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이 ‘마음만 먹으면’
수업 중에 초등 3학년 아이가 칠판을 가리키며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저거 꼬리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몰라 잠시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아이가 칠판을 보고 단어 몇 개를 공책에 옮겨 적다가 내가 쓴 알파벳 소문자 ‘g’를 가리키며 글자 끝부분을 어떻게 올리는 거냐고 묻는 거였다. ‘3학년은 무조건 기초부터’라고 속으로 되뇌며 학생의 공책에 g를 여러 번 반복해 쓰면서 보여줬다. 영어 수업에서 수준 차는 늘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3학년 영어 교과의 국가수준 교육과정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영어를 처음 배운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실제 3학년 때 영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대다수 학생들이 학원, 유치원, 학습지 혹은 소위 영어유치원에서 영어를 접한 상태로 학교 수업을 시작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아이들이 영어를 처음 접하는 연령이 평균 만 3.7세다.1) 그러나 아이들이 알파벳 정도는 우스워한다고 느슨하게 봤다가는 학습부진을 초래하기 딱 쉬운 교과가 영어다. 사교육을 받지 않는 아이도 있고, 초등학교 영어 수업은 3~4학년 주당 2시간, 5~6학년은 3시간이기 때문에 한글 익히기에 비해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6학년 중에는 학원에서 이미 중고등 수준의 영어를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도 많지만 알파벳조차 익히지 못한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이미 학생들 간에 큰 격차가 벌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어 공부와 수업을 오래 해온 입장에서 멀리 보면, 이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금방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격차다.(3학년이 6개월 걸려 배울 파닉스를 6학년은 1주일이면 익힌다.) 문제는 ‘마음만 먹으면’이란 표현에 학생의 가정환경 즉 부모의 사회경제, 문화 자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이고, 그래서 교사로서 내 마음도 복잡해진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영어 학습은 언제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개인적인 입장을 먼저 밝히자면 나는 영유아 대상 영어교육에 회의적이다. 영어유치원도 득보다 실이 많다고 본다. 초3부터 시작되는 영어 공교육 시스템에 대해서도 초등교사로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1997년 초등 3학년에 영어 교과가 도입되었지만 그 성과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영어 사교육 시작 연령이 확연히 낮아졌고, 초등학교에서부터 ‘영포자(영어를 포기한 자)’가 나타나는 실정이다. 영어 학습의 시작 시기에 대해 논할 때 우리가 따져보아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만 ‘카더라’ 류의 산발적인 사례가 아닌 과학적이며 교육적인 확고한 증거와 이론들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수영, 스케이트, 외국어… 무엇이든 어릴 때일수록 빠르고 쉽게 배운다는 말을 흔히 한다. 예를 들어 스케이트를 배우더라도 어릴수록 몸이 유연하고,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더 잘 배운다는 식이다. 얼핏 맞는 말 같지만 확고한 명제로 성립하긴 어렵다. 일단 성인이 된 이후로도 스케이트를 무리 없이 배운 사례가 수없이 많다. 또 스케이트를 취미나 스포츠로 즐기기 위함인지 혹은 프로선수가 되기 위함인지 등 그 배움의 목적도 고려해야 한다. 어릴수록 몸이 유연하고 두려움도 적다지만 어린 시절의 좋지 않은 기억으로 평생 빙판을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얼핏 맞는 말 같지만 ‘아니면 말고’식의 설들이 교육계 특히 영어교육 분야에서 활개를 친다. 영어는 무조건 어릴 때 배워야 좋다는 말이 괴담처럼 떠돌아, 이제 겨우 아장거리며 걷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백, 수천만 원 상당의 전집과 학습자료들이 팔린다. 흔히 ‘영유’라 불리는 영어유치원은 사실 정규 유아교육기관이 아닌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영어학원이다. 원어민 교사의 교육적 자질 문제, 높은 교육비, 영어 조기 교육의 효과에 대한 첨예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가 사그라들 줄 모른다. ‘영어는 무조건 일찍 배워야 좋다’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가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결정적 시기 가설’, 둘째는 ‘간섭’의 영향이다.
