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의 목적이 민주시민 양성이라는데
한국 교육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민주시민 양성’이라는데, 12년째 공교육을 받고 있는 나는 지금껏 학교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배워본 적이 없다. 누군가는 사회나 윤리, 도덕 시간에 ‘시민 불복종’ ‘삼권분립’ 등을 배우지 않느냐고, 자율활동, 자치활동 시간에 민주시민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학급회의를 하고, 학급임원을 뽑고, 학생회 활동을 하는 게 다 민주시민교육의 일환이라고.
난 이렇게 답하겠다. “아, 학교에서 미리 정한 주제로(교내환경 정화, 학교폭력 예방 등) 회의록 채우기 위해 보내는 그 시간이요?” “아, 대충 공부 잘하는 애들 시키는 그 인기투표요?” “아,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 채우려고 들어가서 쌤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봉사활동이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내 활동의 대부분은 ‘생기부에 기재될 때만’ 그 필요성을 지닌다. 누군가 생기부에 기재되지 않는 활동을 열심히 하면 “그거 왜 해?”라는 말을 듣는다. 그나마 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동아리 활동조차 생기부의 ‘동아리 활동’ 칸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두 개 이하만 하기를 권장한다. 너무 많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면 각각의 내용을 길게 담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 개, 네 개 이상의 동아리에 가입한 친구들도 있는데, 그들은 그냥 그 활동이 좋아서 하는 거다. 학교에서는 이런 열정적인 학생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쓸데없는 거 하느라 시간 관리 못하는 학생’으로 여긴다. 그 시간에 차라리 문제집을 한 권 더 풀라는 식이다. “그런 건 대학 가서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선생님들에게 지겹도록 들은 말이다.
반대로 생기부에 기재된다고 하면, 재미없어 보이는 교내 대회도 중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 참가한다. 대표적으로 교내 수학경시대회가 그렇다. 나도 작년에 이 대회에 참가했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재능도 없었는데, 혹시 상을 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결과는 처참했다. 문제 푸는 게 너무나 따분해서 몇 분 되지도 않아 교실을 나와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소위 공부 잘하는 애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대회든 일단 참가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실제로 이런 교내 대회들은 애초에 ‘상위권 애들 스펙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성적 좋은 애들이 가져갈 상인데 왜 해’라는 생각으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참가하지 않는다. 대회가 열릴 때마다 반복되는, 철저히 ‘그들만의 리그’다.
연대하지 않는 교실
이런 현실은 학생들을 개별화시킨다. 교내 대회도, 세특(세부능력특기사항)도, 수업도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예전에 다른 공식적인 일과로 수업을 놓쳤던 적이 있는데, 나는 친구에게 필기한 걸 보여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 해도 친구가 수업 중에 열심히 적은 ‘필기’라는 결과물을 아무런 대가없이 요구하는 것이 눈치보였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서 빌려주길 거절하는 친구도 있고, 빌려주긴 하지만 “걔가 자꾸 필기 보여 달라 해서 짜증나”라고 뒤에서 투덜거리는 친구도 있다.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애들이 입시괴물이라 그럴까 봐 수업시간에 궁금한 게 있어도 질문을 못 하겠어.” 질문하는 게 왜 입시괴물이냐고 묻자,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답했다. “너무 질문 많이 하고 그러면, 애들은 일부러 쌤들한테 점수 따려는 걸로 봐. 근데 진짜 그런 애들은 딱 티가 나.” 궁금해서 묻는 것마저 우리는 ‘입시를 위한 행위’라고 서로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받는다. 각자도생의 수준을 넘었다. 때로는 경쟁자(친구)가 하는 일이 잘못되기를 바란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보다 편한 방법은 남의 등수가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은 연대하지만, 우리는 연대하지 않는다. 아니 할 줄 모른다. 연대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연대할 시간과 기회도 없다. 2016년 촛불집회 때 많은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왔다. 당시 많은 언론은 청소년들의 똑부러진 자유발언 영상을 보도하며 그들의 용기와 시민의식을 칭찬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때 거리에 나오지 않았던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청소년을 떠올린다. 전국 곳곳에서 주말마다 촛불집회가 열릴 때도 그들은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대충은 알더라도 광장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선생님이 촛불집회에 나가본 적 있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했을 때 교실에 깔렸던 적막을 기억한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분노할 만한 국정농단과 부정부패가 드러난 상황에서도 다른 나라 일인 양 교실에 갇혀 있었던 다수의 우리들. 국가의 중대한 사안에도 침묵하는데 주변의 일상적인 일들에 우리는 친구와 손잡고 문제해결을 위해 나설 수 있을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직접적인 ‘내 문제’가 아니면 절대로 나서지 않는다. 내 문제라고 생각해도 타인의 시선, 분위기, 입게 될 피해를 걱정해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남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을까? 연대도 해본 사람이 할 수 있다. 교실에서는 절대 연대하지 않는다.
