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주의와 실용주의
실용주의 노선을 일관되게 걸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경험주의와 실용주의의 연결 지점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실용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듀이나 로티 같은 경우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반면, 사회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실용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체로 중도 실용주의 노선을 따른다.1) 사회주의에 기울었던 듀이의 철학적 기반인 프래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해석하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하는 교육학자들도 있다. 프래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번역함으로써 의미가 왜곡되고 또한 교육과 연계되면서 실용주의 교육이 실용기술 교육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이란 용어는 ‘행동하는’ 또는 ‘실천적인’을 뜻하는 practical의 어원인 그리스어 프라그마(Πράγμα)에서 나온 것으로, 19세기 말 찰스 샌더스 퍼스가 처음 썼다. 퍼스의 동료이자 프래그머티즘의 체계를 만들고 보급한 윌리엄 제임스의 뒤를 이어 주류 사상으로 발전시키고 하나의 교육철학으로 만든 사람이 존 듀이다. 듀이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실질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느냐에 따라 진리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몇몇 교육학자는 프래그머티즘이 ‘실용주의’라는 협소한 의미로 번역되면서 듀이의 사상에 대한 오해를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2) 듀이가 유용성으로서의 진리를 말할 때 그 유용함은 실생활에서의 유용함이 아니라 어떤 관념이나 이론이 경험의 재구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유용함을 뜻한다. 지식을 그 자체가 목적이기보다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활용할 도구로 보는 관점이 프래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해석한 근거가 되었을 것으로 엄태동은 추정한다. 김태길 또한 듀이의 사상을 실용주의로 바라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비판한다.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번역하고, 속된 실리 추구를 역설하는 철학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부당하다. … 듀이가 아이디어, 사유, 지식 등을 도구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결코 좁은 의미의 실리나 실용을 위한 도구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문제가 해소되어 만족스러운 상황으로 바꾸어놓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라는 의미이다.”3)
프래그머티즘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실상 서부 개척기 시절부터 미국 사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경향성이었다. 앵글로색슨계가 주류를 이루는 미국의 사상적 기조는 대륙의 합리주의 대신 영국의 경험주의 노선을 따랐다. 인식론에서도 귀납적 방법을 주창한 경험주의 철학이 풍미하면서 정치적 평등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개개인의 경험이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는 믿음이다. 서부개척 열풍과 함께 경제적, 정치적 격동기를 겪고 있던 신대륙에서는 벤자민 프랭클린, 카네기처럼 실용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자수성가형 개인들이 여론을 선도했다. 출신이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사회, 자유분방한 개인주의가 팽배한 격동기의 미국 사회에서는 경험주의 철학이 유효했다.
실용주의와 민주주의
듀이가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은 다양한 민족과 인종으로 구성된 미국 사회를 통합하는 데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귀족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신대륙에서 민주정을 구현하는 길밖에 없기도 했다. 철인왕이나 귀족정 같은 엘리트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일반 대중의 경험과 판단을 신뢰하는 데서 출발한다. 거기에는 계약의 주체, 경험의 주체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거라는 신뢰,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배울 거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개개인의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는 개인주의로 이어진다.
유용성과 공리성은 계몽주의 사상의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기만 해도 자유교양 교육은 귀족과 신사 계층을 위한 것이었고, ‘비천한’ 사람들에게는 실용 기술과 수공업 기술 교육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시대 공자의 6예가 양반들을 위한 것이었고, 실용 학문은 중인 계급의 전유물이었으며 수공업은 ‘상놈’들이 맡았던 것과 비슷하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실용주의가 등장한 것은 신분이 사라진 신대륙에서 대중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것과 궤를 같이한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실용적인 교육을 자유교양 교육과 나란히 놓게 된 것이다. 실용주의 정신은 민주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로크와 루소, 듀이에게 공통되는 민주주의와 경험주의 사상은 평범한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고 있고, 이는 모든 진보적 사상이 공유하고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진보교육이 민주주의와 경험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듀이의 경험주의와 실용주의 교육관은 미국의 반지성주의 문화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아동의 경험과 성장을 중시하는 듀이의 철학이 의도치 않게 교육과정에 혼란을 주고 교육목표를 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4) 진보주의 교육이 반지성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경고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해보면서 배운다’는 배움의 원리는 학습동기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경험의 세계를 넘어 보편 원리를 터득하도록 이끌기는 힘들다. 사과가 떨어지는 광경을 본 사람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 현상에서 중력을 유추한 사람은 뉴턴이 처음이었다. 현상세계에 대한 관측과 경험에 근거해 연역적 추론을 거쳐 하나의 원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경험주의는 합리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뉴턴처럼 사고할 수 있으려면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사실 듀이가 강조한 ‘경험의 재구성’도 논리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듀이의 사상을 받아들인 진보교육은 대체로 ‘해보면서 배우는’ 것을 강조할 뿐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력을 길러주는 교육은 소홀히 해왔다.
