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레논은 유명한 곡 ‘이매진imagine’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소유란 것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 할 수 있다면 어떨지 궁금해요 / 욕심부릴 필요도 굶주릴 필요도 없어요 / 오직 인류애만 가득하죠”
하지만 이 노래를 만들기도 전에 존 레논은 이미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이 노래로 더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되었다. 기자들이 물어봤다.
“왜 당신은 노래와 반대로 더 많은 돈을 소유하려 하는가?”
그의 대답은 이랬다.
“불안해서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그렇다. 돈이 없으면 불안하다. 물론 돈이 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가장 훌륭하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돈만큼 온갖 문제를 웬만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는 찾기 어렵다. 돈은 최고의 해결사는 아니지만 범용 해결사다.
‘돈’을 터부시하는 교육
유교의 영향인지 불교의 영향인지 혹은 1980년대를 풍미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교육자들은 ‘돈’에 대해 대놓고 말하기를 꺼린다. 아이들 눈에도 세상이 온통 돈 이야기로 넘쳐나고, 어른들의 관심사가 온통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에 쏠려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교육에서는 ‘돈벌이’라는 주제를 기피한다. 어쩌다 ‘돈벌이’를 언급할 때는 최대한 점잖은 척 이렇게 말한다.
“성실하게 자신의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면 돈은 절로 따라온다. 그렇게 번 돈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규모 있게 잘 쓰면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중학생 중에도 주식 투자를 하는 아이들이 한 반에 여럿인 시대다. 용돈이나 세뱃돈의 일부를 주식이나 암호화폐로 받았다는 아이들도 있다. 심지어 세뱃돈을 모아 바이오주를 샀는데 하필(마침) 코로나 팬데믹 때문(덕분)에 다섯 배로 불어났다고 자랑하는 학생도 있다.
이 학생의 이름을 ‘대박이’라고 하자. 대박이의 친구 중에는 상대적 박탈감, 즉 ‘벼락거지’가 된 느낌을 받은 아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 학생의 이름을 ‘벼락이’라고 해보자. 대박이가 너무 부러워서 자기도 주식이나 암호화폐 투자를 하겠다고 덤비는 벼락이에게 교육자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지금까지 우리나라 학교교육(대안교육도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이라면 벼락이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정직하게 땀 흘려 벌지 않은 돈을 부러워해선 안 된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사라진다.”
“불로소득을 바라는 건 옳지 않다.”
여전히 학교는 학생들에게 ‘돈’에 대해 가르치거나 말할 때 ‘정당한 소득’과 ‘불로소득’을 이분화하는 기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결과는 교육과 현실의 괴리다. 교사들은 아이들 앞에서 ‘돈’ 이야기, 특히 ‘돈벌이’ 이야기 하는 걸 꺼린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교사도 불로소득을 바라며 부동산 투자와 주식 투자를 한다. 물론 학생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불로소득을 바라지 말라는 말 따위가 먹힐 리 없다. 학생은 (자기 부모와 교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어른들이 불로소득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도 속으론 선망하며, 혹시 그런 기회가 찾아온다면 쉬이 놓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교육이 위선에 빠지지 않고 현실과 유리되지 않으려면 차라리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는 각종 재테크와 투자 방법을 가르쳐야 할까? 가령 중학교 과정에서는 주식, 채권 등 현물 투자를 공부하고,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선물 투자나 파생상품 투자를 공부하는 식으로 교육과정을 짜는 것이 옳을까? 선물 투자, 금융 파생상품 투자, 혹은 암호화폐 투자 중 어느 하나가 잘 얻어걸리면 웬만한 직장인 연봉쯤은 우스울 정도의 수익을 거둘 수 있으니 이런저런 진로 고민 필요 없이 재테크와 투자에 집중하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그 역시 답은 아닐 것이다. 교육자들이 ‘돈에 대한 지나친 청교도적 태도’를 벗어나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저마다 펀드매니저 같은 삶을 살도록 가르칠 일은 아니다.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
다만, 교육에서 보다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돈벌이’에 대해 다룰 필요는 있다. 그 출발점은 ‘우리는 불로소득을 원한다’는 욕망을 인정하고 그 실체를 이해하는 것이라야 한다. 교사도 학부모도 그리고 학생도 정도의 차이일 뿐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특별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인간은 완전히 합리적인 존재도 도덕적인 존재도 아니다. 우리에게 성욕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난잡한 성생활이나 성폭력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니듯,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을 인정하는 것과 돈에 대한 탐욕을 긍정하는 것은 별개다.