나는 교문 밖에서 민주시민이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민주시민 교육을 교문 밖에서 스스로 찾아 해결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직접 해보는’ 활동 중심의 학습이었다. 교문 안에서는 시작부터 우리끼리 ‘작당모의’를 해볼 기회가 없었다. 원하는 활동을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기회를 찾아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2년간 지역 청소년수련관 소속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청소년의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이 교외 동아리에서 나는 ‘체인지 메이커’ ‘평창동계올림픽 남북공동응원단’ ‘청소년 평화통일기행’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세월호 추모행사’ 등의 활동을 했고, 지역 내에서 청소년 단체를 꾸려 ‘팔레트 프로젝트’라는 두발자유화 운동을 추진했다. 강원도교육청 학생기자단과 영상제작 동아리에서도 활동했다. 고3인 나는 요즘 화요일마다 영상미디어센터에 가서 단편 다큐 제작 워크숍에 참여하고, 목요일마다 장일순 선생의 사상을 공부하는 무위당 학교를 다니고 있다.
매주 토요일엔 원주에서 서울을 오간다.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이하 하자센터)에서 하는 10대연구소 활동 때문이다. 10대 당사자들이 직접 인문사회과학 등의 관점에서 자신들을 연구하는 이곳에서 청소년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 연구 소재는 ‘10대의 우울’ ‘학교 내 페미니스트’ ‘학원 생태계’이다.
운영은 물론 연구 주제를 선정하는 과정까지 철저히 청소년 연구원 중심이다. 연구를 도와주는 비청소년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고 똑같이 존댓말을 쓴다.(그럼에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개인정보를 묻지 않되 서로에게 관심을 둠으로써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분위기이다. 우리는 ‘나’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동시에 10대인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이곳에서 요즘 새롭게 배워가고 있는 시민성은 ‘다양성 존중하기’이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10대들이 모두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너무나도 다르다. 10대연구소에도 여러 사람이 있다. 조용한 사람, 활발한 사람, 컨디션이 안 좋은 사람, 기분 좋은 사람, 우울한 사람…. 나는 각자 그날의 감정은 제각각일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고 모두 잘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혹여 대화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소수의 의견에도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게 민주주의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시민이라고, 10대연구소에서 누구도 말하지(가르치지) 않지만 나는 가슴으로 배워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단편적인 교과서 속 지식이 아니라 생활에서 발견되는 우리 삶의 조각들이라는 걸 다시금 느낀다. 자기 삶과 가장 가까운 교실, 가정에서 민주주의를 해치는 요인을 찾아내고,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일이 민주시민교육의 시작이라는 것을.
‘시민’이라는 말을 들으면 광장, 선거처럼 거시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기 쉽지만, 자신과 주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그 자체가 ‘참여하는 시민’으로서 중요한 시작이다. 나라 문제보다 자기 주변 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어쩌면 더 어렵다. 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 가까운 타인들과 접촉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론 광장에서 군중의 일원으로 촛불을 드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참여가 될 수 있다.
어린 시민들의 세상을 위해
물론 ‘교문 밖의 학교(배움)’가 직접적인 활동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독서, 영화 감상 같은 것들도 있다. 어른들은 요즘 애들이 게임이나 노는 것만 좋아하고 책을 안 읽는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청소년들이 책을 많이 읽진 않지만, 그렇다고 책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주위에 ‘수업’을 싫어하는 친구는 많아도 ‘책’을 싫어하는 친구는 많지 않다. 각자 좋아하는 장르는 다르더라도 수업시간에 몰래 책을 읽는 친구는 언제나 있었다. 지금 고3인 우리 반 친구들의 상황도 딱히 다르지 않다. 시험 기간에도 자습 시간에 몰래 책을 붙들고 있다. 서로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추천하기도 하고, 그렇게 언급된 책을 대기 순번까지 짜서 돌려 읽는 모습은 꽤나 익숙하다. 영화는 뭐 당연히 말할 것도 없다.