결정적 시기 가설
결정적 시기 가설이란, 인간의 언어 습득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어서 이 시기를 놓치면 언어를 배우지 못하거나 어렵게 배우고,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구사하지도 못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1967년 미국의 언어학자 에릭 레네버그는 뇌의 유연성은 사춘기 무렵부터 떨어지므로 그 이전이 언어교육의 적기라고 주장했다. 유명한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도 인간은 ‘언어습득기제’인 LAD를 지닌 채 태어나며, 이는 5~6세 무렵 가장 왕성하고 사춘기 무렵부터 쇠퇴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언어교육계는 물론 특히 한국 민간의 영어교육 통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결정적 시기 가설을 제시한 레네베그는 “언어 노출로 자연스레 언어를 습득하는 능력은 사춘기 이후 사라지고, 이후 언어를 배우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며, 배우더라도 고유의 악센트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은 40세가 넘어도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촘스키 역시 성인의 경우 LAD는 별 의미가 없음을 피력하며, 성인도 언어 습득이 가능하고 오히려 논리력과 수학적 사고 능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언어습득기제인 LAD는 사춘기가 지나면 사라진다’는 주장만큼 선명하고 충격적이지 않아서인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결정적 시기 가설은 모국어 습득 과정을 배경으로 탄생한 ‘가설’이란 사실이다. 즉 주로 언어장애를 연구해온 학자가 세운 모국어 습득 능력에 대한 가설이 한국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특정 시기를 놓치면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할 수 없으므로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시작해야 한다’는 정설로 둔갑했고, 사교육업계의 주요 마케팅 전략이 된 것이다. 이는 하루라도 빨리 영어를 시작하지 않으면 내 아이가 뒤처질 수 있다는 양육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했으며 심지어 국가의 공교육 시스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간섭 : 정서적인 결정적 시기
‘아이들은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서 어른보다 스케이트를 잘 배운다’는 통념은 언어교육의 ‘간섭 이론’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 ‘간섭’이란 어릴 때일수록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원래 쓰던 언어의 간섭 현상이 덜하므로, 일찍 외국어를 배워야 두 언어를 동시에 습득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와일더 펜필드, 알렉산더 귀오라 같은 학자들은 사춘기 이후 인간의 자아는 방어적으로 변화하므로 그 이전에 외국어를 습득해야 한다고 봤다. 실제 한 가족 전체가 외국으로 이민을 갔을 때, 어른인 부모보다 아이들이 더 빨리 유창해지고 발음과 억양도 원어민 같더라는 경험적 근거가 쉽게 발견되면서 통념으로 굳어진 경향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있더라도 이를 한국 영어교육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ESL 환경과 EFL 환경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ESL은 제2언어로서의 영어를 뜻한다. 영어권 국가로 이민 간 상황에서의 언어 환경을 연상하면 쉽다. ESL 상황에 놓인 학습자들은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영어를 접한다. 대중매체, 거리 표지판, 학교 수업, 주위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끝없이 영어에 노출된다. EFL은 외국어로서의 영어를 뜻한다. 이 경우 학습자는 학교나 학원의 영어 수업 시간처럼 학습을 위해 특별히 조성된 환경이 아닌 이상 일상적으로 영어에 노출될 일이 거의 없다. 이 두 학습 상황은 완전히 달라서 영어 교육계에서도 ESL은 습득, EFL은 학습이란 용어로 구분해서 사용한다.
한국은 당연히 EFL 상황이다. 인위적인 학습 환경이 조성되어야만 영어를 배울 수 있다. 각종 연구에 따르면, EFL 학습환경에서는 같은 학습 시간 대비 어린아이보다 청소년과 성인의 영어 학습 성취도가 훨씬 높다. 흔히 발음만큼은 어릴 때 배울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수년 전 시행됐던 교육부 정책 연구 결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4세, 7세 아동을 대상으로 같은 시간 동안 영어교육을 진행하고 단어, 문장 기억, 문장 활용 등을 평가한 결과 4세 아동들은 평균 29.9점, 7세 아동들은 60.0점을 얻었다. 발음 역시 7세 아동들이 더 정확했다. 4세 아이들은 한국어 발음조차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2)
결론적으로 학계에서는 한국과 같은 EFL 상황, 즉 인위적인 영어학습이 필요한 환경에서는 모어 능력과 인지 능력이 어느 정도 발달한 학습자의 성취도가 더 높다는 관점이 정설이다. 분석적, 추상적 사고력 등의 도움을 받아 언어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인 데이비드 오수벨역시 성인과 아동은 언어 학습 측면에서 각기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아동은 유연성, 기억력, 발음 면에서 앞서고 성인은 모국어를 통해 익힌 추상적 어휘를 새로운 언어 습득에 적용하는 능력에서 앞선다고 밝혔다.