아동중심 학교교육의 등장
듀이의 교육론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초 격변하던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민주주의 정신에 따라 공교육이 중등 과정까지 확대되면서 1890년 당시 36만여 명이던 고교생이 1910년에는 110만 명, 1930년대에는 480만 명으로 급증했다. 게다가 그중 절반 이상이 이민 2세였다. 교육기관 역할과 함께 보호기관 역할도 해야 했던 학교는 가능한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를 그만두지 않도록 학생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교육과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아동의 흥미에 기반한 교육 이론이 각광받기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다.
전통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신대륙에서는 아이들을 하나님과 가까운 존재로 바라보는 아동관이 자리잡았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바람을 타고 퍼지기 시작한 정치적 평등주의에 기반해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신대륙의 신앙심 깊은 지식인들은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자동차를 비롯해 각종 산업이 빠르게 발달하고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실용적인 지식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정치적 평등주의와 종교적 복음주의, 사업에서의 실용주의를 교육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미국인들에게 듀이의 사상은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아동중심교육을 구현한 서머힐이 영국에 자리잡을 무렵 미국에서는 존 듀이의 교육론이 제도교육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정한 목표가 아니라 아이들의 흥미에 초점을 맞춘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듀이가 시카고대학교에 설립한 실험학교를 비롯해 다양한 실험학교들이 생겨났으며 일반학교 안에서도 실험교실을 운영하는 곳들이 곳곳에 생겨났다. 아동중심, 생활중심의 교육을 주장한 루소의 교육관은 듀이에 의해 처음으로 학교교육에서 체계적으로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아이의 타고난 본성을 해치지 않음으로써 좋은 시민이 될 수 있게 교육하고자 했던 루소의 이상은 19세기 동안 서구의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아동중심의 교육관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1909년 스웨덴의 페미니스트 엘렌 케이가 쓴 『어린이의 세기(世紀)』라는 책은 아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획기적으로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듀이의 공헌은 루소 이후 서구 세계에 퍼지기 시작한 아동중심 사상을 실용주의 철학과 박애주의에 기반한 민주적인 사회개혁의 요구와 연결했다는 데 있다.
듀이는 교육을 심리학과 사회학 두 차원에서 탐구하면서 둘을 연결시키고자 했다.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면서 지식이 점점 중요해진 시대에 지식과 행동을 별개로 보는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아동과 기성사회의 분리와 대립을 넘어 교육과 사회개혁의 연결 고리를 찾고자 했다. 전통적인 계급사회에서는 지식 계급과 노동 계급이 나뉘어 지식과 행위가 분리되었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직능에 필요한 지식을 갖추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듀이에게 민주주의와 교육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페레로(David J. Ferrero)는 20세기 교육을 “진보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 사이의 100년 전쟁”이라고 말했다. 진보주의 교육과 전통주의 교육의 입장 차이는 인간의 인식 작용에서 두 가지 주요 원천인 ‘경험’과 ‘이성’ 중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뭔가를 배우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이성 모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진보주의 교육자들은 대체로 경험을 중시하고, 전통주의 교육자들은 이성을 중시하는 편이다. 경험주의를 따르는 진보주의자들이 아이들의 개별성에 주목한다면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전통주의자들은 인간의 보편성에 기반하여 교육 문제를 바라보는 편이다.
