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06] 시간표 없는 교육은 가능할까

202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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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와 시간표

 

시간표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19세기 초 영국의 한 공립학교가 시작이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거대한 방직공장이 있었는데, 사이렌이 울리면 노동자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감독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똑같이 움직였다. 이를 본 교장은 ‘아이들도 시간에 맞춰 움직이게 하면 어떨까?’ 하고서 교실마다 있던 작은 종 대신 공장처럼 시간에 맞춰 동시에 울리는 큰 종을 달았다.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우르르 교실로 들어갔고, 종이 울리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산업혁명 시대에 ‘교시’로 쪼개진 수업과 쉬는 시간, 종이 신호를 주는 구조가 완성됐다. 

19세기 말, 대규모 공교육 체제는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등장했다. 미국 교육학자 랄프 타일러(Ralph Tyler)가 정리한 목표·내용·방법·평가 중심의 ‘관리형 교육과정 모델’은 당시 대량생산 공장 시스템과 맞물려 학교를 ‘표준화된 지식 생산 공장’으로 만들었다. 학생은 표준 시간표 속에서 동일한 과제를 수행했고, 교사는 생산라인의 관리자처럼 그 과정을 통제했다. 학교 종과 시간표는 그 대표적 상징이었다.

문제는 이 구조가 여전히 현재형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모든 초·중·고는 「초·중등교육법」과 그 시행령, 그리고 교육부 고시에 따라 교육과정을 편성한다. 학교는 매 학년도 190일 이상의 수업일수를 확보해야 하고, 교과별 주당 수업 시수 또한 정해져 있다. 이처럼 시간표는 법으로 강제되는 제도적 구조다. OECD 평균(초등 805시간, 중등 916시간)과 비교해도 한국은 상대적으로 높은 시수를 유지하고 있어, 교육이 여전히 시간표 중심 구조에 뿌리내려 있음을 보여준다. 표준화는 안정성을 주지만, 동시에 변화와 창의성을 가로막는다.

 

계획과 우연의 융합, 브리콜라주 교육과정

 

대안학교 초기에 나는 공교육의 구조에 질문을 던지며 캠프 형식의 실험을 자주 했다. 그중 하나가 ‘시간표 없는 학교가 가능한가’였다. 방학 전, 학부모들과 생태캠프를 준비했다. 충청도 대곡 분교 주변의 환경을 교육 자원으로 삼았다. 생태 전문가와 함께 마을 곳곳을 다니며 꽃, 곤충, 물가의 생물을 조사했고, 아이들이 놀이로 배울 수 있도록 생태 놀이를 익혔다. 그리고 교사들과 약속했다. 아이들의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시간표는 없다.

캠프가 시작된 날, 오래된 운동장엔 낮은 풀 냄새가 가득했고, 창문 너머로 매미 울음이 쏟아졌다. 해가 운동장 모서리를 비출 때쯤 아이들이 삼삼오오 나왔다. 어떤 아이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어떤 아이는 이마에 햇빛을 가득 받으며 하루를 열었다. 밥은 배고플 때 먹었고, 쉬고 싶으면 쉬었다. 함께 산으로, 들로, 물가로 걸었다. 교사들은 종이, 사인펜, 반창고 같은 준비물을 가방에 챙겼다. 놀다 지루해질 즈음 칡잎으로 가방을 만들고, 무언가 그리고 싶어 하면 종이를 꺼내 꽃이든 곤충이든 그리게 했다.

첫째 날은 마을 어르신들께 인사를 다녔다. 심심하던 동네 아이들이 자연스레 합류했다. 그중 한 명이 별명을 ‘경찰’로 지어 달라 했다. 할머니와 사는, 에너지가 넘치는 개구쟁이였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이 산에 같이 가자고 했다. 교사들은 이미 답사한 길로 안내하려 했지만, 경찰은 “내가 아는 좋은 길이 있다”고 했다. 답사하지 않은 길이라 내심 당황했지만,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였다.

경찰을 따라 나선 길은 험하고 볼거리도 없었다. 숨이 차고 아이들은 지쳐갔다. ‘오늘은 망했다’는 생각이 들 즈음, 작은 동산이 열리며 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산 앞에는 무덤이 있었다. 경찰이 말했다. “여기가 우리 아빠 무덤이야.” 

순간, 모두가 조용해졌다. 한참 동안 무덤 곁에 서 있었고, 멀리 보이는 산등성을 손가락으로 그리며 바라봤다. 우리는 “동산 위에 올라서서 파란 하늘 바라보며”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다. 바람에 실린 노래가 경찰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며.준비한 놀이는 거의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배우고 있었다. 나 역시 배웠다. 나무와 숲,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배움이었다.

