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04] 왜 교육개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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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성을 강화하는 교육의 위험성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찰, 사법, 언론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교육개혁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교육 문제가 그보다 심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개혁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우리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공약이 주목을 끌고 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일뿐더러 실현이 된다 해도 학력·학벌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긴 힘들 것이다. 교육은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이미 계층사회로 접어든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계급 재생산의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 

부모 잘 만난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기회와 권리를 누려온 것은 동서고금 모든 사회의 오랜 관행이었다. 거기에 저항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지만 귀족계급이 누리던 것을 부르주아도 누릴 수 있게 되었을 따름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급격한 근대화를 거치면서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이 지나가고 계층 간의 벽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입시중심 교육은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지만 사회 환경이 바뀐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에는 공부 잘하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시험 한 번 잘 봐서 서울대도 가고 사법시험도 패스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입시중심 교육의 커다란 장점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문제가 있으면 해법도 있기 마련이다. 서둘러 해답을 찾기 전에 먼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공교육은 무엇보다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교육개혁의 방향 또한 그쪽으로 맞춰져야 한다. ‘역량중심 교육’이라는 OECD 교육국의 권고를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것이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국적 기업의 유능한 인재는 어느 국가에 도움이 될까.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식 경제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가속시킴으로써 사회불안을 야기한다. 자율성을 부추기는 교육 또한 능력주의 사회를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현재 우리 교육은 1995년에 나온 5.31 교육개혁안의 자장 속에 있다. 이 개혁안은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세계화 전략 속에서 김영삼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대비해 ‘수요자중심’의 교육철학 위에 세운 것이다. 이에 기반해 1997년에 나온 7차 교육과정은 “국가 수준의 공통성(보편성)과 지역‧학교‧개인 수준의 다양성(개별성)을 동시에 추구하며 학습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신장하기 위한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을 천명하고 있다. 이 교육과정은 여러 차례 개정되었지만 현재까지 공교육의 뼈대를 이룬다.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권을 늘이는 것이 과연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낼까? 자율성이라는 가치를 높이 사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근대문명에 내재된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는 능력 있는 이들의 자유를 강화하는 데 더 기여해왔다. 생태계에서 가장 유능한 종인 호모 사피엔스의 권리를 위해 다른 수많은 종들의 생명권이 위협받고 있듯이, 자유주의는 유능한 인간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 사회주의나 생태주의가 견제 역할을 맡지만 역부족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능력주의가 ‘공정’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이 현실이다. 낙수효과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고교학점제의 부작용

 

60년대 이후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표준화 교육과 입시중심 교육의 부작용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지난 30여 년 동안 교육개혁이 추진되어왔다. 자율성과 창의성 같은 역량을 키우고자 큰 틀에서 개별화 교육을 강화하면서 선택의 기회를 넓히고 다양성을 살리는 개혁은 진보적 정책으로 이해되어왔다. 올해부터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되고 있는 고교학점제도 그 연장선에 있다. 고등학생들이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사실은 수능 시험에 유리한) 과목을 선택해 교실을 옮겨 다니며 수업을 듣고 학점을 이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국영수 비중을 줄이고 세계사,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생물) 외 많은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전환했다. 

사실 국영수 비중이 이렇게 높아야 할 이유가 없다.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서 국영수 비중이 조금 줄었지만 더 줄어도 괜찮을 것이다(다만 초등 교과에서 기초 문해력 교육을 강화해 국어 시간을 늘인 것은 적절한 조치일 수 있다). 국영수 신화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보다 예체능 시간을 늘여야 한다. 또한 세계사를 선택이 아니라 필수 교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적어도 문명국의 시민이라면 인류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과 자기가 속한 나라가 인류 역사의 좌표에서 어디쯤 서 있는지 맵핑할 수 있는 시야를 갖는 것은 지성을 일깨우는 데 무엇보다 필요하다.(세계사와 한국사 과목을 분리할 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자국 역사를 배울 수 있게 교육과정을 재편할 필요가 있다.) 

고교학점제를 시행하는 미국이나 북유럽의 고등학교는 크기가 소규모 대학 수준이어서 다양한 예술·체육 활동이 가능하다. 또한 비인기 과목이라도 20명 정도는 선택하는 학생들이 있으므로 다양한 과목을 개설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비인기 과목은 쉽게 폐강되며, 도시의 자사고 등은 다양한 과목을 제공할 수 있지만 시골 공립학교는 인프라 부족으로 개설할 수 있는 과목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 선택의 기회가 결코 공정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셈이다. 

5.31 개혁안의 ‘수요자중심’ 패러다임을 넘어설 때다. 수요자중심주의는 개인주의와 맞물려 보편성보다 개별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교육정책을 만들어낸다. 표준화 교육과 입시중심 교육의 부작용을 줄이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부정적인 면이 더 두드러진다. 한국 사회에서 자율성에 기반한 수요자중심은 결국 입시중심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저마다 자신의 행위 결과(성적)에 책임을 져야 하며, 학교와 교사는 수요자의 요구에 맞춰 (입시에 유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육붕괴 현상은 수요자중심 원리로 인한 바가 크다.

개별화 교육을 강조하는 현재의 고교학점제는 아이들의 성장에도 우리 교육의 질적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험에 유리한 교과를 선택하도록 부추기고 학급 개념을 해체해 학생들을 더욱 개별화시킬 것이다. 가뜩이나 스마트폰과 디지털 세상에서 점점 개별화되어가는 시대에 개별성을 부추기는 교육은 바람직하지 않다. 학습자중심, 수요자중심 논리가 교육 불가능의 현실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살펴야 할 때다. 많은 교사들이 ‘아무것도 안 하기’를 택하기에 이른 오늘날의 교육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_현병호(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