존 듀이 교육론의 딜레마
듀이는 교육을 끝없이 성장하는 삶 그 자체로 보았다. 그리고 경험의 재구성과 성장으로서의 교육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 형태로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듀이는 방향성 없는 교육을 옹호하지 않았지만 “교육이란 성장 자체이며 더욱 성장하기 위한 더 많은 교육 말고 교육의 목표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딜레마에 빠졌다.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듀이는 개인의 성장을 통해 민주적인 사회가 구현될 거라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지만,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성장이 곧 조화로운 사회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5)
하루가 다르게 과학기술이 발달하던 시대, 참정권이 확대되면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어가던 신대륙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듀이 또한 진보에 대해 낙관한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후대의 교육자들은 교육이 사회의 진보나 개혁의 방법이 되기를 바라면서 교육을 아이들의 욕구와 본성에 맡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도토리 속에 참나무가 들어 있듯 본성이 방해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성장하면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다. 모든 도토리가 참나무로 자라지는 못한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대부분의 도토리는 돼지 먹이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어른의 권위에서 해방된다고 해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른의 권위에서 자유로워진 대신 또래의 문화적 압박에 순응하는 경향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어린이의 본성에 따른 성장에 대한 신념은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 교사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사회의 재건을 함께 도모하는 교육을 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듀이의 교육론을 비판하는 이들은 아동의 흥미와 실천에 근거한 교육이 사회의 문화적 유산을 후대에 전하는 데 어려움을 낳고, 너무 많은 학생들이 수학과 과학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보았다.6)
교육을 성장 그 자체로 생각한 듀이에게 교육의 궁극 목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듀이는 어른들이 교육의 목표를 세우는 것을 반대하고 “학습목적을 정하는 데 학생들 스스로 참여하고 학습과정에서 활동 방향을 스스로 정할” 것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어린아이들이 이런 작업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듀이 자신이 말했듯이 “목표를 설정하는 일은 꽤나 복잡하고 지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 속에 담긴 이런 이율배반적 요소들 때문에 듀이의 사상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듀이는 외적인 보상이나 처벌은 학습동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교육은 아이의 흥미와 욕구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수학에 흥미를 느끼기란 쉽지 않으며 대부분의 학습은 지루함과 난관을 뚫고 나아가야만 일정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 듀이 또한 초기에는 학생들의 흥미에 기반해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는 이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려 한 이들을 비판하면서 학교 교육과정에 체계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1930년대 이후 듀이 스스로 이전의 견해를 수정한 발언을 꾸준히 내놓았음에도 그의 교육사상이 왜곡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듀이는 1900년에 펴낸 『학교와 사회』 이후 195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반세기 동안 40여 권의 책과 500여 편의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논지를 조금씩 수정해갔다. 스스로 “경험과 사유의 재구성”을 보여준 셈이다. 또한 그의 문체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 교육자나 연구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관점에서 듀이의 사상을 해석하고 적용하기도 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진보주의 교육을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 듀이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더 나은 교육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 듀이의 사상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가 『경험과 교육』을 마무리하며 남긴 말에서처럼 아이들의 성장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새로운 교육 대 낡은 교육, 진보주의 교육 대 전통주의 교육도 아니며, 교육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교육이다. 도대체 무엇이 교육이고, 그런 교육이 그저 이름이나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되기 위해서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지를 찾고자 전념할 때 우리는 확실하고 더 빠른 진보를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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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듀이는 사회주의 국가와도 인연이 깊다. 1919년 중국 군벌 옌시산의 초빙으로 중국에서 강연한 적이 있으며,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소련에서 추방된 후 열린 궐석재판에서 국가 전복 혐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자 트로츠키 측에서 위촉한 민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혐의가 근거 없음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듀이의 제자였던 후스(胡適)는 현대 중국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엄태동 역저, 『존 듀이의 경험과 교육』, 박영스토리, 2019, 167~176쪽.
3) 김태길, 존 듀이의 사회철학, 명문당, 1990, 67-68쪽.
4)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5부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 참조.
