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목소리는 지문처럼 고유한 무늬를 지녔다.
어느 성우의 목소리
얼마 전 지병으로 작고한 성우 강희선 씨는 줄리아 로버츠, 니콜 키드먼 같은 할리우드 주연 여배우들의 더빙 목소리를 맡았는데, 특히 더빙이 까다로운 배우로 샤론 스톤을 꼽았다. “대사는 사무적인데 눈빛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있어 눈빛에 맞는 호흡을 찾아야 했다”고 한다. AI가 인간의 목소리를 대체할 수 없는 지점이다. 눈빛을 읽어내면서 그에 맞는 목소리 톤을 찾아내는 일은 사람, 그것도 베테랑 성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 역은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지하철 안내방송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친숙했던 그는 2025년 9월 병상에서 한 TV 채널로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게 된다. “강희선 성우 목소리가 앞으로는 AI 음성으로 대체될 예정”이라는. 항암 투병 중에도 복대를 차고 나가 안내방송 녹음을 한 그에게 서울교통공사는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었다고 한다. 일방적인 해고 통보였던 셈이다. 공사 책임자는 AI처럼 건조한 목소리를 가졌을까.
코레일의 열차 안내방송도 맡았던 강 성우는 2024년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돈을 따지지 않아요. 그 어떤 자부심이죠. 그런데 코레일이 AI로 (목소리를) 바꾸었대요. 가서 직접 들어봤는데 아니더라고요. 사람의 정서가 없어요. 종착역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할 때 저는 온 힘을 다해서 진심으로 인사해요. AI는 따뜻함이 없어요. 인간의 정서도 없고.”
코레일이나 서울교통공사는 ‘비용 절감’이라는 합리적인 판단 아래 안내방송 목소리를 교체했을 것이다. 무심코 흘려 듣게 되는 안내방송이지만, AI의 “감사합니다”라는 멘트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음을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인지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긋나긋한 네비게이션 안내 목소리처럼 AI 목소리는 친절하지만, 감정의 온도가 일정한 기계적인 친절이다. 그렇게 세상은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새 점점 건조한 세계로 바뀌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목소리는 문체와도 닮았다. AI로 만든 목소리가 매끄럽듯이 AI가 쓴 글은 비문이 없고 지나치게 매끄럽다. 거기엔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다. 어떤 문제든 망설임 없이 좌르륵 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그 문체는 너무 매끄러워 첫 단어에서 마지막까지 미끄러지듯 읽힌다. AI로 작성한 리포트로 과제를 내는 학생들이 많지만 문체까지 바꾸지는 못해 눈 밝은 교사들은 쉽게 가려낸다. 공모전 심사위원들도 AI가 쓴 글을 가려내는 것이 일차 과제가 되었다.
AI가 쓴 글에서 나타나는 특징 몇 가지가 있다. 문단마다 주장-설명-예시-정리 식의 패턴이 반복되고 논지가 균형 잡혀 있다. 편견에 대한 강박 같은 것이 있어 모든 주장에 예외를 덧붙인다. “이 방법은 효과적일 수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식이다. ‘한편’ ‘다만’ ‘반면’ 같은 표현을 자주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논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논리적 연결을 명시하기 위해 ‘따라서’ ‘즉’ ‘다시 말해’ 같은 접속사를 많이 쓴다. 문장의 길이도 일정해서 읽다보면 비슷한 리듬이 반복되면서 기계적인 느낌이 든다.
AI가 쓴 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평균 이상의 문장력, 균형 잡힌 시각, 논리 정연함 등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문제는 그 글을 자신의 글로 포장할 때 생겨난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자기 글인 양 가져다 쓰는 것은 명백히 표절이지만 AI가 쓴 글을 가져다 쓰는 것은 표절로 인식하지 않는다. AI에게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고, AI 스스로 저작권을 주장하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문체는 인테리어가 아니다
AI가 사람들의 일을 대신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 글쓰기도 이미 그런 일에 속한다. 포털에는 AI가 쓴 기사가 도배되고 있다. 클릭 수가 중요하다 보니 자극적인 표현이 남용된다. 최근 연예 기사 제목에는 흔히 ‘충격’, ‘비보’, ‘오열’ 같은 낱말이 들어가는데, 이런 기사는 믿고 거르게 된다. AI의 자충수인 셈이다. 자극적인 표현에 쉽게 끌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유효한 미끼여서 한동안 계속되겠지만 클리쎄를 눈치채는 이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럼 또 다른 클리쎄가 등장해 낚시질을 이어갈 것이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말처럼 메시지를 전하는 형식에 따라 메시지는 달리 전달될 수 있다. 같은 음식도 담긴 그릇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도 말투나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내용보다 중요하듯이 글 또한 형식이 중요하다. 형식이 받쳐주지 않는 글은 힘이 없다. 글의 형식은 문법과 문체로 나타난다. 영문법의 문장 5형식처럼 문법이 글의 짜임새를 만든다면, 문체(文體)는 말 그대로 글의 ‘몸’이다. 문법에 충실한 것만으로도 글꼴(사람꼴)을 갖출 수 있지만 ‘그다움’은 문체에서 드러난다. 몸가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다움의 태가 드러나듯이 문체는 글쓴이의 됨됨이를 드러낸다.