아이들이 잃고 있는 것들
내가 학교에서 수년간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며 겪어온 경험적 사례들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6학년 학생은 3학년 학생보다 빠르게 배우고, 노력하면 발음도 얼마든지 정확해질 수 있다. 물론 대다수의 아이들이 영어 사교육을 받고 오는 데서 느끼는 정서적 위축감, 가정의 학습환경의 뒷받침 등 고려할 변수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언어 환경에서 6학년 아이가 3학년 아이에 비해 영어 학습면에서 불리하다는 증거는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내 경험상으로도 결코 사실이 아니다. 실제 언어발달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간의 측두엽은 12~13세경 가장 발달한다. 영유아기의 과도한 외국어교육은 스트레스 증후군을 유발하고 학습 기억, 신경세포 회로 형성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영어유치원을 나온 학생들과 수 차례 대화해본 결과 내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 일단 이들의 영어 능력이 초등 수준에서 전반적으로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영어 능력의 결정적인 변수로 보이지는 않는다. 영어유치원을 나오지 않았지만 영어 사용 능력이 좋은 아이들도 많고, 아이들의 영어 능력은 대단히 가변적이어서 3학년 때 특출났던 아이가 6학년쯤 되면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이 되기도 했다. 전일제 영어유치원을 다녔던 현재 초등학생이나 20대 제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이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사실이 하나 있다. “솔직히 유치원 때 기억은 거의 안 나요. 그런데 엄마가 제가 영어유치원 나왔다는 말을 많이 해요.”
나는 학생들에게 외국어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모국어가 주는 편견에서 벗어나 다른 사고방식과 문화를 언어를 통해 접해보는 과정이 시민교육의 일환으로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공교육 시스템, 아이들의 모국어 발달 기회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뤄지는 민간 영어교육 풍토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한국 같은 언어환경에서 누구든 공교육만으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건 애초에 터무니없는 목표다. 교육 체제는 어떻게든 굴러가고, 젊은 세대는 어찌 됐든 이전 세대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과연 학교에서 초등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쳐서인지, 영유아기부터 사교육에 쏟아붓는 천문학적인 돈과 시간이 주는 쥐꼬리만 한 보상인지, 그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회비용은 어찌할 것인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영어는 언제부터 배워야 할까? 모두에게 맞는 정답이란 없다. 나는 적어도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최대한 모국어로 생각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보지만, 당연히 영어 사교육업계는 이를수록 좋다고 웅변할 것이다. 일찍 시작해서 혜택을 보는 아이도 분명 얼마간은 존재한다. 교육의 목표, 우선순위, 가치관, 재화와 시간, 갖가지 기회비용 등을 잘 따져서 결국 선택은 개인이 내려야 한다. 일반 시민들, 양육자들의 불안을 헤아리지 못할 것도 없고, 그 불안과 공포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정책과 제도의 설계는 다르다. 한국 언어환경에 기초해 영어 공교육의 근본 목표부터 현실적으로 재정립하고, 사교육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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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윤진·장명림·김문정·김혜원(2010), ‘유아 외국어 교육의 실태와 대책’. 부산광역시 교육청·대구광역시 교육청·육아정책연구소
2) ‘영유아에 대한 조기 영어교육의 적절성에 관한 연구’, 교육부 정책연구과제 2002-16
_김현희 (초등학교 교사로 수 년간 영어 교과를 담당하다 현재는 담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민들레 159호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학생이 ‘마음만 먹으면’