5) 리처드 호프스테터는 이를 예정조화설에 가까운 믿음이라고 말한다.(위의 책 515쪽)
6) 윌리엄 헤이스, 『진보주의 교육운동사』, 심성보 외 옮김, 살림터, 2021. 48쪽.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닉’ 쇼크로 인해 미국은 과학교육 예산을 다섯 배나 늘리고 지식 교육을 강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공교육에서 진화론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경험주의와 실용주의
실용주의 노선을 일관되게 걸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경험주의와 실용주의의 연결 지점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실용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듀이나 로티 같은 경우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반면, 사회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실용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체로 중도 실용주의 노선을 따른다.1) 사회주의에 기울었던 듀이의 철학적 기반인 프래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해석하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하는 교육학자들도 있다. 프래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번역함으로써 의미가 왜곡되고 또한 교육과 연계되면서 실용주의 교육이 실용기술 교육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이란 용어는 ‘행동하는’ 또는 ‘실천적인’을 뜻하는 practical의 어원인 그리스어 프라그마(Πράγμα)에서 나온 것으로, 19세기 말 찰스 샌더스 퍼스가 처음 썼다. 퍼스의 동료이자 프래그머티즘의 체계를 만들고 보급한 윌리엄 제임스의 뒤를 이어 주류 사상으로 발전시키고 하나의 교육철학으로 만든 사람이 존 듀이다. 듀이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실질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느냐에 따라 진리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몇몇 교육학자는 프래그머티즘이 ‘실용주의’라는 협소한 의미로 번역되면서 듀이의 사상에 대한 오해를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2) 듀이가 유용성으로서의 진리를 말할 때 그 유용함은 실생활에서의 유용함이 아니라 어떤 관념이나 이론이 경험의 재구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유용함을 뜻한다. 지식을 그 자체가 목적이기보다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활용할 도구로 보는 관점이 프래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해석한 근거가 되었을 것으로 엄태동은 추정한다. 김태길 또한 듀이의 사상을 실용주의로 바라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비판한다.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번역하고, 속된 실리 추구를 역설하는 철학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부당하다. … 듀이가 아이디어, 사유, 지식 등을 도구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결코 좁은 의미의 실리나 실용을 위한 도구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문제가 해소되어 만족스러운 상황으로 바꾸어놓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라는 의미이다.”3)
프래그머티즘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실상 서부 개척기 시절부터 미국 사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경향성이었다. 앵글로색슨계가 주류를 이루는 미국의 사상적 기조는 대륙의 합리주의 대신 영국의 경험주의 노선을 따랐다. 인식론에서도 귀납적 방법을 주창한 경험주의 철학이 풍미하면서 정치적 평등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개개인의 경험이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는 믿음이다. 서부개척 열풍과 함께 경제적, 정치적 격동기를 겪고 있던 신대륙에서는 벤자민 프랭클린, 카네기처럼 실용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자수성가형 개인들이 여론을 선도했다. 출신이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사회, 자유분방한 개인주의가 팽배한 격동기의 미국 사회에서는 경험주의 철학이 유효했다.
실용주의와 민주주의
듀이가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은 다양한 민족과 인종으로 구성된 미국 사회를 통합하는 데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귀족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신대륙에서 민주정을 구현하는 길밖에 없기도 했다. 철인왕이나 귀족정 같은 엘리트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일반 대중의 경험과 판단을 신뢰하는 데서 출발한다. 거기에는 계약의 주체, 경험의 주체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거라는 신뢰,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배울 거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개개인의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는 개인주의로 이어진다.
유용성과 공리성은 계몽주의 사상의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기만 해도 자유교양 교육은 귀족과 신사 계층을 위한 것이었고, ‘비천한’ 사람들에게는 실용 기술과 수공업 기술 교육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시대 공자의 6예가 양반들을 위한 것이었고, 실용 학문은 중인 계급의 전유물이었으며 수공업은 ‘상놈’들이 맡았던 것과 비슷하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실용주의가 등장한 것은 신분이 사라진 신대륙에서 대중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것과 궤를 같이한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실용적인 교육을 자유교양 교육과 나란히 놓게 된 것이다. 실용주의 정신은 민주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로크와 루소, 듀이에게 공통되는 민주주의와 경험주의 사상은 평범한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고 있고, 이는 모든 진보적 사상이 공유하고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진보교육이 민주주의와 경험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듀이의 경험주의와 실용주의 교육관은 미국의 반지성주의 문화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아동의 경험과 성장을 중시하는 듀이의 철학이 의도치 않게 교육과정에 혼란을 주고 교육목표를 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4) 진보주의 교육이 반지성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경고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해보면서 배운다’는 배움의 원리는 학습동기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경험의 세계를 넘어 보편 원리를 터득하도록 이끌기는 힘들다. 사과가 떨어지는 광경을 본 사람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 현상에서 중력을 유추한 사람은 뉴턴이 처음이었다. 현상세계에 대한 관측과 경험에 근거해 연역적 추론을 거쳐 하나의 원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경험주의는 합리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뉴턴처럼 사고할 수 있으려면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사실 듀이가 강조한 ‘경험의 재구성’도 논리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듀이의 사상을 받아들인 진보교육은 대체로 ‘해보면서 배우는’ 것을 강조할 뿐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력을 길러주는 교육은 소홀히 해왔다.