몸의 근본은 호흡이다.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는 게 호흡이다. 호흡이 글의 내용과 형식을 이어준다. 숨이 가빠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듯이, 좋은 글은 호흡이 일정하지 않다. 리드미컬하다. 박자가 리듬과 멜로디를 연결하면서 곡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처럼 문체는 노래의 박자 같은 것이다. 문체가 받쳐주지 않는 글은 박치가 부르는 노래처럼 읽기도 듣기도 힘들다. 음악은 형식이 곧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래, 시, 산문으로 갈수록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해 보이지만, 형식이 무너지면 내용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말의 경우는 내용을 보완해주는 다른 요소들(표정이나 몸짓, 말투 등)이 있지만, 글은 오로지 글로만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말투가 있듯이 글투(문체)가 있다. 말하듯이 쓰는 글이 좋은 글이라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글의 고유한 형식이 있다. 문체는 내용으로 전하지 못하는 것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말의 내용보다 말투 같은 형식이 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할 때가 많듯이, 문체는 글의 생명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언어 속에 리듬(패턴)이 있기 때문이다.
글 꾸밈을 문체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흔히 몸 만들기 하는 이들이 눈에 보이는 근육 만들기에 치중하듯이. 골격이 바로 잡히고 속근육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근육만 키운 몸은 허우대만 멀쩡할 뿐 부실함이 금방 드러난다. 기초도 기둥도 부실한데 인테리어에 공을 들이는 격이다. 문체는 인테리어가 아니라 집의 골조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을지 목조로 지을지에 따라 집의 형태가 달라진다. 문체가 건물의 골조라면 문체의 속근육은 토대에 해당한다. 기초를 다지지 않은 집은 머지않아 여기저기 뒤틀림 현상이 나타나고 결국 무너지듯이 토대는 글의 생명력을 좌우한다. 글의 토대는 결국 글쓴이의 사람됨 그 자체다. 그의 됨됨이가 알게 모르게 글에 배어 나온다.
AI의 한계는 몸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피지컬 AI가 등장하고 있지만 그 몸은 살아 있는 몸이 아니다. 호흡을 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응하지도 못한다. 철학자 한병철의 말처럼 그 몸에는 ‘소름’이 돋지 않는다. 챗GPT 버전이 100까지 높아져도 살아 있는 아름다운 문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사람의 목소리는 지문처럼 고유한 무늬를 지녔다.
어느 성우의 목소리
얼마 전 지병으로 작고한 성우 강희선 씨는 줄리아 로버츠, 니콜 키드먼 같은 할리우드 주연 여배우들의 더빙 목소리를 맡았는데, 특히 더빙이 까다로운 배우로 샤론 스톤을 꼽았다. “대사는 사무적인데 눈빛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있어 눈빛에 맞는 호흡을 찾아야 했다”고 한다. AI가 인간의 목소리를 대체할 수 없는 지점이다. 눈빛을 읽어내면서 그에 맞는 목소리 톤을 찾아내는 일은 사람, 그것도 베테랑 성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 역은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지하철 안내방송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친숙했던 그는 2025년 9월 병상에서 한 TV 채널로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게 된다. “강희선 성우 목소리가 앞으로는 AI 음성으로 대체될 예정”이라는. 항암 투병 중에도 복대를 차고 나가 안내방송 녹음을 한 그에게 서울교통공사는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었다고 한다. 일방적인 해고 통보였던 셈이다. 공사 책임자는 AI처럼 건조한 목소리를 가졌을까.
코레일의 열차 안내방송도 맡았던 강 성우는 2024년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돈을 따지지 않아요. 그 어떤 자부심이죠. 그런데 코레일이 AI로 (목소리를) 바꾸었대요. 가서 직접 들어봤는데 아니더라고요. 사람의 정서가 없어요. 종착역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할 때 저는 온 힘을 다해서 진심으로 인사해요. AI는 따뜻함이 없어요. 인간의 정서도 없고.”
코레일이나 서울교통공사는 ‘비용 절감’이라는 합리적인 판단 아래 안내방송 목소리를 교체했을 것이다. 무심코 흘려 듣게 되는 안내방송이지만, AI의 “감사합니다”라는 멘트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음을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인지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긋나긋한 네비게이션 안내 목소리처럼 AI 목소리는 친절하지만, 감정의 온도가 일정한 기계적인 친절이다. 그렇게 세상은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새 점점 건조한 세계로 바뀌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목소리는 문체와도 닮았다. AI로 만든 목소리가 매끄럽듯이 AI가 쓴 글은 비문이 없고 지나치게 매끄럽다. 거기엔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다. 어떤 문제든 망설임 없이 좌르륵 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그 문체는 너무 매끄러워 첫 단어에서 마지막까지 미끄러지듯 읽힌다. AI로 작성한 리포트로 과제를 내는 학생들이 많지만 문체까지 바꾸지는 못해 눈 밝은 교사들은 쉽게 가려낸다. 공모전 심사위원들도 AI가 쓴 글을 가려내는 것이 일차 과제가 되었다.
