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 방 7호 웹툰 일러스트_출처 네이버 블로그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
많은 청년들이 심각한 무기력과 절망에 빠져 있다. 보건복지부가 2년 주기로 실시하는 「2024 청년의 삶 실태조사」는 여러 지표를 통해 이를 보여준다. 청년의 8.8%는 우울 증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청년도 2.9%에 이른다. 두 수치 모두 2022년 조사보다 증가한 것이다. 사회적 관계 역시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고립은둔청년이 해마다 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립의 정도 또한 깊어지고 있다. 집과 방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 청년의 비율이 증가하는 한편, 절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전혀 없다’라고 답한 청년의 비율도 2022년 2.4%에서 2024년 5.7%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청년들의 미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이 자리하고 있다. 요즘 ‘청년’과 함께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쉬었음’이다.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육아·가사·취업 준비를 하고 있지 않고 단순히 ‘쉬고 있다’고 응답한 경우를 말하는데 이 중 20~30대 청년은 65만 명에 달한다. 10년 전에 비해 24만 명이나 늘어난 수치다. 여기에 AI 확산으로 감소하는 일자리의 상당수가 청년층에 집중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청년층 일자리는 약 21.1만 개 줄었는데, 그중 20.8만 개가 AI 노출도가 높은 업종이다. 신입 채용이 줄어드는 노동시장 속에서 청년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쉬었음’과 ‘고립’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AI산업과 비-AI산업 사이의 임금 격차, 주식 및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인한 자산 격차는 이미 구조적 현실이 되었다. 노력만으로는 좁히기 어려운 불평등 앞에서 청년들은 미래를 설계할 힘은 물론, “사다리를 탈 의욕”마저 잃어가고 있다.
주거 역시 청년들의 불안을 키우는 중요한 조건이다. 국토교통부의 「2024년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청년의 82.6%가 세입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최저 주거기준에도 못 미치는 청년 가구 비율은 8.2%에 이른다. 고시원이나 컨테이너 같은 ‘주택 외 거처’에 사는 비율도 5.3%로 전체 평균의 두 배를 넘는다. 열악한 주거 환경만이 문제가 아니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75%가 20~30대 청년일 만큼, 청년들이 의지하는 주거 계약조차 안전하지 않다.
동시에 안정적인 주거로 이동할 가능성 자체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 수도권의 연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PIR)은 8.7배에 달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8년 넘게 모아야 겨우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 동네에 뿌리내리고 관계를 쌓아갈 시간과 여유 자체가 사라진다. 그렇게 청년들은 안정된 일자리뿐 아니라, 일상을 함께 나눌 이웃도, 지친 몸과 마음을 쉴 공간도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우울, 불안, 고립 같은 존재론적 위기는 일부 청년에게만 일어나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점차 하나의 삶의 방식이자 시대적 감각이 되어가고 있다. 오랫동안 고립은둔청년을 만나온 김고은 작가는 고립 상태를 ‘혼맹soul blindness’이라 부른다.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이 『숲은 생각한다』에서 사용한 개념을 빌려온 것으로,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못하고 서로의 존재를 마주하지 못하는, 영혼을 잃어버린 상태를 뜻한다. 그는 혼맹에 빠진 청년에게는 “존재 위기의 공포가 일상에 이미 고정된 값”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감각이 더 이상 고립은둔청년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치 앞의 미래도 단단하게 그리기 어려운 사회 속에서, 많은 청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각자의 혼맹 속에서 홀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끝까지 바라보는 일
타인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마주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른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고립은둔청년을 연구하며 만났던 연석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1)
연석은 어린 시절부터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을 겪으며 자랐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짧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을 뿐, 안정적인 일이나 관계를 오래 가져본 적이 없었다. 서른 살 무렵,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의 한 고시원에 머물며 공사장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밖으로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섯 달 동안 좁은 방 안에서 은둔을 했다. 몸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고시원에서 나중에는 “바퀴벌레와 친구를 하게 됐다”고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에게 도대체 어떻게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그 고시원을 운영하던 사장님 부부가 자신을 돌봐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연석의 생활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 “밥은 제대로 먹고 있냐”며 매일같이 문앞에 쪽지를 남기고 음식을 챙겨주었다. 대답이 없어도 말을 걸었고, 방세가 밀리기 시작하자 더는 돈 걱정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석이 끼니마저 거른 채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사장님은 방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 자기 자신조차 견딜 수 없는 냄새가 났지만, 사장님은 말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영양실조 상태였던 연석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퇴원 뒤에는 두 달 가까이 사장 부부의 집에서 지내며 몸을 회복했다. 사장님은 그를 거리로 데리고 나가 함께 걸었고, 예전에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를 물었다. “그럼 하나씩 다시 해보자.” 그 말과 함께 연석이 혼자 걸을 수 있는 세상은 조금씩 넓어졌고, 결국 다시 작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연석의 삶을 바꾼 것은 거창한 상담 기법이나 특별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사장 부부는 그가 무엇을 증명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존재를 놓지 않았다. 스스로조차 자신을 포기한 사람에게 ‘나는 아직 너를 보고 있다’는 신호를 꾸준히 보내며.
