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09] ‘수능 만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2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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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수능시험장 교문 앞에서 기도하는 엄마들(사진_시사위크) 


영어 듣기 평가 시간이면 비행기 이착륙조차 금지하며 난리법석을 피우는 국가적 행사인 수능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올해는 불수능이어서 만점자가 5명밖에 안 나왔다지만 그다지 의미 있는 뉴스는 아니다. 수능 만점자들은 대개 서울대 법대나 의대를 간다. 역대 수능 만점자들의 진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졸업생들 대부분은 평범한 법조인이나 의사가 된다. 드물게 과학자의 길을 걷는 이들도 있지만 창의적인 연구 성과를 냈다는 보도는 듣지 못했다. 

수능시험이 단순히 문제 풀이 능력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력을 테스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지만, 우리 교육의 문제는 시험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라는 평가 방식에 있다. 대치동 학원가나 8학군에서 세계적인 수학자가 나오긴 힘들 것이다. 시험 귀재가 창의적인 인재이기는 어렵다. 등수에 얽매이면 시험에 필요한 공부만 하게 된다. ‘밑줄 좍’ 그어진 부분만 보게 되면 전체 맥락을 놓치게 되고, 깊이 파고들기가 힘들다. 

수학에서 미적분은 함수, 집합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수능시험에 집합의 비중이 높지 않다고 집합론을 소홀히 여긴다면 수학을 진짜 잘하기는 힘들다. 수학 문제를 잘 푸는 사람이 아니라 수학적 사고 실험을 즐기는 사람이 수학자가 된다. 수학의 난제를 두 개나 풀고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수상해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수학자 반열에 든 허준이 박사는 고등학교 때 시인이 되겠다고 자퇴를 했었다고 한다. 

시험 잘 보는 기술 하나로 서울대를 나와 판검사가 된 사람들이 최근 내란 사태에서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우리 교육의 실패를 말해준다. 1982학년도 학력고사에서 전국 59만 명 수험생 중 수석을 차지했던 제주제일고 원희룡은 법조인을 거쳐 고향의 행정 수장이 되고 국토부장관을 역임했지만 과연 지역사회와 우리나라에 무슨 기여를 했는가. 국민의 지탄을 받는 국회의원들 상당수도 명문대를 졸업한 법조인 출신들이다. 


대학입시에서 비중이 예전보다 낮아졌지만 수능은 여전히 전 사회적 관심사다. 수능시험에 이처럼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은 당사자들의 지적 능력을 낭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낭비이기도 하다. 하버드대는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SAT 만점자를 불합격시키기도 한다. 대학은 스스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인재를 기르는 곳이지 문제풀이 기계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점자에 대해 언론도 주목하지 않는다. 

공교육은 국가 예산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다. 그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 기껏 시험 귀재들을 길러낸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대치동 학원가와 8학군으로 대표되는 입시교육의 메카는 우리 사회의 잠재력을 낭비하는 대표적인 집단이다. 잘해야 판검사와 의사들을 양성할 뿐이다. 이들은 사회적 A/S업 종사자들이다. 창의적인 존재가 아니며, 미래에는 AI로 대체될 수도 있는 직군이다. 

쇠고기 등급 매기듯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는 상대평가 제도가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몬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기보다 뒤처지지 않을까 불안해 한다. 불안은 전염된다.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대부분 불안감 때문에 다닌다고 말한다. 하지만 학원을 다닌다고 불안감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학원이 불안을 부추기기도 한다. “너네, 우리 학원 그만두면 밑바닥 된다” 그러면서. 일종의 영업 전략인 셈이다. 경쟁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또 경쟁을 부채질한다. 

사교육 때문에 공교육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이 무너져서 사교육이 창궐한다. 공교육이 제 자리를 잡으면 사교육은 저절로 정리된다. 말로는 시민을 기른다면서 실제로는 시험 기술자를 기르는 공교육의 현실을 직시하자. 입시교육은 국가가 나서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할 테니, 공교육은 모든 학생들의 가능성을 꽃피우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국가 예산을 좀더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문화예술을 북돋고 과학기술 역량을 키우는 쪽으로 집행하자. 소모적인 경쟁이 아닌 생산적인 경쟁이 될 수 있게 평가 제도를 만들고, 학습결손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지원하는 것도 국가의 몫이다. 나랏돈은 시험 귀재가 아닌 건강한 시민을 기르는 데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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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지만 위의 말은 사실 하나마나한 말이다. 공교육을 입시교육으로 치닫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이 바뀌지 않고는 공교육도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입시교육이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니라는 건 웬만한 사람이면 안다. 그럼에도 다들 입시에 올인하게 되는 사회구조가 있다. 조선시대에도 입시교육이 횡행했었다. 향교와 성균관이 과거시험 준비에 올인하는 데 문제의식을 느낀 유학자들이 인간교육 하는 배움터를 연 것이 서원이었다. 조선시대의 대안학교였던 셈이다. 하지만 백 년도 되지 않아 서원도 입시교육에 올인하게 된다. 과거에 급제해서는 붕당을 이루고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학벌사회에서 입시에 올인하지 않기란 어렵다. 

21세기에도 권력을 가진 이들은 여전히 '형님' '누나' 하며 인사청탁을 주고받는다. 정치판의 문제만은 아니다. 학력과 학벌이 밥줄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입시를 외면할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은 드물다. 원샷 소사이어티(One Shot Society)! 2011년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교육 특집에서 쓴 이 표현은 출신 대학이 평생을 좌우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인생은 한방'이라는 것을 체감하는 사람들이 입시에 올인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공교육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대기업이 하청기업을 상대로 '삥'을 뜯고,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삥 뜯는' 구조를 용인하는 제도부터 바꾸어야 한다. 

입시교육이 교육 문제의 뿌리가 아니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교육개혁이 이루어진다 해도 학력·학벌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입시교육은 여전할 것이다. 대학에 인생을 걸지 않아도 되는 길이 넓어져야 교육 문제도 해결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 제일의 조선 기술을 자랑하지만 연안 어선의 수준은 50년 전에 머물러 있으며 노르웨이 어선의 발치도 못 따라간다. 조선강국의 수혜는 대기업과 정규직 노동자 일부에게 돌아갈 뿐, 수많은 하청업체 노동자에게는 먼나라 이야기다. 어민들은 오늘도 통통배를 타고 고등어잡이에 나선다. 어업을 희망하는 청년들에게 선박을 임대해주는 제도가 있지만 낙후된 선박에 자기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에 나설 청년은 거의 없다.(* 이 이야기는 지난 웹진  [vol 07]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진다.  https://www.mindle.org/column/?bmode=view&idx=167965527&back_url=&t=board&page=2 )


글쓴이  현병호 _ 계간《민들레》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