학생들에게 설명할 때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을 시험 성적에 비유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팔팔이’라는 학생이 시험 범위의 80% 정도를 공부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학생이 스스로 기대하는 시험 점수는 최대 80점이라야 한다. 실수할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75~80점 사이의 성적을 기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도덕적으로도 올바를 것이다. 하지만 팔팔이는 80점보다 높은 점수를 기대하며 시험에 임할 가능성이 크다. 그가 특별히 과욕을 부리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이 공부한 것보다 더 높은 성적이 나오길 기대한다. 심지어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은 학생조차 자기 점수가 20점(그냥 다 찍었을 때의 점수)보다는 높을 거라고(높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보이는 돈에 대한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임금노동자 중 일을 통해 얻는 자신의 소득과 다른 이의 소득에 적용하는 이중잣대가 그 증거다. 자기 소득에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 능력과 기여도에 합당한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직장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개는 본인의 능력과 기여에 못 미치는 연봉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연봉을 평가할 때는 태도가 돌변한다. 죄다 ‘월급 도둑’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저마다 자기 연봉에 불로소득에 대한 기대를 잔뜩 집어넣어 계산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이런 구호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는, 아니 ‘일한 것보다 더 많이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존재다.
이런 태도는 비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권장해야 할 태도다.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이 때로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강한 동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불로소득의 가능성이 없다면, 즉 우리 삶이 노력(노동)과 성취(소득)를 두 축으로 하는 1차함수라면 사람들은 적당한 수준 이상의 노력이나 노동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인류의 생활수준 또한 현재보다 훨씬 소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로소득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희망’과 현재 상태를 뛰어넘어 엉뚱한 도약을 할 에너지를 얻는다. 노력과 성취의 관계가 일대일 선형관계가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도약하는 멱함수1)가 되는 것이다. 이를 고대 로마인들은 포르투나fortuna, 행운이라 불렀다.
여기서부터가 학생들에게 꼭 가르쳐야 할 부분이다. 이 행운은 일단 노력과 성취의 함수관계를 전제한다. 행운, 즉 불로소득은 1차함수를 멱함수로 바꾸어주는 것이지 그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행운은 용감한 사람의 편이다”라고 노래했다. 여기서 용감하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말이 아니다. 두려우면서도 필요하다면 도전하는 태도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바로 그 말이다. 사람의 일을 다한다는 것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며, 천명을 기다린다는 것은 노력의 함수로 설명되지 않는 ‘플러스 알파’를 기대하는 것이다. 만약 노력과 성취가 선형관계라면 용기를 내지도 ‘진인사’ 하지도 않을 것이며, 조금만 난관에 부딪혀도 “그래, 여기까지다” 하며 멈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불로소득의 희망을 품고 있기에 때로는 객관적 조건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이들과 돈에 대해 말하기
이제 교육이 가야 할 길이 보인다. 학생들에게 불로소득을 백안시하는 위선을 가르쳐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 없이 불로소득만을 바라게 해서도 안 된다. 욕망과 탐욕은 다르다. 용기의 대가로 행운을, ‘진인사’의 대가로 ‘천명’을 기대하는 것은 욕망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왜 바라는지,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합리적인 경로가 무엇인지 의식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반면 탐욕은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심만 앞서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인 의식도 없는 상태다. 탐욕에 빠진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싸우는 용기도, 온 힘을 다하는 ‘진인사’도 모두 낭비로 느껴진다. 되도록 용기도 ‘진인사’도 없이 빨리 많은 불로소득을 거두고 싶을 뿐이다. 시험으로 치면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은 학생이 20점보다 높은 점수가 아니라, 80점보다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는 식이다.
여기서 투자와 투기가 갈라진다. 투자는 합리적인 판단과 용기의 대가로 소득을 얻는 것이다. 투자 소득은 형식적으로는 불로소득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낼 거라는 합리적인 판단 능력과 혹여라도 잘못될 가능성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한 용기의 대가다. 또한 투자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이고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하지만 확실한 보상을 약속할 수 없는 분야에 강제력 없이 자원을 집중할 수 있다. 합리적이고 용기 있는 투자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면 투기는 합리적 근거 없이 단지 행운(대박)만을 노리는 것이다. 투기로도 소득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우연이거나 내부자 정보 등을 이용한 부정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투기가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자본이 효율적으로 투입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집중되거나 온갖 부정한 방편이 판을 치는 등 경제체제가 비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주)카더라’라는 기업이 유망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자. 이때 덮어놓고 그 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 투기다. 하지만 투자자라면 먼저 그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부터 따질 것이다. 꼭 도덕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제품이라면 널리 팔리기 어렵고, 팔리더라도 일시적 유행에 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음은 (주)카더라의 재무제표를 살펴보고 재정 상태와 경영 상태를 점검할 것이다. 기업설명회 자료, 사업계획서 등도 열람하며 기업의 장기 전망과 사업의 가능성을 판단할 것이다(이런 자료들은 모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충분히 살펴본 뒤 이 회사의 미래 가치가 주가에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판단이 들면 비로소 투자를 결정할 것이다. 물론 100%의 확신은 없고, 손실의 가능성도 30% 정도 열려 있다. 하지만 투자자는 용기를 내어 70%의 가능성에 투자한다.