이런 순간은 연석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다. 내가 만난 청년들은 대부분 어른들에게 큰 실망과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었지만, 동시에 상상을 뛰어넘는 어른들의 보살핌 속에서 다시 일어서기도 했다. 은둔에서 겨우 벗어난 윤미가 낯선 지역에 정착해야 했을 때, 한 지원단체 활동가는 윤미가 안전한 집을 구할 수 있도록 뜨거운 여름날에도 함께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갑작스레 부모상을 치러야 했던 상준의 곁에는 가족을 대신해 장례식장을 끝까지 지킨 선생님이 있었다.
이처럼 어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한 청년의 가장 위태로운 순간, 그 곁에서 함께 버텨주는 데서 시작되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삶에 개입해 방향을 제시해주기보다,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없게 된 사람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사람이 조금씩 혼맹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때까지 먼저 그를 바라봐주는 일 말이다.
다른 눈으로 보기
물론 모든 사람이 고시원 사장 부부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집으로 데려와 돌보고, 몇 달에 걸쳐 삶을 함께 버텨주는 일은 남다른 헌신과 희생이 따른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든 청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까.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고립청년 부모들의 자조모임에서 나는 그 가능성을 여러 번 보았다. 한 부모는 모임에 참여하고 가장 좋았던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내 아이가 이런 상태라는 걸 말하고 다니지 못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이상하게 보는 거 같아서 너무 위축되고,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부모모임에서 (같은 입장의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내 상황이 너무 평범한 거예요. 여기서 한번 이야기하고 나니까, 희한하게 다른 모임에 가서도 ‘우리 애 은둔하고 있어’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됐어요.”
또 다른 부모는 웃으며 말했다. “어느 날부터 오히려 학교 열심히 다니는 애들이 더 이상해 보이는 거예요!” 모두가 웃었지만, 그 말에는 중요한 변화가 담겨 있었다. 문제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 특정한 삶만을 ‘정상’으로 여겨온 학교와 사회의 기준일지 모른다는 자각, 그 기준에 맞춰 사는 쪽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게 아니냐는 날카로운 반문이었다. 그 부모는 자조모임을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변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 또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청년들의 쉬었음, 고립, 우울, 자살과 같은 문제를 마주할 때, 그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여러 지원 제도와 개입을 마련한다. 물론 그런 지원은 필요하다. 하지만 혼맹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함께 달라져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연석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를 고쳐줄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포기한 순간에도 여전히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고립청년 부모들에게 필요했던 것 역시 아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이가 아니라 사회로 의심의 시선을 바꾸는 일이었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을 실패자로 여기고, 멈춘 시간을 뒤처짐으로 판단하며, 혼자 버티는 것을 성숙함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서로의 존재를 놓치고 있다. 그렇기에 혼맹에서 벗어나는 일은 전문가나 정책만의 몫일 수 없다. 가까운 사람의 삶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오래 바라보는 일, 누군가가 다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도록 그에게 꾸준히 눈길을 내어주는 일, 혼자 살아남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회를 의심하는 일.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완벽한 해결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바라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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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미소. (2025). 「‘고립’을 통치하기: 고립 청년 지원 정책의 문화기술지」.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석사학위논문.