수업 중에 초등 3학년 아이가 칠판을 가리키며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저거 꼬리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몰라 잠시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아이가 칠판을 보고 단어 몇 개를 공책에 옮겨 적다가 내가 쓴 알파벳 소문자 ‘g’를 가리키며 글자 끝부분을 어떻게 올리는 거냐고 묻는 거였다. ‘3학년은 무조건 기초부터’라고 속으로 되뇌며 학생의 공책에 g를 여러 번 반복해 쓰면서 보여줬다. 영어 수업에서 수준 차는 늘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3학년 영어 교과의 국가수준 교육과정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영어를 처음 배운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실제 3학년 때 영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대다수 학생들이 학원, 유치원, 학습지 혹은 소위 영어유치원에서 영어를 접한 상태로 학교 수업을 시작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아이들이 영어를 처음 접하는 연령이 평균 만 3.7세다.1) 그러나 아이들이 알파벳 정도는 우스워한다고 느슨하게 봤다가는 학습부진을 초래하기 딱 쉬운 교과가 영어다. 사교육을 받지 않는 아이도 있고, 초등학교 영어 수업은 3~4학년 주당 2시간, 5~6학년은 3시간이기 때문에 한글 익히기에 비해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6학년 중에는 학원에서 이미 중고등 수준의 영어를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도 많지만 알파벳조차 익히지 못한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이미 학생들 간에 큰 격차가 벌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어 공부와 수업을 오래 해온 입장에서 멀리 보면, 이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금방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격차다.(3학년이 6개월 걸려 배울 파닉스를 6학년은 1주일이면 익힌다.) 문제는 ‘마음만 먹으면’이란 표현에 학생의 가정환경 즉 부모의 사회경제, 문화 자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이고, 그래서 교사로서 내 마음도 복잡해진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영어 학습은 언제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개인적인 입장을 먼저 밝히자면 나는 영유아 대상 영어교육에 회의적이다. 영어유치원도 득보다 실이 많다고 본다. 초3부터 시작되는 영어 공교육 시스템에 대해서도 초등교사로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1997년 초등 3학년에 영어 교과가 도입되었지만 그 성과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영어 사교육 시작 연령이 확연히 낮아졌고, 초등학교에서부터 ‘영포자(영어를 포기한 자)’가 나타나는 실정이다. 영어 학습의 시작 시기에 대해 논할 때 우리가 따져보아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만 ‘카더라’ 류의 산발적인 사례가 아닌 과학적이며 교육적인 확고한 증거와 이론들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수영, 스케이트, 외국어… 무엇이든 어릴 때일수록 빠르고 쉽게 배운다는 말을 흔히 한다. 예를 들어 스케이트를 배우더라도 어릴수록 몸이 유연하고,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더 잘 배운다는 식이다. 얼핏 맞는 말 같지만 확고한 명제로 성립하긴 어렵다. 일단 성인이 된 이후로도 스케이트를 무리 없이 배운 사례가 수없이 많다. 또 스케이트를 취미나 스포츠로 즐기기 위함인지 혹은 프로선수가 되기 위함인지 등 그 배움의 목적도 고려해야 한다. 어릴수록 몸이 유연하고 두려움도 적다지만 어린 시절의 좋지 않은 기억으로 평생 빙판을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얼핏 맞는 말 같지만 ‘아니면 말고’식의 설들이 교육계 특히 영어교육 분야에서 활개를 친다. 영어는 무조건 어릴 때 배워야 좋다는 말이 괴담처럼 떠돌아, 이제 겨우 아장거리며 걷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백, 수천만 원 상당의 전집과 학습자료들이 팔린다. 흔히 ‘영유’라 불리는 영어유치원은 사실 정규 유아교육기관이 아닌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영어학원이다. 원어민 교사의 교육적 자질 문제, 높은 교육비, 영어 조기 교육의 효과에 대한 첨예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가 사그라들 줄 모른다. ‘영어는 무조건 일찍 배워야 좋다’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가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결정적 시기 가설’, 둘째는 ‘간섭’의 영향이다.
