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
높은 곳에서 자꾸만 떨어진다. 아이들이. 지난 6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세 아이가 한날한시, 한곳에서 떨어져 내린 일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2주 후 서울의 학원 옥상에서, 그로부터 닷새 후엔 경기도 광주의 빌딩 옥상에서 또 다른 아이가 추락해 생을 마감했다.
충격적인 사건에 이 사회는 어찌 이리 비정할 만큼 잠잠한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최근 개정된 자살예방보도 준칙에 이런 문항이 있단다. ‘자살 사건은 가급적 보도하지 않는다(1항).’ 비슷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해서 생긴 조항일 것이다. 청소년 자살의 경우 유가족이나 학교가 언론보도를 원치 않아서 묻혀버리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국인이 1만4천여 명이고, 그중 청소년이 221명이다. 이 사건을 일일이 보도한다면 뉴스는 거의 날마다 자살 소식으로 뒤덮일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청소년 자살이 10여 년 만에 두 배 넘게 증가했다는 건 이상 징후이며 강력한 경고성 신호다. 편차가 있는 다른 연령대와 달리, 13년째 한국의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굳건하게 ‘자살’이다.(2023년 기준 46.1%) 계속해서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는 연령대도 10대가 유일하다. 이쯤 되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집계된 숫자 너머, 셀 수 없이 더 많은 아이들이 죽고 싶은 마음을 품은 채 하루하루 견디고 있을 테다.
한 기사를 읽다가 숨이 막혔다. 서울시교육감이 ‘학생을 살리는 교육’을 주제로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 참석한 교사는 “(정신병동) 입원 병상을 구하지 못해 아이들이 적기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읍소한다. “서울에선 도저히 병상을 구할 수 없어 구리나 고양 등 수도권에서 물색해 보지만 그마저도 없어 병결 처리해 집에서 상담과 치료를 받는 학생들이 상당수”라고 했다.1) 위급 환자가 줄을 섰는데 병상이 모자란 건 전쟁통이나 재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 아닌가. 오늘의 청소년들의 정신건강 문제는 필시 사회적 재난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단호히 말한다.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회적 조건이 자살률을 규정한다고. “어느 한 시기에 그 사회의 정신적 상태가 일시적인 자살의 빈도를 결정한다. 따라서 각 사회는 그 국민을 자살로 이끄는 일정한 양의 에너지로 이루어진 집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자살자의 행동은 얼핏 보기엔 개인적 기질을 나타내지만 실은 그들이 외적으로 표출하는 사회적 조건의 보완이며 연장인 것이다.”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392쪽) 죽은 아이들, 죽고 싶은 아이들이 보내는 이 위태로운 신호를 긴급한 사회적 경고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제 탓으로 돌리는 아이들
요즘 사춘기 아이들은 반항을 잘 하지 않는다. 예전의 청소년들처럼 분노하며 들이대거나 저항하는 일도 드물다. 부모의 넘치는 관심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제 탓으로 돌리며 속으로 앓는다. 경쟁으로 줄 세우며 차별 받기 싫으면 능력을 갖추라 달달 볶는 이 사회를 원망조차 않는다.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그 결과는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다가온다.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생을 끝내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탓하며 마지막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다.
많은 이들이 청소년 자살 대책으로 경쟁교육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학업 스트레스가 아이들 고통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맞으나 단언하긴 어렵다.2) 청소년 자살 원인을 밝히는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략의 분석을 보면 학업 스트레스보다 대인관계가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대인관계는 친구관계, 학교폭력, 왕따, 가족 관계 등을 포괄할 것이다.
