격과 공동체의 문제까지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한다.
사회정서학습의 비판적 검토와 제안
이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현행되는 사회정서교육을 몇 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 방향성을 제안할 수 있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미심쩍어 한 것은 프로타고라스가 덕을 마치 전문가가 소유하고 가르칠 수 있는 기술처럼 내세운다는 점이었다. 현대의 사회정서교육도 자기인식과 감정조절, 공감, 관계 기술, 의사결정을 잘게 나누어 프로그램화할 때 같은 함정에 빠진다. 예를 들어 공감 능력은 배려의 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선함은 아니다. 타인의 감정을 잘 읽는 능력은 배려에 쓰일 수도, 조작과 지배에 쓰일 수도 있다. 따라서 사회정서교육은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어떤 사람과 공동체를 지향할 것인지까지 물어야 한다.
또한 학생은 수업 내용에서만 배우지 않는다. 교사의 태도와 학교의 규범,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 평가와 경쟁의 구조를 통해서도 무엇이 중요하고 바람직한지를 배운다. 공감과 배려 역시 말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가르치기 어렵다. 관계 속에서 직접 경험하고 실천할 때 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에게도 마찬가지다. 교사가 교육당국과 학부모, 동료로부터 존중받고 정서적으로 지지받을 때 학생에게도 공감과 배려를 더 충실하게 실천하고 가르칠 수 있다. 협력과 양보의 가치를 가르치면서 학생을 성적으로 줄 세우고, 자기 돌봄을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더 높은 성취를 요구하는 것 역시 같은 모순을 낳는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사회정서교육이 학생의 신뢰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회정서교육을 몇 차례의 수업이나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학급회의와 학생자치, 협력학습과 회복적 대화뿐 아니라 상담 체계와 생활규정, 평가 방식과 교사 협의 문화도 함께 살펴야 한다. 사회정서교육의 가치가 학교생활 전반의 관계와 제도 속에서 일관되게 실천될 때, 학생의 관계와 행동에도 더욱 지속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학생의 분노와 슬픔, 갈등을 무조건 조절하거나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어떤 분노는 불의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고, 어떤 슬픔은 인정받아야 할 고통의 표현이며, 어떤 갈등은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다. 따라서 사회정서교육은 개인의 부정적 감정을 잠재우는 데 머물지 않고, 그 감정의 원인을 윤리적으로 이해하며 공동체의 문제로 다루도록 가르쳐야 한다.
아울러 사회정서교육은 인성교육, 민주시민교육, 도덕교육, 상담교육, 보건교육과의 관계 속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새로운 이름의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방식은 학교 현장의 부담만 키울 수 있다. 도덕교육은 가치와 판단의 언어를, 상담교육은 개인의 심리적 지원을, 민주시민교육은 공동체와 정의의 시각을, 보건교육은 마음과 몸 건강의 기초를 제공한다. 사회정서교육은 이 영역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하고 재구성하는 통합적 관점이어야 한다.
사회정서교육을 실천할 교사의 전문성도 프로그램 운영법을 익히는 수준을 넘어야 한다. 교사 연수는 학생의 정서와 발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갈등 조정, 회복적 생활교육, 교사의 자기 돌봄과 학교문화 개선까지 함께 다루어야 한다. 교사는 정해진 프로그램을 전달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자신의 교육 실천을 성찰하며 학생의 성장을 돕는 실천가이다.
