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01] 경험주의와 교육_존 로크의 사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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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풀어쓴 진보교육 사상사]를 시작하며

 

모든 사상은 시대의 산물입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도 당대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요. 과거를 딛고 현재의 문제를 살피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 사상의 역할이지만, 아무리 선구적인 사상가라 할지라도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기는 힘듭니다. 모든 사상이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또한 시대적 한계를 갖는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상이 아닌 사상사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앞으로 10회에 걸쳐 로크, 루소, 페스탈로치, 오언, 듀이, 몬테소리, 슈타이너, 니일, 피아제, 비고츠키 등 진보주의 또는 자유주의 교육에 영향을 미친 서구의 대표적인 교육사상가들의 사상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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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주의와 민주주의 

 

서구 근대 사상사에서 발원지나 다름없는 존 로크의 사상이 어떻게 변주되면서 현대에 이르렀는지, 루소와 듀이를 거치면서 교육에는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오늘의 교육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철학과 교육,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상가인 로크는 학자이기 전에 현실 정치가이기도 했다. 로크가 활동하던 17세기, 왕들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유럽 대륙과 달리 영국에서는 귀족과 신흥 젠트리 계급에 의해 왕권 견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로크는 왕정에 반대한 휘그당 당수였던 샤프츠베리 백작과 함께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명예혁명(1688년) 후 50대 중반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1690년에 출간된 로크의 『교육론』은 체계적인 교육 이론서가 아니라 자녀교육에 관한 실제적인 조언을 담고 있는 부모교육서의 원조 격인 책이다. ‘교육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이란 원제처럼 (자녀)교육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백지와 같은 아이의 마음에 좋은 습관이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 자녀교육의 기본임을 강조한 로크의 교육론은 오늘날의 진보교육 관점에서 보자면 부모의 권위에 기반한 보수적인 교육론으로 비치지만, 이후 루소를 거쳐 자유주의 교육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또 오늘날 탈권위 시대의 문제들을 볼 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갓 태어난 아이의 마음은 백지 상태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본유관념 같은 것은 없으며 경험을 통해 지식과 관념이 생긴다고 보는 로크의 경험론은 민주주의와도 통한다. 계몽사상가들은 누구나 좋은 교육을 받으면 훌륭하게 될 수 있다면서 교육을 통해 편견과 무지를 일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 원리는 부르주아 계급에 한해 유효한 것이었다. 계몽사상가들 중 예외적인 인물은 루소였다. 사유재산의 사회적 기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유주의를 넘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연 사상가로 루소가 꼽히는 이유다. 몽테스키외를 비롯해 다수의 계몽사상가들이 귀족 출신 또는 부르주아임에 반해 루소는 가진 것 없는 떠돌이 사상가였기 때문일까.

국가 권력의 원천과 한계, 인민의 권리를 밝힘으로써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로크의 정치사상은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제퍼슨 같은 신대륙의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쳐 미국 독립전쟁(1776-1783)과 프랑스혁명(1789)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 국가의 존재 이유가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재산을 가진 이들이 국가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로크의 사상은 민주적이고 심지어 무정부주의적인 요소도 있지만 혁명적인 평등사상 앞에서 뒷걸음질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보수성도 있다. 휘그당이 명예혁명을 성공시킨 뒤 정치적으로 퇴보하여 보수화된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볼테르나 디드로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 선진 영국의 경험주의와 자유주의는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체계부터 세우고 보는 데카르트와 달리 뉴턴(1643~1727)은 가설을 세우지 않고 사실을 중시하여 사실을 관찰하고 측정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과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험론자들은 어떤 결과를 낳은 원인을 알면 자연을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경험주의 철학의 시조로 꼽히는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한 것처럼, 로크를 비롯한 경험론자들은 지식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이는 나중에 미국의 실용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백지 상태의 아이들 정신에 이상적인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상을 주조할 수 있다는 로크의 교육론은 경험론에 기반한 합리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경험을 재구성하여 지식의 체계를 잡아야 한다는 듀이의 교육론 역시 비슷하다. 서구의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는 서로 배척하기도 하지만 연결되는 지점이 더 많다. 관찰과 경험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의 시조 격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삼단논법 같은 연역적 추론법을 확립한 것도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콜라보를 보여준다. 과학의 시대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가 함께 열어젖힌 것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사조와 불문법, 대륙의 합리주의 사조와 성문법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문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국가를 새롭게 (합리적으로) 설계하고자 하는 사회공학적 사고가 성문법주의에 깔려 있다면, 불문법주의는 그러한 지적설계 방식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제도(법)들을 시대에 맞게 조금씩 변형(개정)하면서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영국의 경우 의회의 전통, 국왕의 특전, 법원 판례 등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이고 변형되면서 정부가 만들어진 것과 같다. 일종의 ‘브리콜라주’ 방식으로, 기존의 것들을 가지고 융통성을 발휘하면서 어찌어찌 해보는 것이다. 