친구들이 보는 것은 대부분 로맨스나 추리 소설이고, 액션영화이지만 그럼에도 차라리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해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지금의 학교교육보다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책과 영화는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고, 간접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시야를 넓히고, 공감능력을 키워주며, 생각을 깊게 만든다. 하다 못해 서로 책과 영화를 돌려 보며 연대의식도 생긴다.
가정에서 부모가 그 역할을 다하기 어렵다면 학교와 사회가 그 역할을 나누어야 한다. 행동하는 시민을 길러내기 위해서 제대로 된 민주시민의식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공교육을 바꿔나갈 수도 있고(이게 가장 어렵겠다), 이를 잘 실천하고 있는 대안교육에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메트스쿨’이라고, 아예 일터로 출근해 지역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형태의 학교도 있다. 자동차 정비공을 꿈꾸는 학생은 정비소에 인턴으로 등교(출근)해 멘토에게 기술과 노하우를 배우는 식이다. 홈스쿨링을 할 수도 있고, 혼자 세계 곳곳을 누비며 세상에 대해 배울 수도 있다. 동네 도서관, 영화관으로 등하교 할 수도 있다. 마을교육공동체를 통해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며 시민성을 기를 수도 있다.
다양한 형태의 학교를 인정하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이 가치 있다면 국가 차원에서 지원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에서 가장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연대하고 힘 모아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게 시민교육 아닐까. 세상의 모든 어린 시민에게는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도움을 청하고, 함께 도우며 세상을 같이 바꾸어나가는 경험, 즉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연습할 기회가 필요하다.
_서한울(필자가 강원도 원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쓴 이 글은 민들레 통권 123호에 실렸다.)
교육의 목적이 민주시민 양성이라는데
한국 교육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민주시민 양성’이라는데, 12년째 공교육을 받고 있는 나는 지금껏 학교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배워본 적이 없다. 누군가는 사회나 윤리, 도덕 시간에 ‘시민 불복종’ ‘삼권분립’ 등을 배우지 않느냐고, 자율활동, 자치활동 시간에 민주시민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학급회의를 하고, 학급임원을 뽑고, 학생회 활동을 하는 게 다 민주시민교육의 일환이라고.
난 이렇게 답하겠다. “아, 학교에서 미리 정한 주제로(교내환경 정화, 학교폭력 예방 등) 회의록 채우기 위해 보내는 그 시간이요?” “아, 대충 공부 잘하는 애들 시키는 그 인기투표요?” “아,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 채우려고 들어가서 쌤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봉사활동이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내 활동의 대부분은 ‘생기부에 기재될 때만’ 그 필요성을 지닌다. 누군가 생기부에 기재되지 않는 활동을 열심히 하면 “그거 왜 해?”라는 말을 듣는다. 그나마 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동아리 활동조차 생기부의 ‘동아리 활동’ 칸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두 개 이하만 하기를 권장한다. 너무 많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면 각각의 내용을 길게 담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 개, 네 개 이상의 동아리에 가입한 친구들도 있는데, 그들은 그냥 그 활동이 좋아서 하는 거다. 학교에서는 이런 열정적인 학생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쓸데없는 거 하느라 시간 관리 못하는 학생’으로 여긴다. 그 시간에 차라리 문제집을 한 권 더 풀라는 식이다. “그런 건 대학 가서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선생님들에게 지겹도록 들은 말이다.
반대로 생기부에 기재된다고 하면, 재미없어 보이는 교내 대회도 중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 참가한다. 대표적으로 교내 수학경시대회가 그렇다. 나도 작년에 이 대회에 참가했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재능도 없었는데, 혹시 상을 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결과는 처참했다. 문제 푸는 게 너무나 따분해서 몇 분 되지도 않아 교실을 나와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소위 공부 잘하는 애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대회든 일단 참가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실제로 이런 교내 대회들은 애초에 ‘상위권 애들 스펙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성적 좋은 애들이 가져갈 상인데 왜 해’라는 생각으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참가하지 않는다. 대회가 열릴 때마다 반복되는, 철저히 ‘그들만의 리그’다.