학업 스트레스와는 거리가 먼 대안학교 아이들의 자살 소식도 더러 들려온다. 내게도 말로 꺼내기 힘든 이별의 경험이 있다. 대안학교에서 담임 했던 아이의 부고를 듣고 달려간 장례식장. 무슨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 주저앉은 부모를 끌어안고 같이 통곡할 뿐이었다. 부모는 내게 아이를 ‘놓쳐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사과해야 할 일인가. 아이를 놓친 것이 부모의 탓일까. 이 아이의 깃털 같은 생을 지키기 위해서 그 곁에 있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
모르지만 잘해주는 어른 되기
지난주 국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다녀왔다. 청소년과 교사의 자살에 대한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줄어들려면 교육이 바뀌어야 하고, 사회가 바뀌어야 하고, 거대한 세상의 흐름이 바뀌어야 한다. 오래 걸리는 일이다. 사회적 방법을 찾는 동시에 지금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짧은 생들이 안타까워 잠을 설치며 뒤척이던 중에 책 속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김소영 작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미어터지는 만원 버스에서 부모님 무릎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 서 있던 청년 하나가 유리창에 손바닥을 댄 채 등에 힘을 주고 버티더라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애기가 짜부라질까봐…” 어린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부모님도, 이모나 삼촌도, 선생님도 아닌 사람이 나를 지켜주고 있구나. 나는 짜부라지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143쪽)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억이 선명하다고.
스쳐가는 한 장면이 이렇게나 오래 기억되는 걸 보며, 우선 나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관심과 호의를 표현하는 어른이 되기로 했다. 나는 너희를 지키고 싶어. 너희가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린 몸을 허공에 날리며 생을 포기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해.
모르는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버스에서 만난 학생의 무거운 책가방을 받아들어 내 무릎에 놓았다. “어휴, 너무 무겁네요.” 아이는 쑥스러운 듯 꾸벅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그 아이를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각박하다 느껴지는 어느 날에 이런 사소한 호의가 떠오르면 좋겠다.
막막한 아이들이 생을 끝내고 싶은 순간에 떠올릴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면, 거미줄처럼 실낱 같을지라도 세상과 연결된 그 끈 하나를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삶을 알기도 전에 삶을 끝내려는 아이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교육을, 사회를, 나를 바꾸어야 한다.
1) 정근식의 '학생을 살리는 교육', 에듀프레스 2025.07.15
2) 서고운, <청소년 자살 원인 탐색 및 예방 대책 연구>,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21. 청소년 자살의 원인은 개인 변인, 부모/가족 관련 변인, 친구/학교 관련 변인 등 다양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청소년을 지지해주는 지원 체계가 부실한 경우 자살/자해의 위험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_장희숙(민들레 편집장)
숫자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
높은 곳에서 자꾸만 떨어진다. 아이들이. 지난 6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세 아이가 한날한시, 한곳에서 떨어져 내린 일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2주 후 서울의 학원 옥상에서, 그로부터 닷새 후엔 경기도 광주의 빌딩 옥상에서 또 다른 아이가 추락해 생을 마감했다.
충격적인 사건에 이 사회는 어찌 이리 비정할 만큼 잠잠한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최근 개정된 자살예방보도 준칙에 이런 문항이 있단다. ‘자살 사건은 가급적 보도하지 않는다(1항).’ 비슷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해서 생긴 조항일 것이다. 청소년 자살의 경우 유가족이나 학교가 언론보도를 원치 않아서 묻혀버리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국인이 1만4천여 명이고, 그중 청소년이 221명이다. 이 사건을 일일이 보도한다면 뉴스는 거의 날마다 자살 소식으로 뒤덮일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청소년 자살이 10여 년 만에 두 배 넘게 증가했다는 건 이상 징후이며 강력한 경고성 신호다. 편차가 있는 다른 연령대와 달리, 13년째 한국의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굳건하게 ‘자살’이다.(2023년 기준 46.1%) 계속해서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는 연령대도 10대가 유일하다. 이쯤 되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집계된 숫자 너머, 셀 수 없이 더 많은 아이들이 죽고 싶은 마음을 품은 채 하루하루 견디고 있을 테다.
