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1] 공부 이야기(2)_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2026-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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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학습-공부

배움, 학습, 공부는 어떻게 다를까? 배움은 실제 인물이든 책 속의 인물이든 누군가로부터 또는 어떤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뭔가를 알게 되는 것이라면, 학습은 배우고(學) 익히는(習) 과정을 아우르는 말이다. 익힘은 배운 것을 온전히 소화하는 과정으로, 주로 혼자 하는 활동이다. 공부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할 수 있다. ‘혼자 이 악물고 하는 공부’처럼. 학습 방식이 다양하고, 배움과 익힘 과정을 명확히 나누기가 어려우므로 언어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는 힘들다. 

영어 단어 learning은 배움 또는 학습으로 번역된다. study는 공부 또는 학습으로 번역된다. 일상적인 용례를 보자면, 학습이 배움과 공부 양쪽에 걸쳐 있는 모양새로, 배움-학습-공부가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공부工夫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주로 몸을 써서 배우고 익히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1) 우리말에서는 주로 책상머리 공부를 가리킨다. ‘학습’은 가장 폭넓게 쓰이는 낱말로, 공부와 배움의 뜻까지 두루 포괄한다. 한자어인 ‘학습’은 복합명사를 이루어 ‘학습법’ ‘자율학습’ 등 다양하게 의미가 확장되기도 하는 반면 ‘배움’은 확장성이 떨어져 학술용어로 쓰기에는 불편하다.2) 

배움은 우연한 계기로 저절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학습이나 공부는 작정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이 분명한 활동이다. 그래서 학습노동이라는 말도 있다. 일하면서 배우고 놀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공부는 그러기가 힘들다. 주경야독처럼 밭을 다 갈고 나서 책을 읽지, 밭을 갈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상머리 공부는 주로 뇌의 활동이어서 에너지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가 힘들고 지속적인 에너지 조달도 어렵다.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몰입 상태에서 하는 활동은 공부가 아니라 연구 활동이다. 목표가 있지만, 연구 활동 자체에서 생겨나는 에너지가 있다. 

공부처럼 목표지향적인 활동은 쉽게 지친다. 공부가 힘든 이유다.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한 공부를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 글의 제목을 학습론, 배움론이 아닌 ‘공부론’이라 한 것은 목표지향적인 공부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하기 위함이다. 공부는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흔히 공부를 잘한다, 못한다 할 때의 공부의 의미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려고 할 때, 그리고 뒤늦게 뭔가에 꽂혀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짚어본다. 

 

공부, 머리 아닌 몸으로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할 때 흔히 동기부여가 안 되어 그렇다고 말한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안 한다는 논리다. 목표가 뚜렷하고 의지가 굳으면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동기부여도 환경이 받쳐줘야 되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설령 된다 해도 목표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의 에너지는 오래 가기 힘들다. 행위와 목적은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지 않다. 굳은 결심도 흔히 ‘작심삼일’이 되는 까닭은 어떤 목적을 위한 행동에는 에너지가 자체 조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은 바다에 이르기 ‘위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다. 물길이 바뀌는 것은 주변의 지형과 중력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진정한 변화는 ‘의하여’ 일어나지 결코 ‘위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둘러싼 환경, 맥락이 바뀌어야 아이가 바뀐다. 교육에서 흔히 ‘동기부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어떤 동기가 아이를 변화시키기는 힘들다. 동기는 목표의식을 불어넣어줘서 시동을 거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시동이 걸리면 가속 페달을 밟아 일정 속도 이상을 유지해줘야 한다. 그러자면 에너지가 끊이지 않고 공급되어야 한다. 

에너지는 관성이든 중력이든 ‘의하여’ 작동하지 ‘위하여’ 작동하지 않는다. 입시교육이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게 만드는 데 비해, 진짜 공부는 배우는 것이 좋아서 배우고 익히기를 즐기는 것이다. 공자의 호학(好學)이다. 어미가 자식을 안고 기뻐하듯이(好)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위하여 공부’는 공부 그 자체에서 에너지를 얻지 못하는 반면 ‘의하여 공부’는 자체 에너지로 앞으로 나아간다. ‘위하여’가 심리의 세계라면 ‘의하여’는 물리의 세계다. 심리는 물리를 넘어설 수 없다. 나무는 하늘과 땅의 에너지에 의하여 성장하지, 하늘 높이 자라기 위하여 성장하지 않는다. 

공부를 꾸준히 하려면 동기의 힘보다 습관의 힘을 빌 필요가 있다. 습관은 관성의 힘을 생성해서 공부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자리 잡고 공부를 함으로써 몸과 뇌가 그 패턴에 적응하여 저절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습관이 들면 목표지향적인 ‘위하여’ 공부가 습관에 의한 ‘의하여’ 공부로 바뀐다. 에너지 조달이 수월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마감 시한에 가까워서야 글을 쓰기 시작해 탈고를 하게 되는 것도 ‘위하여’ 에너지보다 ‘의하여’ 에너지가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문을 담당했던,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강원국 작가는 ‘루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첫 문장은 막막한 법이다. 그는 아침 산책을 하고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것을 정해진 의식 행하듯 하다 보면 여하튼 글이 써진다고 말한다. 뇌가 ‘이젠 꼼짝없이 글을 써야 하는구나’ 하고 인식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몸의 힘을 빌어 뇌를 길들이는 방법이다. 동기나 목적의식보다 습관의 힘이 더 세다. 

습관은 뇌가 몸의 말을 듣게 만드는 과정이다. 마라토너가 어느 시점에서 느끼게 된다는 러너스-하이 같은 상태는 뇌가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뇌를 통제하는 단계다. 무아지경에 가까운 몰입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운동이든 악기 연주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럴 때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해온 몸은 자체의 지성을 갖추고 있다. 40년 넘게 합기도를 수련해온 우치다 타츠루는 이를 신체지(身體智)라 명명한다. 뇌를 거치지 않고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습관 들이기는 익힘의 과정이기도 하다. 습관(習慣)은 뭔가를 하고 또 해서 관성의 힘이 작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배운(學) 것을 틈틈이 익히는(習) 것이 학습의 요체이듯, 좋은 마음과 태도를 몸에 배게 하는 것은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 학습과 교육에서 습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좋은 습을 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습은 몸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학습보다 ‘습학’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몸으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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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어에서는 우리말로 공부(工夫)에 해당하는 勉強(벵쿄)와 기예를 배우고 익히는 工夫(쿠후)를 구분해서 쓴다. 學習(각슈)는 우리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다. 중국어 ‘쿵푸(功夫)’는 쿠후와 비슷한 말이지만 공력을 쌓는 신체 및 정신 수련을 뜻한다.

2) 영어의 learning이 플립러닝(flipped learning), 블렌디드러닝(blended learning)처럼 폭넓은 확장성을 갖고 있는 데 비하면 아쉬운 지점이다.


_현병호(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