결정적 시기 가설
결정적 시기 가설이란, 인간의 언어 습득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어서 이 시기를 놓치면 언어를 배우지 못하거나 어렵게 배우고,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구사하지도 못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1967년 미국의 언어학자 에릭 레네버그는 뇌의 유연성은 사춘기 무렵부터 떨어지므로 그 이전이 언어교육의 적기라고 주장했다. 유명한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도 인간은 ‘언어습득기제’인 LAD를 지닌 채 태어나며, 이는 5~6세 무렵 가장 왕성하고 사춘기 무렵부터 쇠퇴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언어교육계는 물론 특히 한국 민간의 영어교육 통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결정적 시기 가설을 제시한 레네베그는 “언어 노출로 자연스레 언어를 습득하는 능력은 사춘기 이후 사라지고, 이후 언어를 배우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며, 배우더라도 고유의 악센트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은 40세가 넘어도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촘스키 역시 성인의 경우 LAD는 별 의미가 없음을 피력하며, 성인도 언어 습득이 가능하고 오히려 논리력과 수학적 사고 능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언어습득기제인 LAD는 사춘기가 지나면 사라진다’는 주장만큼 선명하고 충격적이지 않아서인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결정적 시기 가설은 모국어 습득 과정을 배경으로 탄생한 ‘가설’이란 사실이다. 즉 주로 언어장애를 연구해온 학자가 세운 모국어 습득 능력에 대한 가설이 한국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특정 시기를 놓치면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할 수 없으므로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시작해야 한다’는 정설로 둔갑했고, 사교육업계의 주요 마케팅 전략이 된 것이다. 이는 하루라도 빨리 영어를 시작하지 않으면 내 아이가 뒤처질 수 있다는 양육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했으며 심지어 국가의 공교육 시스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간섭 : 정서적인 결정적 시기
‘아이들은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서 어른보다 스케이트를 잘 배운다’는 통념은 언어교육의 ‘간섭 이론’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 ‘간섭’이란 어릴 때일수록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원래 쓰던 언어의 간섭 현상이 덜하므로, 일찍 외국어를 배워야 두 언어를 동시에 습득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와일더 펜필드, 알렉산더 귀오라 같은 학자들은 사춘기 이후 인간의 자아는 방어적으로 변화하므로 그 이전에 외국어를 습득해야 한다고 봤다. 실제 한 가족 전체가 외국으로 이민을 갔을 때, 어른인 부모보다 아이들이 더 빨리 유창해지고 발음과 억양도 원어민 같더라는 경험적 근거가 쉽게 발견되면서 통념으로 굳어진 경향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있더라도 이를 한국 영어교육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ESL 환경과 EFL 환경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ESL은 제2언어로서의 영어를 뜻한다. 영어권 국가로 이민 간 상황에서의 언어 환경을 연상하면 쉽다. ESL 상황에 놓인 학습자들은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영어를 접한다. 대중매체, 거리 표지판, 학교 수업, 주위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끝없이 영어에 노출된다. EFL은 외국어로서의 영어를 뜻한다. 이 경우 학습자는 학교나 학원의 영어 수업 시간처럼 학습을 위해 특별히 조성된 환경이 아닌 이상 일상적으로 영어에 노출될 일이 거의 없다. 이 두 학습 상황은 완전히 달라서 영어 교육계에서도 ESL은 습득, EFL은 학습이란 용어로 구분해서 사용한다.
한국은 당연히 EFL 상황이다. 인위적인 학습 환경이 조성되어야만 영어를 배울 수 있다. 각종 연구에 따르면, EFL 학습환경에서는 같은 학습 시간 대비 어린아이보다 청소년과 성인의 영어 학습 성취도가 훨씬 높다. 흔히 발음만큼은 어릴 때 배울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수년 전 시행됐던 교육부 정책 연구 결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4세, 7세 아동을 대상으로 같은 시간 동안 영어교육을 진행하고 단어, 문장 기억, 문장 활용 등을 평가한 결과 4세 아동들은 평균 29.9점, 7세 아동들은 60.0점을 얻었다. 발음 역시 7세 아동들이 더 정확했다. 4세 아이들은 한국어 발음조차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2)
결론적으로 학계에서는 한국과 같은 EFL 상황, 즉 인위적인 영어학습이 필요한 환경에서는 모어 능력과 인지 능력이 어느 정도 발달한 학습자의 성취도가 더 높다는 관점이 정설이다. 분석적, 추상적 사고력 등의 도움을 받아 언어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인 데이비드 오수벨역시 성인과 아동은 언어 학습 측면에서 각기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아동은 유연성, 기억력, 발음 면에서 앞서고 성인은 모국어를 통해 익힌 추상적 어휘를 새로운 언어 습득에 적용하는 능력에서 앞선다고 밝혔다.