이와 같이 투기꾼에 비해 투자자에게는 상당히 높은 소양이 요구된다. 경제 동향을 파악하고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평가하며 재무 상태와 경영 계획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당장 큰돈을 벌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합리적 판단이 설 때까지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냉철함, 손실의 두려움을 무릅쓸 수 있는 용기도 갖추어야 한다. 타고나는 것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들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교육이 담당해야 할 부분이다. 구체적인 투자 방법 같은 것은 이러한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공부하여 터득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은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공교육은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그 불리함을 대물림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도구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만 해도 불리한 조건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교육을 통해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분야에 진출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재생산되고 있는 불평등은 교육 기회나 직업, 재산, 사회적 지위의 차이로만 형성된 게 아니다. 자산소득이 근로소득, 사업소득을 넘어서는 시대다. 직업만큼이나 투자에서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투자에 필요한 소양까지 계승된다는 점이 불평등 재생산의 기제로 작동한다. 부유층 학생들은 투자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관점을 주변 어른들로부터 배울 가능성이 큰 반면, 불리한 조건에서 태어난 학생들은 그럴 가능성이 적다. 투자에 요구되는 지식과 정보, 투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는 냉철함 같은 것을 가르쳐줄 어른들보다 무분별한 투기로 패가망신한 어른을 마주칠 가능성이 더 높다. 이 격차는 어떤 면에서는 교육과 사회의 양극화를 더 빠르게, 더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 교육은 이 격차에 결코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
1) y=ax 같은 선형적 관계가 아니고 y=axⁿ 형태의 거듭제곱함수를 말한다. 세로축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_권재원(전직 중학교 교사로『학교라는 괴물』 『직업으로서의 교사』 외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 글은 격월간 민들레 139호에 실린 글입니다.)
존 레논은 유명한 곡 ‘이매진imagine’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소유란 것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 할 수 있다면 어떨지 궁금해요 / 욕심부릴 필요도 굶주릴 필요도 없어요 / 오직 인류애만 가득하죠”
하지만 이 노래를 만들기도 전에 존 레논은 이미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이 노래로 더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되었다. 기자들이 물어봤다.
“왜 당신은 노래와 반대로 더 많은 돈을 소유하려 하는가?”
그의 대답은 이랬다.
“불안해서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그렇다. 돈이 없으면 불안하다. 물론 돈이 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가장 훌륭하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돈만큼 온갖 문제를 웬만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는 찾기 어렵다. 돈은 최고의 해결사는 아니지만 범용 해결사다.
‘돈’을 터부시하는 교육
유교의 영향인지 불교의 영향인지 혹은 1980년대를 풍미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교육자들은 ‘돈’에 대해 대놓고 말하기를 꺼린다. 아이들 눈에도 세상이 온통 돈 이야기로 넘쳐나고, 어른들의 관심사가 온통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에 쏠려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교육에서는 ‘돈벌이’라는 주제를 기피한다. 어쩌다 ‘돈벌이’를 언급할 때는 최대한 점잖은 척 이렇게 말한다.
“성실하게 자신의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면 돈은 절로 따라온다. 그렇게 번 돈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규모 있게 잘 쓰면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중학생 중에도 주식 투자를 하는 아이들이 한 반에 여럿인 시대다. 용돈이나 세뱃돈의 일부를 주식이나 암호화폐로 받았다는 아이들도 있다. 심지어 세뱃돈을 모아 바이오주를 샀는데 하필(마침) 코로나 팬데믹 때문(덕분)에 다섯 배로 불어났다고 자랑하는 학생도 있다.
이 학생의 이름을 ‘대박이’라고 하자. 대박이의 친구 중에는 상대적 박탈감, 즉 ‘벼락거지’가 된 느낌을 받은 아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 학생의 이름을 ‘벼락이’라고 해보자. 대박이가 너무 부러워서 자기도 주식이나 암호화폐 투자를 하겠다고 덤비는 벼락이에게 교육자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지금까지 우리나라 학교교육(대안교육도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이라면 벼락이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정직하게 땀 흘려 벌지 않은 돈을 부러워해선 안 된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사라진다.”