AI가 쓴 글에서 나타나는 특징 몇 가지가 있다. 문단마다 주장-설명-예시-정리 식의 패턴이 반복되고 논지가 균형 잡혀 있다. 편견에 대한 강박 같은 것이 있어 모든 주장에 예외를 덧붙인다. “이 방법은 효과적일 수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식이다. ‘한편’ ‘다만’ ‘반면’ 같은 표현을 자주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논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논리적 연결을 명시하기 위해 ‘따라서’ ‘즉’ ‘다시 말해’ 같은 접속사를 많이 쓴다. 문장의 길이도 일정해서 읽다보면 비슷한 리듬이 반복되면서 기계적인 느낌이 든다.
AI가 쓴 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평균 이상의 문장력, 균형 잡힌 시각, 논리 정연함 등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문제는 그 글을 자신의 글로 포장할 때 생겨난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자기 글인 양 가져다 쓰는 것은 명백히 표절이지만 AI가 쓴 글을 가져다 쓰는 것은 표절로 인식하지 않는다. AI에게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고, AI 스스로 저작권을 주장하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문체는 인테리어가 아니다
AI가 사람들의 일을 대신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 글쓰기도 이미 그런 일에 속한다. 포털에는 AI가 쓴 기사가 도배되고 있다. 클릭 수가 중요하다 보니 자극적인 표현이 남용된다. 최근 연예 기사 제목에는 흔히 ‘충격’, ‘비보’, ‘오열’ 같은 낱말이 들어가는데, 이런 기사는 믿고 거르게 된다. AI의 자충수인 셈이다. 자극적인 표현에 쉽게 끌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유효한 미끼여서 한동안 계속되겠지만 클리쎄를 눈치채는 이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럼 또 다른 클리쎄가 등장해 낚시질을 이어갈 것이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말처럼 메시지를 전하는 형식에 따라 메시지는 달리 전달될 수 있다. 같은 음식도 담긴 그릇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도 말투나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내용보다 중요하듯이 글 또한 형식이 중요하다. 형식이 받쳐주지 않는 글은 힘이 없다. 글의 형식은 문법과 문체로 나타난다. 영문법의 문장 5형식처럼 문법이 글의 짜임새를 만든다면, 문체(文體)는 말 그대로 글의 ‘몸’이다. 문법에 충실한 것만으로도 글꼴(사람꼴)을 갖출 수 있지만 ‘그다움’은 문체에서 드러난다. 몸가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다움의 태가 드러나듯이 문체는 글쓴이의 됨됨이를 드러낸다.
몸의 근본은 호흡이다.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는 게 호흡이다. 호흡이 글의 내용과 형식을 이어준다. 숨이 가빠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듯이, 좋은 글은 호흡이 일정하지 않다. 리드미컬하다. 박자가 리듬과 멜로디를 연결하면서 곡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처럼 문체는 노래의 박자 같은 것이다. 문체가 받쳐주지 않는 글은 박치가 부르는 노래처럼 읽기도 듣기도 힘들다. 음악은 형식이 곧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래, 시, 산문으로 갈수록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해 보이지만, 형식이 무너지면 내용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말의 경우는 내용을 보완해주는 다른 요소들(표정이나 몸짓, 말투 등)이 있지만, 글은 오로지 글로만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말투가 있듯이 글투(문체)가 있다. 말하듯이 쓰는 글이 좋은 글이라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글의 고유한 형식이 있다. 문체는 내용으로 전하지 못하는 것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말의 내용보다 말투 같은 형식이 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할 때가 많듯이, 문체는 글의 생명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언어 속에 리듬(패턴)이 있기 때문이다.
글 꾸밈을 문체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흔히 몸 만들기 하는 이들이 눈에 보이는 근육 만들기에 치중하듯이. 골격이 바로 잡히고 속근육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근육만 키운 몸은 허우대만 멀쩡할 뿐 부실함이 금방 드러난다. 기초도 기둥도 부실한데 인테리어에 공을 들이는 격이다. 문체는 인테리어가 아니라 집의 골조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을지 목조로 지을지에 따라 집의 형태가 달라진다. 문체가 건물의 골조라면 문체의 속근육은 토대에 해당한다. 기초를 다지지 않은 집은 머지않아 여기저기 뒤틀림 현상이 나타나고 결국 무너지듯이 토대는 글의 생명력을 좌우한다. 글의 토대는 결국 글쓴이의 사람됨 그 자체다. 그의 됨됨이가 알게 모르게 글에 배어 나온다.
AI의 한계는 몸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피지컬 AI가 등장하고 있지만 그 몸은 살아 있는 몸이 아니다. 호흡을 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응하지도 못한다. 철학자 한병철의 말처럼 그 몸에는 ‘소름’이 돋지 않는다. 챗GPT 버전이 100까지 높아져도 살아 있는 아름다운 문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