_김미소(듣는연구소 연구활동가. 청년의 삶이 문제화되는 방식과 그에 응답하는 제도와 실천을 살펴보고 있다.)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
많은 청년들이 심각한 무기력과 절망에 빠져 있다. 보건복지부가 2년 주기로 실시하는 「2024 청년의 삶 실태조사」는 여러 지표를 통해 이를 보여준다. 청년의 8.8%는 우울 증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청년도 2.9%에 이른다. 두 수치 모두 2022년 조사보다 증가한 것이다. 사회적 관계 역시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고립은둔청년이 해마다 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립의 정도 또한 깊어지고 있다. 집과 방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 청년의 비율이 증가하는 한편, 절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전혀 없다’라고 답한 청년의 비율도 2022년 2.4%에서 2024년 5.7%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청년들의 미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이 자리하고 있다. 요즘 ‘청년’과 함께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쉬었음’이다.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육아·가사·취업 준비를 하고 있지 않고 단순히 ‘쉬고 있다’고 응답한 경우를 말하는데 이 중 20~30대 청년은 65만 명에 달한다. 10년 전에 비해 24만 명이나 늘어난 수치다. 여기에 AI 확산으로 감소하는 일자리의 상당수가 청년층에 집중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청년층 일자리는 약 21.1만 개 줄었는데, 그중 20.8만 개가 AI 노출도가 높은 업종이다. 신입 채용이 줄어드는 노동시장 속에서 청년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쉬었음’과 ‘고립’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AI산업과 비-AI산업 사이의 임금 격차, 주식 및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인한 자산 격차는 이미 구조적 현실이 되었다. 노력만으로는 좁히기 어려운 불평등 앞에서 청년들은 미래를 설계할 힘은 물론, “사다리를 탈 의욕”마저 잃어가고 있다.
주거 역시 청년들의 불안을 키우는 중요한 조건이다. 국토교통부의 「2024년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청년의 82.6%가 세입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최저 주거기준에도 못 미치는 청년 가구 비율은 8.2%에 이른다. 고시원이나 컨테이너 같은 ‘주택 외 거처’에 사는 비율도 5.3%로 전체 평균의 두 배를 넘는다. 열악한 주거 환경만이 문제가 아니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75%가 20~30대 청년일 만큼, 청년들이 의지하는 주거 계약조차 안전하지 않다.
동시에 안정적인 주거로 이동할 가능성 자체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 수도권의 연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PIR)은 8.7배에 달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8년 넘게 모아야 겨우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 동네에 뿌리내리고 관계를 쌓아갈 시간과 여유 자체가 사라진다. 그렇게 청년들은 안정된 일자리뿐 아니라, 일상을 함께 나눌 이웃도, 지친 몸과 마음을 쉴 공간도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우울, 불안, 고립 같은 존재론적 위기는 일부 청년에게만 일어나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점차 하나의 삶의 방식이자 시대적 감각이 되어가고 있다. 오랫동안 고립은둔청년을 만나온 김고은 작가는 고립 상태를 ‘혼맹soul blindness’이라 부른다.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이 『숲은 생각한다』에서 사용한 개념을 빌려온 것으로,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못하고 서로의 존재를 마주하지 못하는, 영혼을 잃어버린 상태를 뜻한다. 그는 혼맹에 빠진 청년에게는 “존재 위기의 공포가 일상에 이미 고정된 값”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감각이 더 이상 고립은둔청년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치 앞의 미래도 단단하게 그리기 어려운 사회 속에서, 많은 청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각자의 혼맹 속에서 홀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끝까지 바라보는 일
타인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마주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른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고립은둔청년을 연구하며 만났던 연석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1)
연석은 어린 시절부터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을 겪으며 자랐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짧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을 뿐, 안정적인 일이나 관계를 오래 가져본 적이 없었다. 서른 살 무렵,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의 한 고시원에 머물며 공사장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밖으로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섯 달 동안 좁은 방 안에서 은둔을 했다. 몸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고시원에서 나중에는 “바퀴벌레와 친구를 하게 됐다”고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에게 도대체 어떻게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그 고시원을 운영하던 사장님 부부가 자신을 돌봐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연석의 생활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 “밥은 제대로 먹고 있냐”며 매일같이 문앞에 쪽지를 남기고 음식을 챙겨주었다. 대답이 없어도 말을 걸었고, 방세가 밀리기 시작하자 더는 돈 걱정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석이 끼니마저 거른 채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사장님은 방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 자기 자신조차 견딜 수 없는 냄새가 났지만, 사장님은 말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영양실조 상태였던 연석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퇴원 뒤에는 두 달 가까이 사장 부부의 집에서 지내며 몸을 회복했다. 사장님은 그를 거리로 데리고 나가 함께 걸었고, 예전에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를 물었다. “그럼 하나씩 다시 해보자.” 그 말과 함께 연석이 혼자 걸을 수 있는 세상은 조금씩 넓어졌고, 결국 다시 작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연석의 삶을 바꾼 것은 거창한 상담 기법이나 특별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사장 부부는 그가 무엇을 증명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존재를 놓지 않았다. 스스로조차 자신을 포기한 사람에게 ‘나는 아직 너를 보고 있다’는 신호를 꾸준히 보내며.