계약에 의해 원하는 사회를 설계할 수 있다는 사회계약론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일종의 지적설계론에 가깝다. 신이 엿새 만에 세상을 창조한 것처럼 인간이 스스로 원하는 사회를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어떠한 사회제도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의 자유를 제약하는 합리적인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인간을 상정했다. 어떤 정부와 법체계, 어떤 경제 제도를 선택할 것인지를 정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백지 같은 아이들의 정신에 이상적인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상을 주조할 수 있다고 믿은 로크의 교육사상과도 통한다. 

보수주의의 원조로 꼽히는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혁명의 고찰』에서 이러한 사회공학은 반드시 실패한다고 주장했다.1) 그는 프랑스혁명이 내세우는 인권에 기반한 보편 원리가 역사와 전통 속에서 형성된 질서를 무너트리는 것을 경계했다. 어떤 제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미세조정이 이루어진 결과인데, 이를 갈아엎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방식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혼란과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프랑스혁명의 실패에서 입증된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이 세상을 영원히 바꿔놓은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기득권 체제는 쉽게 바뀌지 않으며 미세조정으로는 상황이 바뀔 가망성이 없을 때가 많다. 게다가 점진적인 변화를 기다리기에 인간의 일생은 너무 짧다. 인간답지 않은 삶을 사느니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인간이다. 민중혁명은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분노와 격정에 의해 일어난다. 사회에 응집된 에너지는 폭발하고 폭주하기 마련이다.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반작용의 법칙 같은 물리 법칙은 사회 현상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혁명에 이어 반동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 또한 역사의 법칙이다.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합리주의를 비판한 버크의 주장에도 합리적인 면이 있다. 버크는 전통을 무조건 옹호한 것이 아니라 미세조정과 변이를 기꺼이 허용하는 것을 전제로 전통의 유지를 주장했다. 사회제도처럼 복잡한 것을 다룰 때는 이성이 그다지 믿을 게 못 되므로 진화적인 과정에 의존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논리다.2) 인과관계를 가늠하기 어렵거나 어떤 행위와 결과 사이에 시간 지연이 큰 경우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육의 영역이 그렇다. 알트스쿨 같은 혁신적인 학교 모델이 실패한 것도 공학적인 발상이 교육에는 맞지 않음을 말해준다. 

육아의 영역 또한 이성이 전통보다 낫기가 쉽지 않다. 젊은 부모들이 야심차게 이상적인 육아를 꿈꾸며 온갖 좋은 것들을 시도하지만 결과는 신통찮기 마련이다. 1세기 전 모유보다 분유가 영양학적으로 아기에게 더 좋다고 믿었던 젊은 엄마들의 실패를 현대의 부모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한다. 공감육아 같은 새로운 육아 이론이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작용이 드러나고 또 다른 육아 이론이 득세하게 된다. 결국 자기 부모 세대의 전통 육아법에서 시대와 맞지 않거나 자신의 경험상 좋지 않았던 것들을 약간씩 바꾸는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육아문화로 자리 잡는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육아는 경험주의가 더 힘을 발휘하는 영역이다. 