“불로소득을 바라는 건 옳지 않다.”
여전히 학교는 학생들에게 ‘돈’에 대해 가르치거나 말할 때 ‘정당한 소득’과 ‘불로소득’을 이분화하는 기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결과는 교육과 현실의 괴리다. 교사들은 아이들 앞에서 ‘돈’ 이야기, 특히 ‘돈벌이’ 이야기 하는 걸 꺼린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교사도 불로소득을 바라며 부동산 투자와 주식 투자를 한다. 물론 학생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불로소득을 바라지 말라는 말 따위가 먹힐 리 없다. 학생은 (자기 부모와 교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어른들이 불로소득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도 속으론 선망하며, 혹시 그런 기회가 찾아온다면 쉬이 놓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교육이 위선에 빠지지 않고 현실과 유리되지 않으려면 차라리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는 각종 재테크와 투자 방법을 가르쳐야 할까? 가령 중학교 과정에서는 주식, 채권 등 현물 투자를 공부하고,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선물 투자나 파생상품 투자를 공부하는 식으로 교육과정을 짜는 것이 옳을까? 선물 투자, 금융 파생상품 투자, 혹은 암호화폐 투자 중 어느 하나가 잘 얻어걸리면 웬만한 직장인 연봉쯤은 우스울 정도의 수익을 거둘 수 있으니 이런저런 진로 고민 필요 없이 재테크와 투자에 집중하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그 역시 답은 아닐 것이다. 교육자들이 ‘돈에 대한 지나친 청교도적 태도’를 벗어나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저마다 펀드매니저 같은 삶을 살도록 가르칠 일은 아니다.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
다만, 교육에서 보다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돈벌이’에 대해 다룰 필요는 있다. 그 출발점은 ‘우리는 불로소득을 원한다’는 욕망을 인정하고 그 실체를 이해하는 것이라야 한다. 교사도 학부모도 그리고 학생도 정도의 차이일 뿐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특별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인간은 완전히 합리적인 존재도 도덕적인 존재도 아니다. 우리에게 성욕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난잡한 성생활이나 성폭력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니듯,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을 인정하는 것과 돈에 대한 탐욕을 긍정하는 것은 별개다.
학생들에게 설명할 때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을 시험 성적에 비유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팔팔이’라는 학생이 시험 범위의 80% 정도를 공부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학생이 스스로 기대하는 시험 점수는 최대 80점이라야 한다. 실수할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75~80점 사이의 성적을 기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도덕적으로도 올바를 것이다. 하지만 팔팔이는 80점보다 높은 점수를 기대하며 시험에 임할 가능성이 크다. 그가 특별히 과욕을 부리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이 공부한 것보다 더 높은 성적이 나오길 기대한다. 심지어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은 학생조차 자기 점수가 20점(그냥 다 찍었을 때의 점수)보다는 높을 거라고(높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보이는 돈에 대한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임금노동자 중 일을 통해 얻는 자신의 소득과 다른 이의 소득에 적용하는 이중잣대가 그 증거다. 자기 소득에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 능력과 기여도에 합당한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직장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개는 본인의 능력과 기여에 못 미치는 연봉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연봉을 평가할 때는 태도가 돌변한다. 죄다 ‘월급 도둑’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저마다 자기 연봉에 불로소득에 대한 기대를 잔뜩 집어넣어 계산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이런 구호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는, 아니 ‘일한 것보다 더 많이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존재다.
이런 태도는 비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권장해야 할 태도다.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이 때로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강한 동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불로소득의 가능성이 없다면, 즉 우리 삶이 노력(노동)과 성취(소득)를 두 축으로 하는 1차함수라면 사람들은 적당한 수준 이상의 노력이나 노동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인류의 생활수준 또한 현재보다 훨씬 소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로소득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희망’과 현재 상태를 뛰어넘어 엉뚱한 도약을 할 에너지를 얻는다. 노력과 성취의 관계가 일대일 선형관계가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도약하는 멱함수1)가 되는 것이다. 이를 고대 로마인들은 포르투나fortuna, 행운이라 불렀다.