사회정서교육과 전문적인 마음건강 지원의 관계도 분명히 해야 한다. 모든 학생에게 보편적인 사회정서교육을 제공하되, 도움이 더 필요한 학생에게는 선별적인 지원을,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에게는 전문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이러한 책임을 교사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학교 상담과 위클래스,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의료·복지기관, 가정이 서로 연계하여 도움이 필요한 학생을 조기에 발견해 적절한 지원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끝으로 평가의 원칙을 신중히 세워야 한다. 사회정서교육의 효과를 점검할 필요는 있지만, 학생의 인격을 점수로 평가하거나 서열화해서는 안 된다. 자기성찰 기록과 교사 관찰, 학생 면담, 학급과 학교문화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더라도, 그 결과를 학생을 분류하거나 선발하는 데 사용하면 낙인과 통제를 낳을 수 있다. 특히 사회정서역량을 점수화하여 생활기록부나 선발 자료로 활용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평가의 대상도 학생 개인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학교가 사회정서학습을 안정적으로 가르칠 조건을 갖추었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성숙하고 자유로운 시민을 기르는 교육으로
프로타고라스 논쟁은 덕교육에 손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난점을 또렷이 드러낸다. 덕은 가르쳐야 할 것 같지만 일반 기술처럼 가르칠 수는 없고, 지식과 관련되지만 정보 전달로 환원되지 않으며, 개인의 성향이면서 공동체 속에서 빚어진다. 덕교육은 교사의 말로 이루어지지만, 교사의 삶과 학교의 문화가 담기지 않고서는 끝내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이 통찰은 대한민국의 사회정서교육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사회정서교육이 마음건강과 생활지도 지원에 머물지 않고, 학생이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성찰하며 타인과 책임 있게 관계를 맺고 공동체의 문제에 참여하도록 돕는 덕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회정서교육에 대한 관심은 학업성취와 경쟁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교육의 한계를 되돌아보고, 학생의 정서와 관계, 삶의 방향을 다시 교육의 중요한 문제로 다루려는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자신의 감정을 능숙하게 조절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요구한다면 사회정서교육은 학생들이 그 구조에 더 잘 적응하고 더 오래 버티게 하는 보조 장치로 전락할 수 있다.
결국 사회정서교육이 지향해야 할 것은 좋은 삶을 향해 타인과 더불어 책임 있게 살아가는 성숙하고 자유로운 시민이다. 우리는 학생에게 관계를 관리하는 기술을 가르치려는가, 아니면 함께 좋은 공동체를 이루는 덕을 기르려는가? 대한민국 사회정서교육의 방향은 이 물음에 대한 답에서 결정될 것이다.
_정지영(서울 신광초등학교 교사. 이 글은 계간 민들레 161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학교 현장의 위기와 사회정서교육의 필요성
최근 학교에서 사회정서교육SEL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학생들의 마음건강 위기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사회적 고립과 학습 결손, 관계 단절, 디지털 매체에 대한 과도한 의존, 가정 내 갈등이 누적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학생들의 정서적 어려움도 한층 뚜렷해졌다. 이에 따라 학생의 정서 문제를 더 이상 가정이나 의료기관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인식이 커졌다. 학생이 긴 시간을 보내는 학교가 학생들의 마음건강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예방하며,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하는 생활 중심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199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사회정서교육은 학생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조절하도록 돕는 교육이다. 또한 타인의 관점과 감정을 헤아리고, 서로 지지하는 관계를 맺으며, 책임 있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목적이 있다. 당시 미국은 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와 학교폭력, 학업 중단, 약물 사용, 관계 갈등이 학교 안팎의 심각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후 인지 능력뿐 아니라 사회적·정서적 역량도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등장하며 사회정서교육은 세계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국제기구들도 이러한 흐름에 주목해왔다. OECD는 사회정서역량을 학생의 학습과 건강, 삶의 만족도, 시민적 참여는 물론 노동시장에서의 성과와도 연결되는 역량으로 보고 국제 조사와 비교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유네스코 역시 사회정서학습을 평화와 포용, 지속가능성, 세계시민교육과 연계하여 다루고 있다. 이렇듯 사회정서교육은 학생의 삶과 학습, 관계와 시민성을 함께 다루는 미래교육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교육부는 사회정서교육을 ‘사회정서 역량을 강화하는 학교 기반의 보편적 마음건강 교육’으로 규정하고 2025년 시범 도입을 거쳐 2026년부터는 모든 학교가 교육과정 전반에서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사회정서교육은 독립 교과로 운영되기보다 교과 수업과 창의적 체험활동, 상담, 생활지도, 인성교육과 학교문화 전반에 통합되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제도 마련과 확대에 주력하고 있어서 사회정서교육이 학교에 의미 있게 정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듯 확산 초기에 사회정서교육의 목적과 방식, 평가와 학교문화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회정서교육은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이 물음은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서 제기된 ‘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종합적인 능력과 품성, 곧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덕이 전문 기술처럼 일정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전수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 논쟁은 사회정서교육이 단순한 기술 훈련을 넘어 인격과 시민적 덕을 기르는 교육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덕교육에 관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논쟁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논쟁은 젊은 히포크라테스가 유명한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에게 배우고 싶어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히포크라테스에게 묻는다. 의사에게 배우면 의술을 익히고, 조각가에게 배우면 조각술을 익힌다. 그렇다면 프로타고라스에게서는 무엇을 배우려 하는가? 히포크라테스가 이에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찾아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 묻는다.