 

경험주의와 자유주의

 

소련이 해체되고 5년 뒤 1996년에 영국 언론인 워손 경은 『가디언』에 기고한 칼럼에서 냉전이 로크가 옳은지 마르크스가 옳은지를 시험하는 기간이었다고 주장했다. 후쿠야마가 성급히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주장하던 시대 분위기에 어울리는 주장이었지만, 자유주의가 20세기를 휘저은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근대를 관통하는 자유주의는 오랜 봉건적 정치질서를 무너트리고 개인의 권리를 무엇보다 존중하는 자유의 이념을 체계화하여 이를 새로운 정치질서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자유주의(liberalism)’라는 단어는 19세기 초에야 등장하지만 ‘리버럴(liberal)’이란 말의 역사는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들(엄밀히 말해 귀족 자제 중 남자)을 너그러움, 공민적 정신을 지닌 리버럴한 사람으로 양성하고자 한 서구의 자유교양 교육의 전통은 2천 년 가까이 된다. 중세에 접어들어 ‘리버럴리티’는 그리스도교의 베품과 연결되면서 교회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3) 

로크는 리버럴리티를 종교적 관용과 연결 지은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가톨릭과 국교도, 비국교도 간의 갈등이 첨예하던 시절, 영국의 비국교도들은 리버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편견에 맞서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4) 그들이 비국교도를 차별하는 법의 철폐를 주장하면서 리버럴리티는 18세기 들어 종교적 관용을 넘어 정치적 의미가 가미되기 시작해 18세기 말 마침내 신대륙 미국의 헌법 안에 핵심 사상으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오랫동안 귀족의 덕성으로 간주되었던 리버럴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유산 계급인 젠트리(신사)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로크는 자신의 저술에 서명할 때 ‘신사, 존 로크’라고 적을 만큼, 젠트리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교육론 역시 귀족과 신사 계층의 자녀(소년)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동시대의 계몽사상가들처럼 로크 또한 노동을 해야 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자유교양 교육이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오성론』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은 5살부터 일을 하게 해도 괜찮다”는 말도 했다. 18세기까지도 자유주의는 신분사회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1848년 유럽 대륙을 휩쓴 혁명의 열기는 자유주의를 유럽 전역에 퍼트렸다. 혁명 이후 실권을 갖게 된 부르주아 계층은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면서 보수화되는데, 이는 자유주의의 토대였던 재산권에 내재된 분열의 싹이 움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에 침해당할 위험에 놓인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혁명의 동지들을 배반한 셈이다. 한편 사회주의와의 대결에서 변혁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세기 말엽 개인의 권리를 넘어 국민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5)가 대두했지만 점차 진보성에서 사회주의에 밀리게 된다. 

경험주의, 아동중심주의, 실용주의, 개인주의는 넓은 의미에서의 자유주의 안에 포섭되는 개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질서를 바꿔놓은 시민혁명과 사회주의혁명도 자유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주의의 역사는 곧 서구의 역사라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20세기 말에 등장한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6)는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 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구의 문화가 전 세계를 물들인 오늘날, 근대 문명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자유주의의 변천사를 탐구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육을 이해하는 데도 무엇보다 필요하다.7) 


1) 버크는 당시 누구보다 개혁적인 휘그당 자유주의자였다. 영국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고 미국 독립운동을 지지했으며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게도 평등한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혁명을 둘러싼 논쟁으로 휘그당은 보수파와 자유파로 분리되었다.(참고_『에드먼드 버크와 토마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2) 조지프 히스, 『계몽주의 2.0』, 김승진 옮김, 이마, 2016. 117-119pp.

3) 헬레나 로젠블랫,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니케북스, 2023, 40~53pp.

4) 1772년 판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liberal을 “편견, 고정 관념, 편협함으로부터의 자유: 열린 마음과 관용”으로 정의하고 있다.

5) 19세기 말에 그린, 홉하우스 등이 제창한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는 20세기 말에 대두한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와는 다른 것이다.

6) neo의 어원은 ‘부활한’ ‘후기의’ 뜻을 갖고 있는 그리스어 neos다. neo liberalism은 홉하우스의 신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 요소를 제거한 것으로 고전 자유주의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다.

7) 노명식 교수의 『자유주의의 역사』(책과함께, 2011)는 자유주의 변천사를 통해 서구 근현대사를 훑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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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병호 _ 계간《민들레》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