여기서부터가 학생들에게 꼭 가르쳐야 할 부분이다. 이 행운은 일단 노력과 성취의 함수관계를 전제한다. 행운, 즉 불로소득은 1차함수를 멱함수로 바꾸어주는 것이지 그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행운은 용감한 사람의 편이다”라고 노래했다. 여기서 용감하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말이 아니다. 두려우면서도 필요하다면 도전하는 태도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바로 그 말이다. 사람의 일을 다한다는 것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며, 천명을 기다린다는 것은 노력의 함수로 설명되지 않는 ‘플러스 알파’를 기대하는 것이다. 만약 노력과 성취가 선형관계라면 용기를 내지도 ‘진인사’ 하지도 않을 것이며, 조금만 난관에 부딪혀도 “그래, 여기까지다” 하며 멈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불로소득의 희망을 품고 있기에 때로는 객관적 조건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이들과 돈에 대해 말하기
이제 교육이 가야 할 길이 보인다. 학생들에게 불로소득을 백안시하는 위선을 가르쳐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 없이 불로소득만을 바라게 해서도 안 된다. 욕망과 탐욕은 다르다. 용기의 대가로 행운을, ‘진인사’의 대가로 ‘천명’을 기대하는 것은 욕망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왜 바라는지,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합리적인 경로가 무엇인지 의식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반면 탐욕은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심만 앞서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인 의식도 없는 상태다. 탐욕에 빠진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싸우는 용기도, 온 힘을 다하는 ‘진인사’도 모두 낭비로 느껴진다. 되도록 용기도 ‘진인사’도 없이 빨리 많은 불로소득을 거두고 싶을 뿐이다. 시험으로 치면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은 학생이 20점보다 높은 점수가 아니라, 80점보다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는 식이다.
여기서 투자와 투기가 갈라진다. 투자는 합리적인 판단과 용기의 대가로 소득을 얻는 것이다. 투자 소득은 형식적으로는 불로소득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낼 거라는 합리적인 판단 능력과 혹여라도 잘못될 가능성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한 용기의 대가다. 또한 투자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이고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하지만 확실한 보상을 약속할 수 없는 분야에 강제력 없이 자원을 집중할 수 있다. 합리적이고 용기 있는 투자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면 투기는 합리적 근거 없이 단지 행운(대박)만을 노리는 것이다. 투기로도 소득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우연이거나 내부자 정보 등을 이용한 부정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투기가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자본이 효율적으로 투입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집중되거나 온갖 부정한 방편이 판을 치는 등 경제체제가 비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주)카더라’라는 기업이 유망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자. 이때 덮어놓고 그 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 투기다. 하지만 투자자라면 먼저 그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부터 따질 것이다. 꼭 도덕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제품이라면 널리 팔리기 어렵고, 팔리더라도 일시적 유행에 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음은 (주)카더라의 재무제표를 살펴보고 재정 상태와 경영 상태를 점검할 것이다. 기업설명회 자료, 사업계획서 등도 열람하며 기업의 장기 전망과 사업의 가능성을 판단할 것이다(이런 자료들은 모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충분히 살펴본 뒤 이 회사의 미래 가치가 주가에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판단이 들면 비로소 투자를 결정할 것이다. 물론 100%의 확신은 없고, 손실의 가능성도 30% 정도 열려 있다. 하지만 투자자는 용기를 내어 70%의 가능성에 투자한다.
이와 같이 투기꾼에 비해 투자자에게는 상당히 높은 소양이 요구된다. 경제 동향을 파악하고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평가하며 재무 상태와 경영 계획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당장 큰돈을 벌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합리적 판단이 설 때까지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냉철함, 손실의 두려움을 무릅쓸 수 있는 용기도 갖추어야 한다. 타고나는 것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들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교육이 담당해야 할 부분이다. 구체적인 투자 방법 같은 것은 이러한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공부하여 터득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은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공교육은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그 불리함을 대물림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도구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만 해도 불리한 조건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교육을 통해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분야에 진출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재생산되고 있는 불평등은 교육 기회나 직업, 재산, 사회적 지위의 차이로만 형성된 게 아니다. 자산소득이 근로소득, 사업소득을 넘어서는 시대다. 직업만큼이나 투자에서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투자에 필요한 소양까지 계승된다는 점이 불평등 재생산의 기제로 작동한다. 부유층 학생들은 투자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관점을 주변 어른들로부터 배울 가능성이 큰 반면, 불리한 조건에서 태어난 학생들은 그럴 가능성이 적다. 투자에 요구되는 지식과 정보, 투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는 냉철함 같은 것을 가르쳐줄 어른들보다 무분별한 투기로 패가망신한 어른을 마주칠 가능성이 더 높다. 이 격차는 어떤 면에서는 교육과 사회의 양극화를 더 빠르게, 더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 교육은 이 격차에 결코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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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ax 같은 선형적 관계가 아니고 y=axⁿ 형태의 거듭제곱함수를 말한다. 세로축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_권재원(전직 중학교 교사로『학교라는 괴물』 『직업으로서의 교사』 외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 글은 격월간 민들레 139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