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리버 여행기』 원서의 삽화. 마지막 여행지인 '후이늠'이란 말 종족이 사는 사회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야만족 '야후'는 영국 정치인들을 풍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감스럽게도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아동 번역물이 일서 중역이었다.1) 게다가 완역본도 아니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비참함)이 ‘장발장’이란 제목의 동화책으로 소개된 것처럼, 원작 파괴 수준의 축약과 왜곡이 이루어졌다. 고전이 어린이용 이야기로 바뀌면서 본질이 훼손되는 일은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라퐁텐의 우화는 일찍이 프랑스 초등 교과서에 실릴 만큼 널리 읽혔지만 그 풍자성은 희석되고 말았다. 역사학자 자크 바전은 “걸작을 아동문학으로 만드는 것은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효과를 낳는다”고 했다.2)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폭탄을 안겨줄 수는 없는 일이니 뇌관을 뺀 폭탄을 장남감처럼 던져준 셈이다.
뇌관이 제거된 이야기의 위험은 다른 데 있다. 원전과 다른 작품을 읽고선 그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찾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려서 읽었던 『걸리버 여행기』가 원전의 5분의 1도 안 되는 축약본임을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 지나서였다.(한국어판 완역본이 처음 나온 것이 2019년이다.) 사실상 사회비평서에 가까운 책이 그저 재미 있는 이야깃거리로 읽힌 것이다. 조너선 스위프트 당대의 영국 사회상과 역사적 배경을 알고 원전을 읽는 영미권 독자와 동화책 수준의 중역된 축약본을 읽는 한국 독자의 독서 수준이 어떠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서를 중역한 60~70년대 세계명작 전집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지향했던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선정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소공자』, 『소공녀』로 대표되는 작품들 속에 담긴 세계관이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개발도상국 아이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서구에 대한 동경이 어린시절 영혼에 박힌 셈이다. 세계적인 동화 연구자인 잭 자이프스는 고전으로 분류되는 동화가 독자들에게 주입하는 보편적 가치가 사실은 불합리한 세상에 순응하게 만드는 은밀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한다. 동아시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아이들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인종주의 세례를 받았다.
콩쥐나 신데렐라나 캐릭터는 비슷한데 많은 여자아이들이 신데렐라를 더 선망한 까닭은 호박마차와 무도회, 유리구두 같은 장치들이 더 있어 보여서일까. 콩쥐는 우여곡절 끝에 꽃신의 주인공이 되어 아버지 뻘인 감사의 후처가 된 반면 유리구두 한 짝을 되찾은 신데렐라는 왕자와 결혼했으니 신데렐라를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왜 이 땅의 아이들 삶은 민담에서조차 구차하게 그려졌을까. 민담을 지어내고 전승한 민중의 리얼리즘으로 이해하면 될까. 콩쥐를 괴롭히던 팥쥐가 죽임을 당한 뒤 젓갈이 되는 이야기는 리얼리즘을 넘어 호러물에 가깝지만 민담의 잔혹성은 세계적인 현상이니 그려려니 하자.(그래도 콩쥐팥쥐전은 세계에 유례 없는 엽기적인 민담인 건 사실이다.)
민담은 구세계의 질서를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새로움의 탄생성을 간직한 아이들은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그 질서에 물들어간다. 그렇게 세상은 안정되고 정체되어간다. 드물게 물들지 않는 반항아들이 등장함으로써 세상이 다시금 리셋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좌절한다. 구세계가 갖고 있는 관성의 힘을 거스를 수 있는 내공을 길러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곳곳에 은밀히 폭탄을 설치하고, 구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려 애쓴다. 교과서에 실리는 문학 작품은 모조 폭탄이거나 뇌관이 제거된 것들이기 십상이다.
동화는 흔히 권선징악 같은 판에 박힌 도덕 관념을 심어주지만 벌거벗은 임금님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어린아이처럼 오염되지 않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돕기도 한다. 권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일깨운다. 헤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는 삶의 진실을 은폐하는 듯하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애니메이션 <슈렉>에서처럼 슈렉의 아내가 된 피오나 공주가 녹색 피부의 뚱보인 채 끝나버리면 어른들은 통쾌함을 느낄지 모르나 아이들은 희망을 잃는다. 성에 갇혀 사는 공주의 삶보다 슈렉 아내의 자유분방한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와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이야기를 뒤섞으면 곤란하다.
오늘날 동화의 왜곡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디즈니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프리즘으로 흑인3) 인어공주를 등장시키지만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녹색 피부의 뚱보 공주를 좋아하지 않듯이. 그 이면에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스며들어 있을지라도 원작을 그렇게 훼손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이다.(흑인 인어공주라도 매혹적인 인물을 창조할 수 있었을 텐데 디즈니가 할리 베일리를 캐스팅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종을 넘어서 인간 보편의 정서다. 아이들도 예쁜 사람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따른다. 잘생긴 사람은 시선을 끌지만 아름다운 사람은 영혼을 끌어당긴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참됨이나 선함이 아니라 아름다움임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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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7년과 1996년 저작권법 개정으로 중복 출판이 줄어들고 해적판이 사라지면서 전문 번역가들이 등장해 번역서의 수준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2) 자크 바전, 이희재 역,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1), 서울: 민음사, 2006, p.654
3) PC주의에 따르면 흑인(Black)도 금기어여서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 불러야 한다. 하지만 우피 골드버거 같은 배우는 자신이 그냥 ‘아메리칸’이라고 항변한다. ‘유러피안 아메리칸’이 없는 마당에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차별적 언어가 아니면 무엇일까. 가리려고 뭔가를 덧대면 더 두드러지는 법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걸리버 여행기』 원서의 삽화. 마지막 여행지인 '후이늠'이란 말 종족이 사는 사회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야만족 '야후'는 영국 정치인들을 풍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감스럽게도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아동 번역물이 일서 중역이었다.1) 게다가 완역본도 아니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비참함)이 ‘장발장’이란 제목의 동화책으로 소개된 것처럼, 원작 파괴 수준의 축약과 왜곡이 이루어졌다. 고전이 어린이용 이야기로 바뀌면서 본질이 훼손되는 일은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라퐁텐의 우화는 일찍이 프랑스 초등 교과서에 실릴 만큼 널리 읽혔지만 그 풍자성은 희석되고 말았다. 역사학자 자크 바전은 “걸작을 아동문학으로 만드는 것은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효과를 낳는다”고 했다.2)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폭탄을 안겨줄 수는 없는 일이니 뇌관을 뺀 폭탄을 장남감처럼 던져준 셈이다.