프로타고라스는 가정의 일을 현명하게 처리하고, 나라의 일에서도 말과 행동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법을 가르치겠노라고 답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일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책임 있게 수행하는 훌륭한 시민을 길러내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시민적 능력, 곧 정치적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근거를 들어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아테네인들은 건축이나 조선처럼 전문 지식이 필요한 문제에서는 전문가의 의견만 듣지만, 나라의 일을 논의할 때에는 직업이나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발언을 허용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관행을 근거로, 아테네인들이 정치적 덕을 특정한 교사에게 배워 습득하는 전문 기술로 여기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둘째, 정치적 덕이 다른 기술처럼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면, 뛰어난 정치가는 먼저 자신의 자녀에게 그것을 전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와 같은 훌륭한 정치가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근거로 정치적 덕이 전문 기술처럼 일정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전수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이에 프로타고라스는 정치적 덕이 건축이나 조선술 같은 기술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반박한다. 전문 기술은 소수의 전문가만 지녀도 되지만, 염치와 정의로 이루어진 시민적 덕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필요하다. 정치 문제에서 모든 시민에게 발언을 허용하는 것 또한 누구나 시민적 덕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양육자가, 학교에서는 교사가, 공동체에서는 법과 관습이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덕을 가르치지만, 그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난 교사가 있을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이 바로 그러한 교사라고 주장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의문에 피리 연주를 예로 들어 답한다. 모든 시민이 피리 연주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도시가 있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서로에게 피리 연주법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교육을 받더라도 타고난 소질과 배움의 정도에 따라 실력은 달라진다. 뛰어난 연주자의 자녀가 반드시 뛰어난 연주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덕을 배우더라도 같은 수준에 이르는 것은 아니며, 훌륭한 정치가의 자녀가 아버지만큼 훌륭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덕을 가르칠 수 없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논쟁이 이어지면서 질문은 ‘덕을 가르칠 수 있는가’에서 ‘덕이란 무엇인가’로 옮겨간다. 정의와 절제, 경건, 용기, 지혜는 서로 다른 덕인가, 아니면 하나의 덕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 것인가? 용기는 지식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사람은 옳은 것을 알면서도 욕망과 쾌락에 이끌려 그릇된 행동을 할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덕과 지식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논증한다. 덕이 지식이라면 덕도 교육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다. 여기서 역설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덕교육의 가능성을 의심했던 소크라테스가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는 쪽에 가까워지고,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했던 프로타고라스는 덕이 지식이라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는 덕을 가르칠 수 없다고 단정하지도, 일반적인 기술처럼 손쉽게 전수할 수 있다고 결론짓지도 않는다. 오히려 덕교육의 가능성을 논하려면 먼저 덕이 무엇이며, 그것이 지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또한 덕은 한 사람의 가르침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학교, 법과 관습을 아우르는 공동체 전체의 교육을 통해 길러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사회정서교육이 개별적인 기술의 습득에 머물지 않고, 판단과 행동, 인격과 공동체의 문제까지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한다.
사회정서학습의 비판적 검토와 제안
이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현행되는 사회정서교육을 몇 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 방향성을 제안할 수 있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미심쩍어 한 것은 프로타고라스가 덕을 마치 전문가가 소유하고 가르칠 수 있는 기술처럼 내세운다는 점이었다. 현대의 사회정서교육도 자기인식과 감정조절, 공감, 관계 기술, 의사결정을 잘게 나누어 프로그램화할 때 같은 함정에 빠진다. 예를 들어 공감 능력은 배려의 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선함은 아니다. 타인의 감정을 잘 읽는 능력은 배려에 쓰일 수도, 조작과 지배에 쓰일 수도 있다. 따라서 사회정서교육은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어떤 사람과 공동체를 지향할 것인지까지 물어야 한다.