연대하지 않는 교실
이런 현실은 학생들을 개별화시킨다. 교내 대회도, 세특(세부능력특기사항)도, 수업도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예전에 다른 공식적인 일과로 수업을 놓쳤던 적이 있는데, 나는 친구에게 필기한 걸 보여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 해도 친구가 수업 중에 열심히 적은 ‘필기’라는 결과물을 아무런 대가없이 요구하는 것이 눈치보였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서 빌려주길 거절하는 친구도 있고, 빌려주긴 하지만 “걔가 자꾸 필기 보여 달라 해서 짜증나”라고 뒤에서 투덜거리는 친구도 있다.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애들이 입시괴물이라 그럴까 봐 수업시간에 궁금한 게 있어도 질문을 못 하겠어.” 질문하는 게 왜 입시괴물이냐고 묻자,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답했다. “너무 질문 많이 하고 그러면, 애들은 일부러 쌤들한테 점수 따려는 걸로 봐. 근데 진짜 그런 애들은 딱 티가 나.” 궁금해서 묻는 것마저 우리는 ‘입시를 위한 행위’라고 서로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받는다. 각자도생의 수준을 넘었다. 때로는 경쟁자(친구)가 하는 일이 잘못되기를 바란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보다 편한 방법은 남의 등수가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은 연대하지만, 우리는 연대하지 않는다. 아니 할 줄 모른다. 연대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연대할 시간과 기회도 없다. 2016년 촛불집회 때 많은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왔다. 당시 많은 언론은 청소년들의 똑부러진 자유발언 영상을 보도하며 그들의 용기와 시민의식을 칭찬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때 거리에 나오지 않았던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청소년을 떠올린다. 전국 곳곳에서 주말마다 촛불집회가 열릴 때도 그들은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대충은 알더라도 광장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선생님이 촛불집회에 나가본 적 있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했을 때 교실에 깔렸던 적막을 기억한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분노할 만한 국정농단과 부정부패가 드러난 상황에서도 다른 나라 일인 양 교실에 갇혀 있었던 다수의 우리들. 국가의 중대한 사안에도 침묵하는데 주변의 일상적인 일들에 우리는 친구와 손잡고 문제해결을 위해 나설 수 있을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직접적인 ‘내 문제’가 아니면 절대로 나서지 않는다. 내 문제라고 생각해도 타인의 시선, 분위기, 입게 될 피해를 걱정해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남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을까? 연대도 해본 사람이 할 수 있다. 교실에서는 절대 연대하지 않는다.
나는 교문 밖에서 민주시민이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민주시민 교육을 교문 밖에서 스스로 찾아 해결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직접 해보는’ 활동 중심의 학습이었다. 교문 안에서는 시작부터 우리끼리 ‘작당모의’를 해볼 기회가 없었다. 원하는 활동을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기회를 찾아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2년간 지역 청소년수련관 소속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청소년의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이 교외 동아리에서 나는 ‘체인지 메이커’ ‘평창동계올림픽 남북공동응원단’ ‘청소년 평화통일기행’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세월호 추모행사’ 등의 활동을 했고, 지역 내에서 청소년 단체를 꾸려 ‘팔레트 프로젝트’라는 두발자유화 운동을 추진했다. 강원도교육청 학생기자단과 영상제작 동아리에서도 활동했다. 고3인 나는 요즘 화요일마다 영상미디어센터에 가서 단편 다큐 제작 워크숍에 참여하고, 목요일마다 장일순 선생의 사상을 공부하는 무위당 학교를 다니고 있다.
매주 토요일엔 원주에서 서울을 오간다.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이하 하자센터)에서 하는 10대연구소 활동 때문이다. 10대 당사자들이 직접 인문사회과학 등의 관점에서 자신들을 연구하는 이곳에서 청소년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 연구 소재는 ‘10대의 우울’ ‘학교 내 페미니스트’ ‘학원 생태계’이다.