돌아보면, 대곡 분교의 하루는 단순히 ‘시간표 없는 교육’이 아니었다. 교사들은 캠프 전 수차례 답사를 하며 마을의 길과 식물, 놀이 가능성을 세세히 준비했다. 그러나 그 치밀한 계획은 현장에서 우연을 만나 새로운 빛을 발했다. 경찰과의 만남, 그리고 그 언덕에서 부른 노래는  상상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이것이 브리콜라주 교육과정(Bricolage Curriculum)의 힘이다. 브리콜라주는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가 제시한 개념으로, ‘손에 잡히는 재료를 엮어 즉석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활동’을 뜻한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계획된 틀’과 ‘현장의 우연’을 엮어 그 순간 가장 적합한 학습을 만든다. 준비된 교사의 눈과 손이 우연을 배움으로 바꾸는 것이다.

교육학에서도 ‘우연성’은 중요한 자원이다. 진로교육에서 주목받는 우연이론(Planned Happenstance Theory)이 그 예다. 직업심리학자 존 크럼볼츠(John Krumboltz)는 진로 형성에서 예측 불가능한 사건과 만남이 개인의 경로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우연을 피하거나 없애려 하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역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대곡 분교의 하루도 그랬다. 설계된 생태교육의 뼈대 위에, 예기치 못한 만남과 경험이 더해졌다. 우연은 계획의 빈틈이 아니라, 계획을 살아 있게 하는 숨구멍이자 새로운 배움이 자라는 씨앗이었다.

 

세계의 실험 — 느슨한 시간표의 가능성

 

학교 시간표는 대량시스템 시대에 적합한 구조였다. 하지만 개별 맞춤형 학습이 중심이 되는 AI 시대에도 유지될 필요가 있는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시간표를 느슨하게 하거나 폐지하는’ 실험이 늘고 있다. 핀란드는 ‘현상기반 학습(Phenomenon-based Learning)’으로 교과 경계를 허물고 하루·한 주 단위 프로젝트 몰입 수업을 진행하며 미국 서드 도어(Third Door)에서는 학생이 하루 일정을 자율 설계, 교사는 퍼실리테이터 역할만 수행한다. 뉴질랜드 디스커버리원 스쿨(Discovery One)은 전교생이 개별 학습계획을 세우고, 종·교과·학년 구분 없이 학습한다. 

AI 기술은 이 흐름을 가속화할 수 있다. AI 튜터는 학습자의 속도·흥미·상황에 맞춰 콘텐츠와 과제를 추천한다. 이때 시간표는 절대적 규칙이 아니라, 학생이 자기 리듬을 조율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배움은 더 깊어지고 오래 지속된다. 올해부터 우리나라는 고교학점제를 전면 시행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학생의 교과 선택권이 확대되었으니 자율성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학생들이 어떤 교과목을 선택했는지가 대학 입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환경에서 과연 학생 개개인의 취향과 성장을 고려한 맞춤형 선택이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그 책임은 학부모와 학생에게 전가되고 있다. 

대안학교는 작은 규모와 제도적 유연성 덕에 이런 실험에 유리하다. 그러나 초창기부터 대부분의 대안학교 역시 시간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학교의 철학과 구성원들의 요구를 담아 교육과정을 운영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여전히 학습자의 필요가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는 성찰이 필요하다. 

내가 몸담았던 한 대안학교에서 ‘기술융합’ 프로젝트를 하며 아이들에게 온전히 시간을 맡긴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자기 표현을 마음껏 드러냈다. 그러던 중 공황장애로 등교가 어려운 친구가 생기자 아이들은 그 친구의 집 근처 놀이터에 모여 수업을 이어갔다. 단 한 명이라도 소외되지 않도록 스스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 결과물은 사진첩과 아두이노로 만든 앰프 협탁이었다. 분절된 교과의 시간의 제한이 있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성취였다. 

최근 제정된 대안교육지원법은 교육청 인증 과정에서 ‘시간표에 따른 교육과정’ 제출을 요구받는다. 안정성을 위한 제도지만, 동시에 미래 교육의 씨앗이 될 실험성을 약화시킨다. 대안교육의 지향성은 시간표 유무를 넘어, 아이가 자기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시간표가 없다는 것은 느슨한 교육 운영이 아니라, 오히려 정교한 교육 설계가 필요한 일이다. 교과서 속 죽은 지식이 아니라, 마을과 사람, 자연과 환경을 재료로 삼아 생생한 삶을 경험하게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미 쌓아온 교육 자산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보편적 기준을 마련하는 일. 대안학교가 제도 안에서 이를 어떻게 품어낼지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_우소연(전 꿈이룸학교장, 1990년대에 창조학교에서 대안교육운동을 시작해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대안교육과 일·학습이 결합된 창업을 실험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