뇌관이 제거된 이야기의 위험은 다른 데 있다. 원전과 다른 작품을 읽고선 그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찾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려서 읽었던 『걸리버 여행기』가 원전의 5분의 1도 안 되는 축약본임을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 지나서였다.(한국어판 완역본이 처음 나온 것이 2019년이다.) 사실상 사회비평서에 가까운 책이 그저 재미 있는 이야깃거리로 읽힌 것이다. 조너선 스위프트 당대의 영국 사회상과 역사적 배경을 알고 원전을 읽는 영미권 독자와 동화책 수준의 중역된 축약본을 읽는 한국 독자의 독서 수준이 어떠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서를 중역한 60~70년대 세계명작 전집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지향했던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선정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소공자』, 『소공녀』로 대표되는 작품들 속에 담긴 세계관이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개발도상국 아이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서구에 대한 동경이 어린시절 영혼에 박힌 셈이다. 세계적인 동화 연구자인 잭 자이프스는 고전으로 분류되는 동화가 독자들에게 주입하는 보편적 가치가 사실은 불합리한 세상에 순응하게 만드는 은밀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한다. 동아시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아이들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인종주의 세례를 받았다.
콩쥐나 신데렐라나 캐릭터는 비슷한데 많은 여자아이들이 신데렐라를 더 선망한 까닭은 호박마차와 무도회, 유리구두 같은 장치들이 더 있어 보여서일까. 콩쥐는 우여곡절 끝에 꽃신의 주인공이 되어 아버지 뻘인 감사의 후처가 된 반면 유리구두 한 짝을 되찾은 신데렐라는 왕자와 결혼했으니 신데렐라를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왜 이 땅의 아이들 삶은 민담에서조차 구차하게 그려졌을까. 민담을 지어내고 전승한 민중의 리얼리즘으로 이해하면 될까. 콩쥐를 괴롭히던 팥쥐가 죽임을 당한 뒤 젓갈이 되는 이야기는 리얼리즘을 넘어 호러물에 가깝지만 민담의 잔혹성은 세계적인 현상이니 그려려니 하자.(그래도 콩쥐팥쥐전은 세계에 유례 없는 엽기적인 민담인 건 사실이다.)
민담은 구세계의 질서를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새로움의 탄생성을 간직한 아이들은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그 질서에 물들어간다. 그렇게 세상은 안정되고 정체되어간다. 드물게 물들지 않는 반항아들이 등장함으로써 세상이 다시금 리셋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좌절한다. 구세계가 갖고 있는 관성의 힘을 거스를 수 있는 내공을 길러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곳곳에 은밀히 폭탄을 설치하고, 구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려 애쓴다. 교과서에 실리는 문학 작품은 모조 폭탄이거나 뇌관이 제거된 것들이기 십상이다.
동화는 흔히 권선징악 같은 판에 박힌 도덕 관념을 심어주지만 벌거벗은 임금님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어린아이처럼 오염되지 않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돕기도 한다. 권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일깨운다. 헤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는 삶의 진실을 은폐하는 듯하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애니메이션 <슈렉>에서처럼 슈렉의 아내가 된 피오나 공주가 녹색 피부의 뚱보인 채 끝나버리면 어른들은 통쾌함을 느낄지 모르나 아이들은 희망을 잃는다. 성에 갇혀 사는 공주의 삶보다 슈렉 아내의 자유분방한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와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이야기를 뒤섞으면 곤란하다.
오늘날 동화의 왜곡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디즈니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프리즘으로 흑인3) 인어공주를 등장시키지만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녹색 피부의 뚱보 공주를 좋아하지 않듯이. 그 이면에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스며들어 있을지라도 원작을 그렇게 훼손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이다.(흑인 인어공주라도 매혹적인 인물을 창조할 수 있었을 텐데 디즈니가 할리 베일리를 캐스팅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종을 넘어서 인간 보편의 정서다. 아이들도 예쁜 사람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따른다. 잘생긴 사람은 시선을 끌지만 아름다운 사람은 영혼을 끌어당긴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참됨이나 선함이 아니라 아름다움임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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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7년과 1996년 저작권법 개정으로 중복 출판이 줄어들고 해적판이 사라지면서 전문 번역가들이 등장해 번역서의 수준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2) 자크 바전, 이희재 역,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1), 서울: 민음사, 2006, p.654
3) PC주의에 따르면 흑인(Black)도 금기어여서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 불러야 한다. 하지만 우피 골드버거 같은 배우는 자신이 그냥 ‘아메리칸’이라고 항변한다. ‘유러피안 아메리칸’이 없는 마당에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차별적 언어가 아니면 무엇일까. 가리려고 뭔가를 덧대면 더 두드러지는 법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