한 기사를 읽다가 숨이 막혔다. 서울시교육감이 ‘학생을 살리는 교육’을 주제로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 참석한 교사는 “(정신병동) 입원 병상을 구하지 못해 아이들이 적기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읍소한다. “서울에선 도저히 병상을 구할 수 없어 구리나 고양 등 수도권에서 물색해 보지만 그마저도 없어 병결 처리해 집에서 상담과 치료를 받는 학생들이 상당수”라고 했다.1) 위급 환자가 줄을 섰는데 병상이 모자란 건 전쟁통이나 재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 아닌가. 오늘의 청소년들의 정신건강 문제는 필시 사회적 재난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단호히 말한다.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회적 조건이 자살률을 규정한다고. “어느 한 시기에 그 사회의 정신적 상태가 일시적인 자살의 빈도를 결정한다. 따라서 각 사회는 그 국민을 자살로 이끄는 일정한 양의 에너지로 이루어진 집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자살자의 행동은 얼핏 보기엔 개인적 기질을 나타내지만 실은 그들이 외적으로 표출하는 사회적 조건의 보완이며 연장인 것이다.”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392쪽) 죽은 아이들, 죽고 싶은 아이들이 보내는 이 위태로운 신호를 긴급한 사회적 경고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제 탓으로 돌리는 아이들
요즘 사춘기 아이들은 반항을 잘 하지 않는다. 예전의 청소년들처럼 분노하며 들이대거나 저항하는 일도 드물다. 부모의 넘치는 관심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제 탓으로 돌리며 속으로 앓는다. 경쟁으로 줄 세우며 차별 받기 싫으면 능력을 갖추라 달달 볶는 이 사회를 원망조차 않는다.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그 결과는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다가온다.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생을 끝내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탓하며 마지막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다.
많은 이들이 청소년 자살 대책으로 경쟁교육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학업 스트레스가 아이들 고통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맞으나 단언하긴 어렵다.2) 청소년 자살 원인을 밝히는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략의 분석을 보면 학업 스트레스보다 대인관계가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대인관계는 친구관계, 학교폭력, 왕따, 가족 관계 등을 포괄할 것이다.
학업 스트레스와는 거리가 먼 대안학교 아이들의 자살 소식도 더러 들려온다. 내게도 말로 꺼내기 힘든 이별의 경험이 있다. 대안학교에서 담임 했던 아이의 부고를 듣고 달려간 장례식장. 무슨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 주저앉은 부모를 끌어안고 같이 통곡할 뿐이었다. 부모는 내게 아이를 ‘놓쳐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사과해야 할 일인가. 아이를 놓친 것이 부모의 탓일까. 이 아이의 깃털 같은 생을 지키기 위해서 그 곁에 있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
모르지만 잘해주는 어른 되기
지난주 국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다녀왔다. 청소년과 교사의 자살에 대한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줄어들려면 교육이 바뀌어야 하고, 사회가 바뀌어야 하고, 거대한 세상의 흐름이 바뀌어야 한다. 오래 걸리는 일이다. 사회적 방법을 찾는 동시에 지금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짧은 생들이 안타까워 잠을 설치며 뒤척이던 중에 책 속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김소영 작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미어터지는 만원 버스에서 부모님 무릎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 서 있던 청년 하나가 유리창에 손바닥을 댄 채 등에 힘을 주고 버티더라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애기가 짜부라질까봐…” 어린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부모님도, 이모나 삼촌도, 선생님도 아닌 사람이 나를 지켜주고 있구나. 나는 짜부라지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143쪽)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억이 선명하다고.
스쳐가는 한 장면이 이렇게나 오래 기억되는 걸 보며, 우선 나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관심과 호의를 표현하는 어른이 되기로 했다. 나는 너희를 지키고 싶어. 너희가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린 몸을 허공에 날리며 생을 포기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해.
모르는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버스에서 만난 학생의 무거운 책가방을 받아들어 내 무릎에 놓았다. “어휴, 너무 무겁네요.” 아이는 쑥스러운 듯 꾸벅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그 아이를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각박하다 느껴지는 어느 날에 이런 사소한 호의가 떠오르면 좋겠다.
막막한 아이들이 생을 끝내고 싶은 순간에 떠올릴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면, 거미줄처럼 실낱 같을지라도 세상과 연결된 그 끈 하나를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삶을 알기도 전에 삶을 끝내려는 아이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교육을, 사회를, 나를 바꾸어야 한다.
1) 정근식의 '학생을 살리는 교육', 에듀프레스 2025.07.15
2) 서고운, <청소년 자살 원인 탐색 및 예방 대책 연구>,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21. 청소년 자살의 원인은 개인 변인, 부모/가족 관련 변인, 친구/학교 관련 변인 등 다양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청소년을 지지해주는 지원 체계가 부실한 경우 자살/자해의 위험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_장희숙(민들레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