아동중심 학교교육의 등장
듀이의 교육론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초 격변하던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민주주의 정신에 따라 공교육이 중등 과정까지 확대되면서 1890년 당시 36만여 명이던 고교생이 1910년에는 110만 명, 1930년대에는 480만 명으로 급증했다. 게다가 그중 절반 이상이 이민 2세였다. 교육기관 역할과 함께 보호기관 역할도 해야 했던 학교는 가능한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를 그만두지 않도록 학생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교육과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아동의 흥미에 기반한 교육 이론이 각광받기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다.
전통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신대륙에서는 아이들을 하나님과 가까운 존재로 바라보는 아동관이 자리잡았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바람을 타고 퍼지기 시작한 정치적 평등주의에 기반해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신대륙의 신앙심 깊은 지식인들은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자동차를 비롯해 각종 산업이 빠르게 발달하고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실용적인 지식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정치적 평등주의와 종교적 복음주의, 사업에서의 실용주의를 교육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미국인들에게 듀이의 사상은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아동중심교육을 구현한 서머힐이 영국에 자리잡을 무렵 미국에서는 존 듀이의 교육론이 제도교육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정한 목표가 아니라 아이들의 흥미에 초점을 맞춘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듀이가 시카고대학교에 설립한 실험학교를 비롯해 다양한 실험학교들이 생겨났으며 일반학교 안에서도 실험교실을 운영하는 곳들이 곳곳에 생겨났다. 아동중심, 생활중심의 교육을 주장한 루소의 교육관은 듀이에 의해 처음으로 학교교육에서 체계적으로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아이의 타고난 본성을 해치지 않음으로써 좋은 시민이 될 수 있게 교육하고자 했던 루소의 이상은 19세기 동안 서구의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아동중심의 교육관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1909년 스웨덴의 페미니스트 엘렌 케이가 쓴 『어린이의 세기(世紀)』라는 책은 아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획기적으로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듀이의 공헌은 루소 이후 서구 세계에 퍼지기 시작한 아동중심 사상을 실용주의 철학과 박애주의에 기반한 민주적인 사회개혁의 요구와 연결했다는 데 있다.
듀이는 교육을 심리학과 사회학 두 차원에서 탐구하면서 둘을 연결시키고자 했다.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면서 지식이 점점 중요해진 시대에 지식과 행동을 별개로 보는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아동과 기성사회의 분리와 대립을 넘어 교육과 사회개혁의 연결 고리를 찾고자 했다. 전통적인 계급사회에서는 지식 계급과 노동 계급이 나뉘어 지식과 행위가 분리되었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직능에 필요한 지식을 갖추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듀이에게 민주주의와 교육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페레로(David J. Ferrero)는 20세기 교육을 “진보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 사이의 100년 전쟁”이라고 말했다. 진보주의 교육과 전통주의 교육의 입장 차이는 인간의 인식 작용에서 두 가지 주요 원천인 ‘경험’과 ‘이성’ 중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뭔가를 배우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이성 모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진보주의 교육자들은 대체로 경험을 중시하고, 전통주의 교육자들은 이성을 중시하는 편이다. 경험주의를 따르는 진보주의자들이 아이들의 개별성에 주목한다면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전통주의자들은 인간의 보편성에 기반하여 교육 문제를 바라보는 편이다.