운영은 물론 연구 주제를 선정하는 과정까지 철저히 청소년 연구원 중심이다. 연구를 도와주는 비청소년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고 똑같이 존댓말을 쓴다.(그럼에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개인정보를 묻지 않되 서로에게 관심을 둠으로써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분위기이다. 우리는 ‘나’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동시에 10대인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이곳에서 요즘 새롭게 배워가고 있는 시민성은 ‘다양성 존중하기’이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10대들이 모두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너무나도 다르다. 10대연구소에도 여러 사람이 있다. 조용한 사람, 활발한 사람, 컨디션이 안 좋은 사람, 기분 좋은 사람, 우울한 사람…. 나는 각자 그날의 감정은 제각각일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고 모두 잘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혹여 대화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소수의 의견에도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게 민주주의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시민이라고, 10대연구소에서 누구도 말하지(가르치지) 않지만 나는 가슴으로 배워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단편적인 교과서 속 지식이 아니라 생활에서 발견되는 우리 삶의 조각들이라는 걸 다시금 느낀다. 자기 삶과 가장 가까운 교실, 가정에서 민주주의를 해치는 요인을 찾아내고,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일이 민주시민교육의 시작이라는 것을.
‘시민’이라는 말을 들으면 광장, 선거처럼 거시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기 쉽지만, 자신과 주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그 자체가 ‘참여하는 시민’으로서 중요한 시작이다. 나라 문제보다 자기 주변 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어쩌면 더 어렵다. 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 가까운 타인들과 접촉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론 광장에서 군중의 일원으로 촛불을 드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참여가 될 수 있다.
어린 시민들의 세상을 위해
물론 ‘교문 밖의 학교(배움)’가 직접적인 활동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독서, 영화 감상 같은 것들도 있다. 어른들은 요즘 애들이 게임이나 노는 것만 좋아하고 책을 안 읽는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청소년들이 책을 많이 읽진 않지만, 그렇다고 책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주위에 ‘수업’을 싫어하는 친구는 많아도 ‘책’을 싫어하는 친구는 많지 않다. 각자 좋아하는 장르는 다르더라도 수업시간에 몰래 책을 읽는 친구는 언제나 있었다. 지금 고3인 우리 반 친구들의 상황도 딱히 다르지 않다. 시험 기간에도 자습 시간에 몰래 책을 붙들고 있다. 서로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추천하기도 하고, 그렇게 언급된 책을 대기 순번까지 짜서 돌려 읽는 모습은 꽤나 익숙하다. 영화는 뭐 당연히 말할 것도 없다.
친구들이 보는 것은 대부분 로맨스나 추리 소설이고, 액션영화이지만 그럼에도 차라리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해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지금의 학교교육보다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책과 영화는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고, 간접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시야를 넓히고, 공감능력을 키워주며, 생각을 깊게 만든다. 하다 못해 서로 책과 영화를 돌려 보며 연대의식도 생긴다.
가정에서 부모가 그 역할을 다하기 어렵다면 학교와 사회가 그 역할을 나누어야 한다. 행동하는 시민을 길러내기 위해서 제대로 된 민주시민의식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공교육을 바꿔나갈 수도 있고(이게 가장 어렵겠다), 이를 잘 실천하고 있는 대안교육에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메트스쿨’이라고, 아예 일터로 출근해 지역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형태의 학교도 있다. 자동차 정비공을 꿈꾸는 학생은 정비소에 인턴으로 등교(출근)해 멘토에게 기술과 노하우를 배우는 식이다. 홈스쿨링을 할 수도 있고, 혼자 세계 곳곳을 누비며 세상에 대해 배울 수도 있다. 동네 도서관, 영화관으로 등하교 할 수도 있다. 마을교육공동체를 통해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며 시민성을 기를 수도 있다.
다양한 형태의 학교를 인정하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이 가치 있다면 국가 차원에서 지원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에서 가장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연대하고 힘 모아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게 시민교육 아닐까. 세상의 모든 어린 시민에게는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도움을 청하고, 함께 도우며 세상을 같이 바꾸어나가는 경험, 즉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연습할 기회가 필요하다.
_서한울(필자가 강원도 원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쓴 이 글은 민들레 통권 123호에 실렸다.)