또한 학생은 수업 내용에서만 배우지 않는다. 교사의 태도와 학교의 규범,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 평가와 경쟁의 구조를 통해서도 무엇이 중요하고 바람직한지를 배운다. 공감과 배려 역시 말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가르치기 어렵다. 관계 속에서 직접 경험하고 실천할 때 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에게도 마찬가지다. 교사가 교육당국과 학부모, 동료로부터 존중받고 정서적으로 지지받을 때 학생에게도 공감과 배려를 더 충실하게 실천하고 가르칠 수 있다. 협력과 양보의 가치를 가르치면서 학생을 성적으로 줄 세우고, 자기 돌봄을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더 높은 성취를 요구하는 것 역시 같은 모순을 낳는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사회정서교육이 학생의 신뢰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회정서교육을 몇 차례의 수업이나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학급회의와 학생자치, 협력학습과 회복적 대화뿐 아니라 상담 체계와 생활규정, 평가 방식과 교사 협의 문화도 함께 살펴야 한다. 사회정서교육의 가치가 학교생활 전반의 관계와 제도 속에서 일관되게 실천될 때, 학생의 관계와 행동에도 더욱 지속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학생의 분노와 슬픔, 갈등을 무조건 조절하거나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어떤 분노는 불의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고, 어떤 슬픔은 인정받아야 할 고통의 표현이며, 어떤 갈등은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다. 따라서 사회정서교육은 개인의 부정적 감정을 잠재우는 데 머물지 않고, 그 감정의 원인을 윤리적으로 이해하며 공동체의 문제로 다루도록 가르쳐야 한다.
아울러 사회정서교육은 인성교육, 민주시민교육, 도덕교육, 상담교육, 보건교육과의 관계 속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새로운 이름의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방식은 학교 현장의 부담만 키울 수 있다. 도덕교육은 가치와 판단의 언어를, 상담교육은 개인의 심리적 지원을, 민주시민교육은 공동체와 정의의 시각을, 보건교육은 마음과 몸 건강의 기초를 제공한다. 사회정서교육은 이 영역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하고 재구성하는 통합적 관점이어야 한다.
사회정서교육을 실천할 교사의 전문성도 프로그램 운영법을 익히는 수준을 넘어야 한다. 교사 연수는 학생의 정서와 발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갈등 조정, 회복적 생활교육, 교사의 자기 돌봄과 학교문화 개선까지 함께 다루어야 한다. 교사는 정해진 프로그램을 전달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자신의 교육 실천을 성찰하며 학생의 성장을 돕는 실천가이다.
사회정서교육과 전문적인 마음건강 지원의 관계도 분명히 해야 한다. 모든 학생에게 보편적인 사회정서교육을 제공하되, 도움이 더 필요한 학생에게는 선별적인 지원을,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에게는 전문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이러한 책임을 교사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학교 상담과 위클래스,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의료·복지기관, 가정이 서로 연계하여 도움이 필요한 학생을 조기에 발견해 적절한 지원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끝으로 평가의 원칙을 신중히 세워야 한다. 사회정서교육의 효과를 점검할 필요는 있지만, 학생의 인격을 점수로 평가하거나 서열화해서는 안 된다. 자기성찰 기록과 교사 관찰, 학생 면담, 학급과 학교문화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더라도, 그 결과를 학생을 분류하거나 선발하는 데 사용하면 낙인과 통제를 낳을 수 있다. 특히 사회정서역량을 점수화하여 생활기록부나 선발 자료로 활용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평가의 대상도 학생 개인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학교가 사회정서학습을 안정적으로 가르칠 조건을 갖추었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성숙하고 자유로운 시민을 기르는 교육으로
프로타고라스 논쟁은 덕교육에 손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난점을 또렷이 드러낸다. 덕은 가르쳐야 할 것 같지만 일반 기술처럼 가르칠 수는 없고, 지식과 관련되지만 정보 전달로 환원되지 않으며, 개인의 성향이면서 공동체 속에서 빚어진다. 덕교육은 교사의 말로 이루어지지만, 교사의 삶과 학교의 문화가 담기지 않고서는 끝내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이 통찰은 대한민국의 사회정서교육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사회정서교육이 마음건강과 생활지도 지원에 머물지 않고, 학생이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성찰하며 타인과 책임 있게 관계를 맺고 공동체의 문제에 참여하도록 돕는 덕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회정서교육에 대한 관심은 학업성취와 경쟁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교육의 한계를 되돌아보고, 학생의 정서와 관계, 삶의 방향을 다시 교육의 중요한 문제로 다루려는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자신의 감정을 능숙하게 조절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요구한다면 사회정서교육은 학생들이 그 구조에 더 잘 적응하고 더 오래 버티게 하는 보조 장치로 전락할 수 있다.
결국 사회정서교육이 지향해야 할 것은 좋은 삶을 향해 타인과 더불어 책임 있게 살아가는 성숙하고 자유로운 시민이다. 우리는 학생에게 관계를 관리하는 기술을 가르치려는가, 아니면 함께 좋은 공동체를 이루는 덕을 기르려는가? 대한민국 사회정서교육의 방향은 이 물음에 대한 답에서 결정될 것이다.
_정지영(서울 신광초등학교 교사. 이 글은 계간 민들레 161호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