존 듀이 교육론의 딜레마
듀이는 교육을 끝없이 성장하는 삶 그 자체로 보았다. 그리고 경험의 재구성과 성장으로서의 교육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 형태로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듀이는 방향성 없는 교육을 옹호하지 않았지만 “교육이란 성장 자체이며 더욱 성장하기 위한 더 많은 교육 말고 교육의 목표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딜레마에 빠졌다.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듀이는 개인의 성장을 통해 민주적인 사회가 구현될 거라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지만,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성장이 곧 조화로운 사회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5)
하루가 다르게 과학기술이 발달하던 시대, 참정권이 확대되면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어가던 신대륙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듀이 또한 진보에 대해 낙관한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후대의 교육자들은 교육이 사회의 진보나 개혁의 방법이 되기를 바라면서 교육을 아이들의 욕구와 본성에 맡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도토리 속에 참나무가 들어 있듯 본성이 방해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성장하면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다. 모든 도토리가 참나무로 자라지는 못한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대부분의 도토리는 돼지 먹이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어른의 권위에서 해방된다고 해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른의 권위에서 자유로워진 대신 또래의 문화적 압박에 순응하는 경향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어린이의 본성에 따른 성장에 대한 신념은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 교사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사회의 재건을 함께 도모하는 교육을 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듀이의 교육론을 비판하는 이들은 아동의 흥미와 실천에 근거한 교육이 사회의 문화적 유산을 후대에 전하는 데 어려움을 낳고, 너무 많은 학생들이 수학과 과학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보았다.6)
교육을 성장 그 자체로 생각한 듀이에게 교육의 궁극 목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듀이는 어른들이 교육의 목표를 세우는 것을 반대하고 “학습목적을 정하는 데 학생들 스스로 참여하고 학습과정에서 활동 방향을 스스로 정할” 것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어린아이들이 이런 작업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듀이 자신이 말했듯이 “목표를 설정하는 일은 꽤나 복잡하고 지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 속에 담긴 이런 이율배반적 요소들 때문에 듀이의 사상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듀이는 외적인 보상이나 처벌은 학습동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교육은 아이의 흥미와 욕구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수학에 흥미를 느끼기란 쉽지 않으며 대부분의 학습은 지루함과 난관을 뚫고 나아가야만 일정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 듀이 또한 초기에는 학생들의 흥미에 기반해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는 이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려 한 이들을 비판하면서 학교 교육과정에 체계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1930년대 이후 듀이 스스로 이전의 견해를 수정한 발언을 꾸준히 내놓았음에도 그의 교육사상이 왜곡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듀이는 1900년에 펴낸 『학교와 사회』 이후 195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반세기 동안 40여 권의 책과 500여 편의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논지를 조금씩 수정해갔다. 스스로 “경험과 사유의 재구성”을 보여준 셈이다. 또한 그의 문체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 교육자나 연구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관점에서 듀이의 사상을 해석하고 적용하기도 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진보주의 교육을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 듀이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더 나은 교육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 듀이의 사상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가 『경험과 교육』을 마무리하며 남긴 말에서처럼 아이들의 성장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새로운 교육 대 낡은 교육, 진보주의 교육 대 전통주의 교육도 아니며, 교육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교육이다. 도대체 무엇이 교육이고, 그런 교육이 그저 이름이나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되기 위해서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지를 찾고자 전념할 때 우리는 확실하고 더 빠른 진보를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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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듀이는 사회주의 국가와도 인연이 깊다. 1919년 중국 군벌 옌시산의 초빙으로 중국에서 강연한 적이 있으며,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소련에서 추방된 후 열린 궐석재판에서 국가 전복 혐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자 트로츠키 측에서 위촉한 민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혐의가 근거 없음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듀이의 제자였던 후스(胡適)는 현대 중국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엄태동 역저, 『존 듀이의 경험과 교육』, 박영스토리, 2019, 167~176쪽.
3) 김태길, 존 듀이의 사회철학, 명문당, 1990, 67-68쪽.
4)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5부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 참조.
5) 리처드 호프스테터는 이를 예정조화설에 가까운 믿음이라고 말한다.(위의 책 515쪽)
6) 윌리엄 헤이스, 『진보주의 교육운동사』, 심성보 외 옮김, 살림터, 2021. 48쪽.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닉’ 쇼크로 인해 미국은 과학교육 예산을 다섯 배나 늘리고 지식 교육을 강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공교육에서 진화론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