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03] 교육 문제는 교육적으로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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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서비스가 아니다 

 

탕후루가 유행하던 때 경남 창녕의 한 초등 학부모가 국민신문고에 “아이가 유튜브로 탕후루 제조 영상을 보고 집에서 직접 만들다가 화상을 입었다”면서 민원을 넣었다. “제발 집에서 탕후루 만들지 말라고 학교에서 경각심을 일깨워줬으면 좋겠다”며 ‘탕후루 관련 안전교육 실시’를 민원 취하 조건으로 내걸었다. 아이가 집에서 화상을 입은 것은 부모의 방임 탓이지 학교의 책임이 아니다. 그럼에도 경남교육청은 민원인의 요구대로 안전교육 요청 공문을 관내 모든 학교에 보냈다. 

민원제일주의가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행정서비스헌장 제도가 도입되면서다. 1991년 영국이 도입한 시민헌장(Citizen’s Charter)은 행정을 규제와 절차 중심에서 고객과 결과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행정에 경쟁과 경영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1998년 국민의정부에서 도입해 2000년에 모든 행정기관으로 확산되었다. 각 행정부처와 기관들이 서비스의 기준과 내용 그리고 부적절한 서비스에 대한 시정과 보상조치 등에 대한 규정을 공표하고 고객만족도를 조사해 발표하면서 시정조치를 해왔다. 

국가 행정이 지향하는 것이 규제가 아닌 서비스라는 발상의 전환은 진일보한 사회정책이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이 만만찮은 것이 현실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기업처럼 고객의 비위를 맞추게 되면서 민원이 폭증하고, 공무원들이 민원인에 쩔쩔 매는 상황이 벌어졌다. 각 시도교육청이 교육행정서비스헌장을 공포하고 홈페이지에 민원 창구를 개설하자 교육 현장에도 민원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진상 고객이 업주의 약점을 알고 갑질을 하듯이 진상 민원인은 평가에 예민한 공무원의 약점을 알고 권력 행사를 한다. 

인간의 보편성보다 개별성에 주목하는 시대, 개인의 인권이 강조되는 시대에 시민의식이 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권리의식이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아동학대방지법과 아동복지법이 강화되고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서 학생 인권을 빌미로 교사의 교권은 물론, 인권까지 침해하고 교육활동을 방해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과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므로 정책 입안자는 신중하게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민원제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힘없는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지만 그것을 남용 또는 악용하는 이들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행정이 민원에 휘둘리게 되는 배경에는 행정서비스헌장제도나 직선제 같은 민주적인 제도가 있다. 표에 민감한 선출직들은 민원에도 민감하다. 선거제도가 민원제일주의를 부추긴다. 고객중심, 수요자중심 논리는 공공성이나 보편성보다 개인 인권, 개별성을 우선하는 것이다. 좋은 의도로 기획된 제도일지라도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부작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것이 실력이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제도가 아니라 최악을 막는 제도다. 

오늘날에는 ‘기분상해죄’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자신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침해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아이들도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에 바쁘다. 교실에서도 여차하면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증거 자료를 위한 녹취 모드가 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급급한 이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는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니다. 저마다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선택이 오히려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 셈이다. 

 

민원제일주의와 법만능주의

 


민주사회는 법이 지배하는 사회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하는 법의 지배는 현실에서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불평등한 법치사회의 실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교육 현장도 다르지 않다. 재력 또는 권력 있는 부모들은 자녀의 학폭 사건을 쉽게 무마시키곤 한다. 법을 아는 이들일수록 법의 허점을 이용한다. 한국사회에서 ‘법비(法匪)’라 불리는 법조인들은 사적 이익을 위해 법을 이용하는 공인 비적떼나 다름없다. 최근 내란 사태에서 그들의 면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재력이나 권력의 유무를 떠나 법치사회에 내재된 치명적인 문제는 만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게 만든다는 점이다.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흔히 벌어지는 일처럼 잘못을 먼저 인정하는 쪽이 법적 책임을 더 많이 지게 되기 때문이다.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사과하면 지는 거다’가 상식처럼 되어 누구도 먼저 사과하지 않고 법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전념하게 된다. 사회적 관습이나 상식에 기반해 풀 수 있는 문제도 흔히 ‘법대로 하자’면서 법의 힘을 빌어 풀려고 한다. 법치사회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갈등 해결 능력을 떨어트린다. 

이는 교육 현장도 예외가 아니다. 민원제일주의는 법만능주의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교육 현장을 초토화시킨다. 민원에 시달리는 교사들도 사법 시스템에 의지하게 된다. 교육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사법 문제로 바뀌고 만다. 최근 변호사 업계에서는 학폭 전문 변호사들이 성업 중이다. 학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열린 것이다. 서울시교육청 관내만 해도 2천여 건의 학폭 사건이 재판 계류중이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무런 교육적 조치 없이 법적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이는 사실상 교육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 ‘싸우면서 친해진다’ 같은 말을 예전에는 쉽게 들을 수 있었지만, 학교폭력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이제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 금기시되는 분위기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은 ‘싸움’이라기보다 ‘괴롭힘’이다. 사실 주먹싸움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부모만 나서지 않는다면). 설령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싸움일지라도 맞짱을 뜨는 것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싸움에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살아가면서 해볼 만한 경험이다. 

미국의 대안학교 알바니프리스쿨은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몸싸움하는 것을 금기시하지 않는다. “두 아이가 서로 간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치고받고 싸울 때, 그 싸움이 공정하고 또 상대방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게 아니면 계속하도록 허용한다. 가까이에 어른 한 명이 있으면서 안전한지 확인도 하고, 필요하다면 그 결투에서 서로 완결의 느낌을 갖고 화해에 이르도록 도움을 준다.”(『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48쪽) ‘경험의 정치역학’이라 부르는 지점에 아이들 스스로 도달하도록 돕는 것을 중요한 교육과정의 하나로 여기는 교육철학이 50년이 넘도록 지켜지고 있다. 

‘경험의 정치역학’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힘의 불균형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이보다 중요한 배움도 드물 것이다. ‘눈탱이’가 붓고 코피를 좀 흘려도 싸움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코피는 금방 멎고 부기는 쉽게 빠진다. 멍은 좀 더 오래가지만 부끄러워할 건 아니다. 주먹질을 장려할 일은 아니지만, 싸워야 할 때와 피해야 할 때,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분간할 줄 아는 판단력과 결단력은 살아가는 데 소중한 덕목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주먹다짐도 괴롭힘도 교육으로 풀어야 할 문제지 법과 경찰에 의지할 문제가 아니다. 교육을 포기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제도를 운용해서는 안 된다. 교육은 아이들의 성장을 도움으로써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법에 기대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급급한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사회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어떤 아이들을 기르고자 하는지,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교육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