이런 순간은 연석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다. 내가 만난 청년들은 대부분 어른들에게 큰 실망과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었지만, 동시에 상상을 뛰어넘는 어른들의 보살핌 속에서 다시 일어서기도 했다. 은둔에서 겨우 벗어난 윤미가 낯선 지역에 정착해야 했을 때, 한 지원단체 활동가는 윤미가 안전한 집을 구할 수 있도록 뜨거운 여름날에도 함께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갑작스레 부모상을 치러야 했던 상준의 곁에는 가족을 대신해 장례식장을 끝까지 지킨 선생님이 있었다.
이처럼 어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한 청년의 가장 위태로운 순간, 그 곁에서 함께 버텨주는 데서 시작되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삶에 개입해 방향을 제시해주기보다,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없게 된 사람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사람이 조금씩 혼맹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때까지 먼저 그를 바라봐주는 일 말이다.
다른 눈으로 보기
물론 모든 사람이 고시원 사장 부부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집으로 데려와 돌보고, 몇 달에 걸쳐 삶을 함께 버텨주는 일은 남다른 헌신과 희생이 따른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든 청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까.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고립청년 부모들의 자조모임에서 나는 그 가능성을 여러 번 보았다. 한 부모는 모임에 참여하고 가장 좋았던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내 아이가 이런 상태라는 걸 말하고 다니지 못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이상하게 보는 거 같아서 너무 위축되고,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부모모임에서 (같은 입장의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내 상황이 너무 평범한 거예요. 여기서 한번 이야기하고 나니까, 희한하게 다른 모임에 가서도 ‘우리 애 은둔하고 있어’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됐어요.”
또 다른 부모는 웃으며 말했다. “어느 날부터 오히려 학교 열심히 다니는 애들이 더 이상해 보이는 거예요!” 모두가 웃었지만, 그 말에는 중요한 변화가 담겨 있었다. 문제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 특정한 삶만을 ‘정상’으로 여겨온 학교와 사회의 기준일지 모른다는 자각, 그 기준에 맞춰 사는 쪽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게 아니냐는 날카로운 반문이었다. 그 부모는 자조모임을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변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 또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청년들의 쉬었음, 고립, 우울, 자살과 같은 문제를 마주할 때, 그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여러 지원 제도와 개입을 마련한다. 물론 그런 지원은 필요하다. 하지만 혼맹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함께 달라져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연석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를 고쳐줄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포기한 순간에도 여전히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고립청년 부모들에게 필요했던 것 역시 아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이가 아니라 사회로 의심의 시선을 바꾸는 일이었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을 실패자로 여기고, 멈춘 시간을 뒤처짐으로 판단하며, 혼자 버티는 것을 성숙함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서로의 존재를 놓치고 있다. 그렇기에 혼맹에서 벗어나는 일은 전문가나 정책만의 몫일 수 없다. 가까운 사람의 삶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오래 바라보는 일, 누군가가 다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도록 그에게 꾸준히 눈길을 내어주는 일, 혼자 살아남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회를 의심하는 일.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완벽한 해결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바라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믿는다.
.........................................
1) 김미소. (2025). 「‘고립’을 통치하기: 고립 청년 지원 정책의 문화기술지」.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석사학위논문.
_김미소(듣는연구소 연구활동가. 청년의 삶이 문제화되는 방식과 그에 응답하는 제도와 실천을 살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