아이들이 잃고 있는 것들
내가 학교에서 수년간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며 겪어온 경험적 사례들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6학년 학생은 3학년 학생보다 빠르게 배우고, 노력하면 발음도 얼마든지 정확해질 수 있다. 물론 대다수의 아이들이 영어 사교육을 받고 오는 데서 느끼는 정서적 위축감, 가정의 학습환경의 뒷받침 등 고려할 변수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언어 환경에서 6학년 아이가 3학년 아이에 비해 영어 학습면에서 불리하다는 증거는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내 경험상으로도 결코 사실이 아니다. 실제 언어발달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간의 측두엽은 12~13세경 가장 발달한다. 영유아기의 과도한 외국어교육은 스트레스 증후군을 유발하고 학습 기억, 신경세포 회로 형성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영어유치원을 나온 학생들과 수 차례 대화해본 결과 내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 일단 이들의 영어 능력이 초등 수준에서 전반적으로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영어 능력의 결정적인 변수로 보이지는 않는다. 영어유치원을 나오지 않았지만 영어 사용 능력이 좋은 아이들도 많고, 아이들의 영어 능력은 대단히 가변적이어서 3학년 때 특출났던 아이가 6학년쯤 되면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이 되기도 했다. 전일제 영어유치원을 다녔던 현재 초등학생이나 20대 제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이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사실이 하나 있다. “솔직히 유치원 때 기억은 거의 안 나요. 그런데 엄마가 제가 영어유치원 나왔다는 말을 많이 해요.”
나는 학생들에게 외국어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모국어가 주는 편견에서 벗어나 다른 사고방식과 문화를 언어를 통해 접해보는 과정이 시민교육의 일환으로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공교육 시스템, 아이들의 모국어 발달 기회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뤄지는 민간 영어교육 풍토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한국 같은 언어환경에서 누구든 공교육만으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건 애초에 터무니없는 목표다. 교육 체제는 어떻게든 굴러가고, 젊은 세대는 어찌 됐든 이전 세대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과연 학교에서 초등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쳐서인지, 영유아기부터 사교육에 쏟아붓는 천문학적인 돈과 시간이 주는 쥐꼬리만 한 보상인지, 그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회비용은 어찌할 것인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영어는 언제부터 배워야 할까? 모두에게 맞는 정답이란 없다. 나는 적어도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최대한 모국어로 생각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보지만, 당연히 영어 사교육업계는 이를수록 좋다고 웅변할 것이다. 일찍 시작해서 혜택을 보는 아이도 분명 얼마간은 존재한다. 교육의 목표, 우선순위, 가치관, 재화와 시간, 갖가지 기회비용 등을 잘 따져서 결국 선택은 개인이 내려야 한다. 일반 시민들, 양육자들의 불안을 헤아리지 못할 것도 없고, 그 불안과 공포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정책과 제도의 설계는 다르다. 한국 언어환경에 기초해 영어 공교육의 근본 목표부터 현실적으로 재정립하고, 사교육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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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윤진·장명림·김문정·김혜원(2010), ‘유아 외국어 교육의 실태와 대책’. 부산광역시 교육청·대구광역시 교육청·육아정책연구소
2) ‘영유아에 대한 조기 영어교육의 적절성에 관한 연구’, 교육부 정책연구과제 2002-16
_김현희 (초등학교 교사로 수 년간 영어 교과를 담당하다 현재는 담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민들레 159호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